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살아가며 우리는 행복보다는 비참함을 더 느끼기 마련이다. 만일 지금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고 삶이 마냥 좋게만 느껴진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자기 스스로를 돌아보자. 전제되는 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나 자신을 냉정히 바라보아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 하나 완벽하게 잘하지 못하고 설령 한다고 해도 내가 원하는 이상적 재주에 비하면 하찮기 마련이다. 기껏해야 나보다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싸구려 비교우위에 서있는 것이 다반 수다. 생각보다 의지가 뛰어나지 않아 가끔씩은 동기부여도 받아야 하고 나 스스로 무언가를 하기보다는 사회의 규율에 묶여 타성에 젖어 일을 한다. 어쩔 수 없이 직장을 다니고 어쩔 수 없이 돈을 벌고 어쩔 수 없이 살아가다 죽는 것이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이다.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선택한다 해도 그 선택이 과연 미래에 옳을지 틀릴지조차 알 수 없다.
치열하게 고민해서 무엇을 알 수 있을까. 당장 한 치 앞도 모르기 마련인데. 우리가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일은 이 사회에서 ’ 그래 너는 치켜세워줄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구나 ‘라고 여기기에 스스로를 당당하게 여기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사회의 지위나 소유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나 혼자만을 돌아본다면, 언제든 나는 이 사회에서 대체 가능한 소모품일 뿐이다. 세상은 내가 있던 없던 상관없이 잘 흘러간다. 냉정히 말해서 나라는 존재는 이 세상에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다.
내가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있던 무엇을 소유하고 무엇을 누렸던, 세상에서는 그저 대체 가능한 한 명의 사람일 뿐이다. 나 하나가 없다고 지구가 멸망하는 일은 없다. 개인이 무엇을 타고나던, 무엇을 지녔던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나는 생각보다 더 하찮은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실존이 직면한 문제인데 이러한 현실을 인지한 사람들은 초라한 자신을 바라보고는 허무주의에 한 발을 내딛게 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동기부여들 중 하나가 새벽에 일어나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관찰하는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동기부여를 받아 '아 나도 저렇게 열심히 살아야지'라고는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왜 그 사람들이 열심히 사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각자가 삶에서 무엇에 큰 비중을 두었는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는 것들이 도대체 어떻게 생겨나는지,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사람은 비참한 개인을 생생히 마주하게 되고 허무함에 찌들지만 애써 이 느낌과 생각을 무시하려 한다. 우울하면 나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 가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잊으려 애를 쓴다. 우리는 자신의 삶이 봉착한 최종적인 문제와는 거리가 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다. 뜻대로 태어나지도 않았으면서 마음대로 살아갈 수도 없는 인생을 돌아보다면, 비통에 빠지기에는 충분하다.
우리가 무언가에 대해 걱정할 때에는 그 걱정에 대해 반응한다. 하지만 걱정이 없을 때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건강 또한 마찬가지인데 건강할 때는 건강 외에 관심을 가져 건강하다는 사실조차 눈치 채지 못하고 병이 들어서야 건강했을 때를 그리워한다. 지나간 시간은 어떨까? 마찬가지이다. 자신에게 많은 시간이 있어도 당시에는 그 시간이 귀한 줄 모르다가 시간이 지나서야 헛되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다.
누구나 인생을 살아가며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한 번쯤은 생각해본다. 하지만 나 자신에 대해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생각할 수 있다는 기회가 많지 않음을 안다면 감사함을 느낄 것이다. 사람이 가진 근원적 비참함은 우리가 풀어야 할 숙제이지 외면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행복에 대해 생각하기 이전에 삶의 비참한 모습과 허무를 직면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