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sode 10. 인사 평가
나는 일을 참 못했다.
돌이켜 보면, 내가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정의했기 때문에 더욱 무능해졌던 것 같다. 회사는 나를 믿어서 채용을 했는데 내가 나를 믿지 못했다.
그렇다. 나의 업무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행여나 나의 본실력이 드러날까 업무에 소극적으로 임했었다. ‘시키는 대로 잘하는 착한 이선임’이라는 가면을 썼다. 주도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지시받는 대로 일하는 것이 훨씬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입사 3년차에 팀장님과 면담을 하게 되었다. 평소와 별다른 긴장감 없이 회의실로 들어갔는데.. 오히려 팀장님께서 긴장하신 듯 어렵게 말을 꺼내셨다.
당황스러웠다.
나 자신에게도 남에게도 한 번도 던져본 적이 없던 질문이었다. 솔직하게 답을 해야 하나 적당히 돌려서 말해야 하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하지만 이미 새빨게진 내 얼굴이 대신 팀장님께 답을 해주고 있었다.
“아닌 거 다 알아. 많이 힘들어 보여.“
이상한 타이밍에 눈물이 쏟아졌다. MZ스럽게 ‘제가 일을 사랑까지 해야 하나요?’라고 받아쳐볼까도 고민했지만 울컥한 마음은 진정되지 않았다.
무엇이 내 마음을 건드렸던 걸까?
언젠가 비슷한 눈물을 흘렸던 적이 있었다. ’연봉 1억을 포기하고 경찰관이 된 변호사‘, ‘5년간 무일푼으로 영화감독을 준비했던 작가’ 등 부를 포기할 정도로 자신의 일을 더 사랑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혼자 엉엉 울었었다.
나도 가슴이 뛰는 일을 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아니, 일을 하면서 가슴이 뛰어보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저 돈 벌기 위해 회사 다니는거다‘, ’회사 생활에 의미를 두지 않는다‘라며 말해왔지만, 그 말이 나에게 독이 되어 스스로를 상처 내고 있었다.
나는 회사에서 단 한순간도 ’나‘를 위해 일해본 적이 없었다. 물론 가끔은 보람도 성취감도 느껴봤지만, ‘회사를 위해 일을 해준다’라는 태도로 3년 동안 출퇴근을 해왔다. 그렇게 입사 4년차가 된 나에게 남은 건 회사에 대한 불만과 잔머리 내공뿐이었다.
문득 시간이 아까웠다.
4년이면 대학을 입학해서 졸업을 하고, 대학원을 입학해서 넉넉하게 석사 학위는 딸 수 있는 기간이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왜 눈치만 보면서 지냈을까? 미련이 남았다. 너무 아쉬웠다. 다시 입사 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지금과 똑같이 지낼 것 같지는 않았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결심이 섰다. 억지로라도 이 일을 사랑해 보겠다고. 딱 6개월만이라도 일에 몰입해 보자. 그래도 내 마음이 뜨뜻미지근하다면, 흘러가버린 시간에 대한 미련이 거둬질 것 같았다. 반년 동안 단계별로 나를 업그레이드시켰다. Step 1부터 Step 4까지.
그렇게 나는 연말 고과에서
선임 중에 유일하게 A를 받을 수 있었다.
Step 1.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자기계발의 시작은 시간표를 짜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현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모든 발전의 시작이다. 그랬을 때 자신을 포함한 모두가 인정할만한 성장을 이룰 수 있다.
나는 ‘역량이 부족하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합리화를 하고 있었다. ‘나도 부족한 거 안다’라는 태도로 일관하며 발전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무엇이 구체적으로 부족한데?’라고 자문해 보면 모호했다. 이것도 부족하고 저것도 부족한데..라는 생각만 맴돌았다.
그래서 용기를 냈다. 수치심을 직면할 용기.
