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2. 부서 이동
입사 6년차에 나는 직무를 전환했다.
5년 동안 정들었던 팀에서 떠나 완전히 새로운 환경에서 일을 하기까지 많은 고민들이 있었다. '이전 직무가 나와 맞지 않는다'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새로운 직무가 나와 맞을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이렇게 계속 망설이며 시간만 끌다가 원치 않는 일만 하며 살 수 없었다. ”누가 회사 일을 원해서 해요, 돈 주니까 하는 거지 “라고 말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물론 맞는 말이다. 다만 ‘나’라는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일 또는 내가 선택한 일을 해야 행복한 사람이었다(이 깨달음은 5년 동안 회사생활을 하면서 얻은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높은 연봉을 받고 여행 다니고 취미생활 하는 삶이 나에게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되려 공허했다. 연차가 쌓일수록 '일'이라는 게 삶의 질에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실감했다.
까마득한 미래가 두려웠다. 그럼에도 괴로움을 동력 삼아 부서 이동 나아가 직무전환을 해낼 수 있었다. 그것도 나와 아무런 연고가 없던 '바이오(Bio)' 산업으로 팀으로.
학부생 때부터 나는 생체 내 의약품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생물학 전공이 아닌 화학을 전공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 시절에는 화학과가 취업이 더 잘됐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 그 선택이 모든 문제의 시초였던 것 같다. 충동적으로 선택한 전공에 무려 10년이나 묶여 있었다니.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취업을 하기 전까지는 이 정도로 이 일이 싫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결국 나는 12년이 지나서야 내가 원했던 분야에서 일을 할 수 있었다. 글로 써보니 간단해 보이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사내 공개 모집에 서류에서만 무려 5번을 탈락했다. 그럴만했다. 나는 바이오 쪽에 아무런 스펙과 배경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내공모: 사내 부서이동자를 희망하는 팀의 공고
5년 동안 쌓아온 커리어의 풀이 이렇게나 좁은지 몰랐다. 그러나 전략을 바꿔서 접근해 보니 조금씩 반응이 달라졌고, 6개월 만에 희망하던 팀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이 글은 사내 부서이동에 관한 경험담임을 참고 바랍니다
직접 컨텍하기
‘무스펙으로 직무전환을 하는 방법’은 마치 나에게 호감이 없는 이성을 유혹하는 기술과 비슷했다. 상대가 나에게 먼저 다가올 마음이 없는데, 내가 그와 만나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답은 정해져 있다. 내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
만약 이동을 희망하는 팀이 정해져 있다면, 담당 팀장에게 메일을 보내서 ‘직접’ 약속을 잡는 걸 추천한다. 이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공식적으로 사내 부서이동은 HR에서 올린 공모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사내 공모는 경쟁률도 높고, HR에서 주관하다 보니 공지가 뜰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공모를 올린 팀마다 일부 내정자가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이 모든 변수들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은 정공법밖에 없다.
이동하려는 팀에 대한 사전지식이 있으면 좋겠지만 없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팀으로 이동하고 싶습니다’라는 입장보다는 ‘이 팀에 관심이 있는데 몇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와 같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놓고 만남의 약속을 잡도록 하자. 생각보다 이런 연락에 우호적인 팀장들이 많으니 지레 겁먹지 않아도 된다.
강약조절하기
자, 이제 만남이 성사되었다면 자신을 어필할 시간이다. 만약 짝사랑 상대와 어렵게 데이트를 갖게 되었다면, 주어진 시간의 일분일초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전략이 필요하다. 바로 강약조절로.
첫째로 강화해야 할 포인트는 경력이다.
전공과 성격이 다른 분야에 지원을 한다면, ‘큰 성과 위주’로 자신의 스펙을 나열해서는 안된다. 최대한 세분화를 해야 한다. 소위 말하는 ‘자질구레’한 것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전문성을 크게 요구하지 않는 이상, 회사생활은 거기서 거기다. 사내 시스템에 익숙한지, 어느 팀이랑 협업해 왔는지만 들어봐도 우리 팀에 도움이 될만한 사람인지 판단할 수 있다. 그래서 자신의 스펙을 쪼개서 세부적인 키워드로어필을 해보면, 어느 팀이든 귀를 기울일만한 요소가 하나쯤 껴있을 것이다.
