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전원소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U진 Jun 23. 2021

동네 마실

"얘가 어떻게 내려왔대?"

몇 살 때인지 모르지만 왠지 뒷걸음질로 마루를 내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뒤로 한 발 한 발 옮겨 마당에 발을 내디뎠을 때 기쁨이란. 빨래를 하고 있던 엄마가 놀라서 말했다. 


이후로 나의 걸음은 온 동네로 옮겨졌다. 아빠 말로는 기저귀를 떼기 전부터 엄마가 집안일을 하는 틈을 타서 이곳저곳 돌아다녔다고. 내가 기억하는 건 제법 컸을 때인데 한 번은 봉도리를 벗어나 작은 오르막길을 올랐다. 처음 보는 동네가 나타났다.

"어디 살아?"

한 여자아이가 길가에 쪼그려 놀고 있었다. 

"저기."

여자아이가 바로 앞 집을 가리키려 말했다. 

"나는 저 아래 살아."

내가 아랫동네를 가리키자 아이는 다른 세계에서 온 생명체를 만난 것처럼 신기해했다. 나보다 한 살 어렸는데 우리 동네를 궁금해했다. 그 반응을 보니 뭐라도 알려줘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이에게 짐짓 어른 행세를 하면서 바깥세상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곳에는 가게가 두 개가 있어. 큰 도로도 있고. 차가 많이 다녀서 길을 건널 때 조심해야 해. 아, 우리 집은 곧 차를 살 거야. 아빠가 그런다고 했어. 차가 생기면 아빠가 샀다는 산에 갈 거야. 혹시 포클레인 본 적 있어? 아빠랑 산에 가서 포클레인을 구경할 거야. 그 산에는 커다란 광산이 있거든. 다음에 너도 보여줄게."

가게와 도로를 빼면 다 거짓말이었다. 심지어 차가 많이 다닌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나중에 학교 다닐 때도 차가 거의 안 다녀서 도로 중앙선만 밟으면서 집까지 걸어온 적도 있었다. 산 이야기는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  포클레인은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바람은 있었다. 나는 침을 튀기며 얼토당토아니한 말을 한참 떠들어댔다. 아이가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일 때마다 나의 허풍은 점점 더 부풀려졌다. 그러는 사이 보니 저녁 시간이 가까워졌다. 

"얘들아, 밥 먹자."

아이의 부모님이 아이와 나를 불렀다. 

"우리 집에서 밥 먹을래?"

"그래, 좋아."

정말 배가 고팠다. 나는 원래 자연스레 밥상 앞에 그 아이 가족들과 둘러앉아 저녁을 먹었다. 아무도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묻지 않고 밥을 내주었다. 밥을 다 먹고 TV까지 편하게 보는데 밖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났다. 아빠였다. 

"아빠!"

"집에 가자."

아빠는 하루 종일 어디에 있었냐고 묻지도 않았다. 걱정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고맙다고 인사드려야지."

나는 아이에게 손을 흔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오토바이 뒤에 앉아서 아빠 허리를 꼭 잡고 언덕을 내려왔다. 아빠는 내가 그 집에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 집에서 진작에 우리 집에 전화를 해놓았다고 한다. 저녁을 먹일 테니 천천히 데리러 오라면서. 내가 누군지 물은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아이 얼굴만 봐도 누구네 집 아들딸인지 다 알았다. 그만큼 좁은 동네였는데 나는 신도시에서 온 척을 했던 것이다. 참으로 얼굴 화끈해지는 일이다. 


나중에 우리 집에서 전기 옥장판을 샀다. 뜨끈뜨끈한 장판에 이 씨 세 자매가 차례로 누워보기로 했는데 내가 먼저 누웠다가 단잠에 빠졌다. 한참 뒤 슬며시 일어났더니 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어이구, 저 뻔순이. 어릴 때도 처음 보는 사람 집에 들어가서 밥까지 얻어먹고 오더니."

태연한 척 일어나며 말했다. 

"자, 이제 다른 사람 차례야."


나(왼쪽), 이날 처음 만난 동네 아이(오른쪽)



매거진의 이전글 내 고향 마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