가장 꺼려지면서도 가장 중요한 작업이다. 나와 일해온 가까운 동료들에게 솔직한 피드백을 구했다. 애매한 답변을 피하기 위해 구체적으로 물었다.
‘많이’ 써달라고 했다면, 마음 약한 선배들이 듣기 뻔한 역량들을 말할 것만 같았다(예컨대 소통, 전문성, 끈기 등). 반면, ‘딱 한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평소 나와 일하면서 거슬렸던 ‘한 가지’가 바로 생각날 거라고 예상했다.
몇 가지 추려진 특징들을 내가 올해 키워야 할 역량으로 선정했다. 나를 빛내줄 땔감들이 준비되었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불을 지펴보도록 하자.
Step 2.
도움 요청하기
장단기적으로 개선할 역량을 정했다면, 그 역량을 키울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스스로도 전략을 세워봐야 하지만, 관리자 입장에 있는 다른 선배들에게 피드백을 요청해 보는걸 강력히 추천한다.
한 선배는 나에게 ’집요함‘을 키웠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다. 이 단어를 듣자마자 나에게 어떤 태도가 필요한지 알 것 같았다. 다만 구체화가 되지 않았다. ‘어떤 일에도 포기를 하지 말라는 건가?’라는 막연함이 느껴졌다.
그래서 팀장님께 도움을 구했다. ‘집요함’을 키우고 싶으니 *KPI 에 해당 항목을 넣어달라고 말이다. 이렇게 자발적으로 KPI를 늘리는 직원은 처음 본다는 표정이셨지만, 이내 아주 명확한 피드백을 받아볼 수 있었다.
*KPI: 핵심성과지표, 한해의 성과 목표
생각해 보면, 상사에게 도움을 요청해서 나쁠 게 하나도 없다. 일단, 상사의 자기 효능감이 올라간다. 자신이 팀원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뿌듯함과 동시에 지금까지 회사생활을 잘 해온 것 같다는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는다. 그리고 상사가 직접 역량개발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에, 그 ‘방향’대로 일을 실행했을 시 좋은 평가를 주고 싶어진다.
즉, 사내 인간관계가 증진되고 평가도 좋게 받을 가능성이 올라간다.
Step 3.
결과 어필하기
위 Step 2대로 이행했다면 이미 좋은 성과가 적어도 하나는 산출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의 실력을 뽐내야 한다. 실제로 이룬 것보다 2배 이상 대단한 걸 이룬 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에 약하다.
동물들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몸을 부풀리고 깃털을 세운다. 인간이라고 다르지 않다. 어둠 속에서 옥석을 가리는 건 인간의 본능이 아니다. 크고 화려한 걸 보면 대단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본능이다.
다수가 모여있는 미팅일수록, 특히 관리자급이 많이 참여하는 미팅일수록 움추러들면 안 된다. 오히려 눈치껏 뻔뻔하게 어필을 해야 한다.
어필시에, (1)어떤 문제를 개선했고 (2)이로 인해 창출된 가치를 최대한 숫자로 표현하여 보여주는 것이 가장 좋다. 상사들은 그래프, 숫자와 같이 직관적으로 표현하는걸 매우 좋아한다. 이해하기 쉽고, 위에 보고하기도 간편하기 때문이다.
Step 4.
감사 표시하기
‘성과 뽐내기’만큼이나 고평가를 받는 데에 중요한 전략이 있다. 바로, 도와주신 분들에게 감사표현을 하는 것이다.
감사표현을 하나의 ‘덕목’이라고 볼 수 있지만, 상호 간의 호감을 불어 일으키는 강력한 (정치)전략이기도 하다. 앞서 Step 2에서 상사가 받은 긍정적인 보상이 감사인사를 받은 동료들에게도 전해진다.
한 해가 마무리 되어갈 즈음에, 나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줬던 동료들에게 카톡이나 메신저로 감사인사를 전해 보면 어떨까? 이 또한 나쁠게 단 하나도 없는 회사생활 전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