나는 자기소개서 초안에 ’생산‘과 ’공정 개선‘ 경력을 강조했었다. 그러다 보니 생산이나 공정쪽파트가 아닌 팀에서는 일절 오퍼가 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키워드의 개성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분석’과 ‘구매’라는 더 보편적인 키워드를 추가해봤다. 생산을 준비하다 보면 구매파트와 소통할 일이 많고, 공정을 연구하다 보면 분석 기기를 사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이 키워드들을 추가하자마자 오퍼가 들어오고 면접이 잡혔다. 이렇게 보편적이고 강력한 무기를 나는 숨겨놓고 있었던 것이다.
스스로 경력을 과소평가할 필요 없다. 회사에서 몇 년 을 일했든 꽤나 잡다한 업무들을 거쳐갔을 테니 마음껏 깨알 어필해 보도록 하자(단, 사례도 함께 언급할 것).
둘째로 직무전환 사유는 두리뭉실한 게 낫다.
이동 지원서 중 특히 ‘직무이동 사유’ 항목이 가장 고역이었다. ‘진로가 맞지 않았다’라고 솔직하게 쓰면 괜한 오해를 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항목에서 점수를 얻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깎이지는 않도록 말을 잘 다듬어야만 했다.
‘적성’이라는 자극적인 키워드에서 ‘잦은 출장으로 인한 체력 저하‘와 같은 최대한 공감이 갈만한 키워드로 변경했다. 실제로 출장 여부는 부서 이동의 보편적인 사유다. 면접관 입장에서 꼬리물기 의문이 들지 않도록 두루뭉술하게 동기를 적어냈다.
또한 이동 사유에 자신의 열정을 과하게 드러내는 건 장단기적으로 좋지 않다. 기대가 높을수록 실망할 가능성은 커진다. ‘잘할 것 같다’ 혹은 ‘자신 있다’라는 확신에 찬 말은 되도록 삼가는 것을 추천한다.
인간미 어필하기
인사 채용은 결국 같이 일할 ‘사람’을 뽑는 일이다.
경력이 업무와 아주 무관하지만 않다면 이제 인간미로 승부를 봐야 한다.
인간미는 별게 아니다.
우리 팀에 와도 분위기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주는 것이다. 그만큼 신뢰감 있는 이미지를 전달하는 게 중요하다. 더 쉽게 말하자면, ‘예의’를 차려야 한다.
면접 때 음료 하나라도 준비하여 ’바쁘신 와중에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하다‘라고 인사드려 보자. 이때 음료가 식을 수 있으니 테이크아웃 커피보다 병음료를 추천한다.
말은 최대한 간결하게 하고, 장황해지는 걸 경계해야 한다. 말이 길어질수록 상대방의 집중력은 떨어지고 말의 핵심마저 기억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또한 팀장의 말을 수첩에 메모해가며 들어도 좋은 인상을 남길 수 있다. 이건 대면 면접의 치트키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사생활을 먼저 오픈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결혼은 했는지, 아이는 몇 살인지 등 팀장과 최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자신을 먼저 개방하는 전략이다. 특히 팀장이 직접 물어보기 조심스러웠던걸 먼저 얘기해 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전공, 취업 모두 자신이 직접 선택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거의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처럼 성적에 맞춰서 대학과 전공을 선택하는 문화를 가진 나라도 없다. 대학에 입학해서 전망 좋은 전공(들)을 선택하고, 20대 후반까지 취업 준비를 하다가 괜찮은 회사에 겨우 입사해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게 오늘날의 청춘들이다.
얼핏 보면 모든 결정과 선택을 스스로 한 것 같지만, 사회적 분위기에 내몰려서 한 선택들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입사를 하고 실무에 투입되고 나서야 덕업일치는 환상일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실제로 내 주변에 직무전환에 대해 고민하는 동료들이 많다. 개성 강한 MZ세대에게 자신과 맞지 않는 직무는 버티기 어려운 스트레스를 준다.
부서를 이동한 지 반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감히 이렇게 조언을 하고 싶다. 3~5년을 일해봐도 직무에 애정이 생기지 않는다면 일단 부서 이동을 도전해 보라고. 물스펙이 돼버릴까 걱정이 되겠지만 한 번 부서를 이동했다고 이전 경력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확장될 수 있다. 모든 업무에는 연결고리가 있고 오히려 지금 이 시대는 멀티테스킹이 강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할 날이 지금까지 일해온 날보다 훨씬 길다. 전화위복이다. 단 한 번이라도 나를 위한 용기를 낸다면, 그 경험이 또 다른 새로운 커리어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