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1. 진로 고민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노력과 재능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할까?
‘전문성‘ 하면 ‘10000시간의 법칙’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10000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이론이다. 10000시간=1000시간(매일 3시간 x 1년) x 10년으로 10년의 법칙이라고도 불린다.
얼핏 들으면 참 희망적인 법칙이다.
누군가 ‘이 일에 재능이 없는 것 같다’ 혹은 ‘이 일이 더 이상 재밌지 않다’라고 고민할 때, ‘누구나 그렇다, 전문성을 갖는 건 10000시간의 노오력이 필요한 일이다’라는 따듯한 위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10000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한 분야에서 일해 본 나의 입장은 달랐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 노력보다 재능이 중요하고, 재능을 능가하는 건 적성이었다.
여기서 ‘재능’은 타고난 능력을 말하고, ‘적성’은 성질과 성향이 잘 맞는 걸 뜻한다. 더 쉽게 정의하면, ‘재능’은 노력 대비 남들보다 잘하는 것이고 ‘적성’은 같은 노동 대비 남들보다 스트레스를 덜 받는 것이다.
일도 인간관계와 마찬가지였다. 10년을 만난 애인과 헤어지고 1달 만난 애인과 결혼하는 케이스처럼, 잘 맞지 않는 일은 10년을 해도 스스로 전문성에 의심이 간다. 그리고 잘 맞는 일은 10분만 해봐도 ‘나 뭐 되네?’하고 감이 온다.
31살에 진로 고민을 하다니
입사6년 차에 나는 딜레마 빠졌었다.
바로 직전 해에 보기 좋게 고평가를 받았는데도 이 일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에 대해 높아진 기준치가 부담스러웠다. 나중에 진급을 해서 더 많은 역할들을 부여받을 상황들이 기대되지 않았다. 아니, 최대한 미루고 피하고 싶었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이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부족한 실력을 가지고 1년 동안 죽어라 노력해서 고평가를 받아낼 수는 있었지만, 다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성과에 대한 욕심도 흥미도 생기지 않았다. 행여 내가 이 분야의 실력자로 인정을 받더라도 나는 행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더 이상 ‘노력부족’이라는 말로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노력도 할 만큼 해봤으니 ‘나와 연구직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현업에 집중하기보다 더 늦기 전에 진로를 바꾸는 방향으로 고민의 무게중심을 옮겼다.
30대가 돼서도 진로 고민을 하다니..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소거법으로 적성 찾기
‘어떻게 하면 적성에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일은 겪어봐야 안다’는 것쯤은 알만한 나이였기 때문이다(대학원 입학 전만 해도 나는 연구직이 적성에 잘 맞을 줄 알았다).
적성에 딱 맞는 일을 골라서 찾아가는 건 마치 파랑새를 쫓는 일과 같다.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걸러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고 느껴졌다. 적성에 안 맞는 일들을 피해 가는 게 오히려 나의 강점을 더 날카롭게 만들어가는 효율적인 작업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질문을 바꿔봤다.
나의 경험과 더불어 여러 문헌들을 참고했을 때,
크게 세 가지로 추릴 수 있었다.
기억이 잘 안 난다
3년차 때 사내 상담소에 기억력 테스트를 신청했었다. 내가 다른 동료들보다 업무에 대한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부터 모범생 축에 속했던 나는 한 번도 내 기억력이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되려 좋았으면 좋았지.. 머리가 갑자기 나빠진 건가 걱정이 됐다.
우려와 달리, 기억력 테스트 결과가 상위레벨이 나왔다. 어이가 없었다. 근데 왜 나는 현업에서 쓰는 데이터 수치, 프로젝트 진척사항 같은 중요한 정보들을 자꾸 까먹을까? 그렇다. 흥미의 차이었다. 그 당시 동료들의 생일은 다 외웠던걸 보면 내 머리가 나빠진 게 아니라 그저 나는 관심 없는 일은 기억에 잘 담지 않는 성향이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의 기억력은 편향적이다. 진화론적으로 우리의 뇌는 사용하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 자신에게 ‘중요하다‘라고 인식되는 정보들을 위주로 기억을 한다. 나에게 시간이 지나도 또렷한 기억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다음날이면 잊혀지는 기억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뇌는 이미 나의 흥미와 적성을 알고 선택적으로 기억들을 저장해 왔는지도 모른다.
다음 스텝이 잘 안 보인다
일머리가 나쁜 사람들의 특징이 ‘일의 다음 스텝을 모른다’라고 한다. 만약 연차가 5년 이상 쌓였는데 여전히 지시받은 일의 타임라인과 로드맵이 그려지지 않는다면, 본인의 적성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천재 과학자 아인슈타인도 집에서는 바보 취급을 받았다고 한다. 매번 연구실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헤매고 기본적인 집안일도 못했기 때문이다. 일 잘하는 PL책임님도 식당에 가면 매번 고기를 못 굽는다. 몇십번은 회식자리에서 고기를 구웠을 텐데 여전히 답답하게 고기를 구우신다.
‘본업이 아니니까 상관없지’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유독 몇 번을 배워도 잘 못하거나 남들만큼 익숙해지지 않는 분야가 있을 것이다. 그게 하필 재수 없게 본업일 경우,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직무 이동을 반드시 고려해봐야 한다.
성취감보다 해방감을 쫓는다
쉽게 말하면 ‘칼퇴’가 성과보다 중요하다. 만약 깊게 더 알고 싶고, 더 잘하고 싶고, 전문가가 되고 싶은 성장에 대한 욕구보다 그냥 집에 빨리 가고 싶은 욕구가 훨씬 강하다면 적성을 고려해 보길 바란다.
참고로 적성에 맞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몰입‘을 자주 경험한다. 몰입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무아지경이 되는 상태를 말한다. 이들은 일을 사랑하고 몰입을 즐기고 집에 가서도 일에 관한 생각이 꼬리를 문다.
반대로, 사람이 본업에 집중하지 못하면 그 에너지가 자꾸 딴 길로 샌다. 예를 들어 취미생활, 인간관계, SNS와 같이 나를 표출할 다른 도구를 찾는다. 나의 한 주 스케줄을 돌아본다면, 내가 어디에 에너지를 쏟고 있는지 보일 것이다. 또한 내가 지금 적성에 맞는 일을 본업으로 삼고 있는 건지 짐작해 볼 수 있다.
나의 직무 이동이 결정되면서 주변의 피드백이 두 가지로 갈렸다. 우려와 격려.
회사에서 한 우물만 파왔던 사람들은 걱정과 우려를 내비쳤다. ‘이제 진급 코앞인데 괜찮겠냐’, ‘물스펙 된다’, ‘네가 맡고 있던 프로젝트 성과도 좋은데 굳이 왜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와 같이 예상은 갔지만 막상 들으면 불안해지는 조언들을 건넸다.
반면, 회사생활을 하면서 직무 이동을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들은 응원과 격려를 해주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말은 ’회사생활 거기서 거기다, 적응하는 거 어렵지 않을 거야 ‘라는 말이었다. 그 어떤 말들보다도 경험자의 한 마디가 가장 따듯하고 든든했다.
인생은 짧으면서 길다. 생각 없이 보내면 짧고, 어떻게든 개척하려고 하면 길다. 나는 흘러가기만 할 뻔한 나의 시간들을 잠시 멈추고자 한다. 다시 신입사원으로 U턴해서 내가 직접 직무를 선택해서 다시 한번 살아보려고 한다.
물론 이 직무마저 나와 맞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 노정 또한 나를 알아가는 소중한 시간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