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어느 햇살 좋은 날, 빨래를 가득 돌리고 나서 돌린 빨랫감 건조기에 넣고 뽀송하게 세탁을 마쳤다. 다 돌아간 빨랫감을 건조기에서 옷을 꺼내려고 보니 우수수 떨어지는 담뱃가루. 세탁기에 돌려져 한껏 쭈그러지고 건조기에서 돌려져 바짝 마른 담뱃갑과 담뱃재들이 나온다. 한숨 한번 쉬고 핸드폰을 들어 남편 번호를 누른다.
"오빠~ 통화 돼? 이거 뭐야. 담배 왜 피워~ 건조기에서 온사방 담뱃가루 나와서 엉망이야.
그리고 술은 먹어도 담배는 피우지 말랬잖아!"
건조기에 담뱃가루와 제대로 믹스돼서 돌아간 빨랫감보다 내가 열을 낸 부분은 다른데 있다. 남편은 어렸을 적 집에서 연탄가스를 마시고 너무 고생했던 사람이라 현재도 기관지가 좋지 않아 담배만은 제발 피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래도 그 부분은 본인도 충분히 인정하는 부분이라 거의 피우는 일은 없었는데 말이다. 수화기 너머 남편은 빨랫감 다 상하게 해서 미안하다. 요즘 너무 스트레스받는 일이 있어서 그랬다며 확답은 못하겠지만 가급적 피우지 않겠노라며 또 한 번 미안해했다.
스트레스받으면 담배 피우는 건 당연하냐며 또 한 번 몰아붙이고 나 혼자 냉랭한 감정으로 전화를 끊고 있다 보니 몇 분 있다가 다시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간 일터 일과 관련해서 담배를 찾을 만큼 속 끓인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의 스트레스 이유를 듣고 보니... 아차! 싶은 마음이 드는 게 자초지종 듣지도 않고 괜스레 너무 하이톤으로 열을 냈나 싶은 게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괜스레 "그런 얘기를 하지. 왜 안 해." 라며 또 한 번 남편을 나무라는 듯한 표현으로 나의 미안한 감정을 건넸다. (그럼에도 NO 담배여야겠지만.)
며칠 후 남편과 순댓국 한 그릇을 먹고 동네 한 바퀴 돌며 커피 한잔 하는 것으로 그가 잠시 머리 식히는 시간을 갖아본다. 남편이 그간 스트레스로 짓눌렸을 감정에 힘이 될 만한 말을 머릿속으로 고르고 골라 몇 마디 건넸다.
"당신이 그간 너무 경주마처럼 쉼 없이 앞만 보고 달리고, 옆도 뒤도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 이제 조금씩 보이는 거라 그래.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자. 한 번은 겪었을 일이라고 생각하면 편할 거 같아. 당신 잘하고 있는 거 내가 다 알지."
그가 산책하다 말고 잠시 멈춰 소매로 눈물을 훔친다. 전쟁터 같은 일터에서 얼마나 가슴이 후벼 파지고 생채기가 나고 있을지. 그는 많이도 고생했고, 진심으로 애쓰며 살고 있다. 그런 이유로 울컥하는 그의 눈물의 감정도 나는 충분히 알고 있다. 남들 보는 눈도 있는데 산책하다 말고 부부가 함께 눈물 훔칠 수는 없으니 괜스레 남편에게 "당신 갱년기인가? 하하!" 라며 남편의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옆에서 지그시 눌러본다.
"당신 나이가 육십 되고 칠십되고 하면 알 거야. 당신의 40대는 더할 나위 없이 정말 열심히 살았다고.
난 당신이 먼 훗날 꼭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이 꼭 온다고 생각해."
불안한 현실과 미래의 두려움을 한껏 지고 있는 그에게 확신에 찬 나의 한마디가 그의 가슴에 꽂힌 걸까.
그는 또다시 눈물을 훔친다.
"나 이런 말 들으니까 왜 이렇게 눈물 나는지 모르겠네. 당신 말대로 진짜 갱년기인 건지... 고마워. 정말 힘이 난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해 줘서."
그에게 힘이 될 만한 위로 또는 응원 그 어디쯤의 몇 마디가 배터리 5프로도 안 남았던 것 같은 남편의 심신을 어느 정도 끌어올렸을까? 15프로? 아님 20프로? 수치로는 표현하기 어렵겠지만, 다른 누구보다 아내인 내가 하는 응원에 힘이 났을 거라는 데는 틀림없을 것이다.
모든 날들의 희로애락을 함께 할, 전우애보다 더 끈끈한 부부애로 또 한 번 더 서로를 위로하며 보듬고 살아본다.
그날 오전 몇 시간을 밖에서 둘이 밀도 있는 얘기를 나눈 후, 그가 키도 작은 내게 팔짱을 쓰윽 끼며 하는 말.
"나 당신이랑 친해서 좋아."
덩치는 산 만한, 밖에서는 나름 회사를 이끌며 카리스마 넘치는 이 사람. 나이도 40대 후반을 달리고, 나보다는 다섯 살이나 많은 남자가 꺼낸 이 한마디가 당신이랑 친해서 좋다라니...
마치 초등학생으로 빙의된 듯한 표현에 순간 속으로 '풉!' 하다가 그가 한 문장으로 말한 그 한마디에 담긴 의미를 조각조각 분해해 본다. 사회적 나이에 갇혀 있는 남편이 깊은 내면 속 어떠한 포장도 없이 아이 같은 언어가 튀어나온 것만 같다. 아마 그가 내게 전달하고 싶었던 속뜻은 이거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