Episode 13. 에필로그
그런 날이 있었다.
아무 이유 없이 연차를 3일이나 내고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었던 날. 죽도록 출근을 하고 싶지 않아서 팀장님께 몸이 아프다며 거짓말을 했던 시간들이 있었다.
이 무기력의 원인을 알고 싶어서 구글링을 해봤다. ‘번아웃’, ‘우울증‘과 같은 자극적인 키워드들이 나의 증상을 대신 설명했다. 반발심이 생겨 이상하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5년이 지나서야 내가 왜 그렇게 무기력했는지 속시원하게 답할 수 있게 되었다. 나에 대한 ’무관심‘이 나를 병들게 했던 것이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내 안의 나’와 ‘현실 속의 나‘ 사이에서 소통이 끊어진 상태를 ’내적 고립‘이라 말한다. 또한 그 고립감이 심해지면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행동들을 하게 된다. 현실 속의 내가 아무리 잘 나가고 멋진 모습이라 할지라도 ’내 안의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면 불안정한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다는 것이다.
대기업에 입사한 이후 나는 줄곧 외로웠다. ‘나’에 대한 이해(Understanding) 없이 사회생활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나 빼고 다 회사생활 잘하는 것 같고, 나에게만 문제가 있다고 믿었다. 주어진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데에 온 힘을 쏟았다. ‘내 안의 나’의 상태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어떻게 올라온 자리인데 나도 남들처럼 얼른 적응해야지”라며 채찍질하기 바빴다.
다행히 입사 후 5년 동안 내가 겪었던 다사다난한 사건들은 병들어 가던 ‘나’를 보여줬다. 세 명의 남자친구들에게 차여보면서, 사내 화재사고를 겪으면서, 장기 출장에 밤낮없이 일하면서, 진급이 누락되면서. 나와 맞지 않는 틀에 나를 욱여넣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사람은 가장 최악의 순간을 마주하고 나서야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같다. 지금까지 얼마나 내 마음을 무시하며 타인의 기대에 맞춰 살아왔는지 깨닫고 후회스러웠다.
그렇게 나는 6년 만에 부서 이동을 했고 다시 신입사원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선택한 곳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배워가고 있다. 이제는 삶의 모든 선택을 내가 나를 위해 ‘직접’ 선택하려고 한다. 인생은 나를 알아가는 노정이기에, 실패도 겸허히 받아들일 줄 아는 배짱도 생겼다.
누군가 나에게 ‘행복’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행복은 삶의 우여곡절 속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발견하고, 나에게 어울리는 선택들을 해가는 것이라고.
부서 이동을 하면서, 내년 진급 대상자 중 나는 가장 우선적으로 배제되었다. 앞으로 진급이 몇 년이나 밀릴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 내가 나를 이해하고 있고, 내가 원했던 환경에서 일을 하고 있으니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다.
지금까지 ‘대기업 6년차 신입사원입니다’ 브런치북을 응원해 주신 모든 독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