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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을 Jul 20. 2023

지니를 그린 할아버지

just do it

디즈니 플러스를 일 년 구독했었다. 단순히 디즈니 만화를 좋아하니 일 년쯤은 즐기면서 볼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영화를 몇 개 보고 나니 더는 보고 싶은 게 없었다. 일 년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에 평소 관심 없던 다큐멘터리나 단편 영화들을 찾아서 보곤 했는데, 의외로 재미있는 것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중에서 인상 깊었던 건 '스케치북'이라는 시리즈였다. 시리즈는 총 6화로 한 화당 20여 분 남짓 되는 영상이다. 회차마다 디즈니 소속의 애니메이터들이 한 명씩 나온다. 그들은 자신이 만들었던 캐릭터 하나를 종이에 그리면서, 시청자가 따라 그릴 수 있도록 요령을 설명해 준다. 그리고 자연스레 캐릭터와 관련된 후일담, 애니메이터가 된 계기, 목표와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편은 3화에 나오는 알라딘의 지니를 그린 할아버지, 에릭이 나오는 장면이다. 통통 튀는 배경음악이 깔리고 그가 등장한다. 그가 등장하면서 했던 말은 가슴을 울릴 정도로 좋았다. 굳이 영어 자막으로 받아적고, 다시 해석해서 볼만큼.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두려움이 있다면, 그냥 그리세요. 연필을 손에 들고 그냥 그려나가세요. 그림을 그리면 그릴수록 더 편안해지게 될 거예요.
많은 예술가들이 하는 말이 있죠. 형편없는 그림을 15,000개는 그리게 될텐데, 그걸 빨리 다 채우면 더 나아질 거라고요.  

-스케치북 3화, 에릭 골드버그-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글을 쓰기 위해 책상 앞에 앉는 게 어찌나 힘들었던지. 글을 쓸 기분이 아니라는 둥, 중요한 장면을 쓰려면 영감이 필요한데 없다는 둥 시답잖은 핑계를 대며 멀리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미뤘을 뿐인데- 어느새 두려운 마음이 피어버렸다. 어차피 엉망인 글에 더 붙여봤자 뭐하겠냐는 생각까지 스칠 정도로.

그러다 그냥 책상 앞에 앉았다. 저녁을 먹고 빈둥거리다 진짜 몇 줄만 적어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의외로 손가락은 키보드 위에서 가볍게 움직였다. 완전히 매끄럽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불편한 마음 한가득 들고, 관심도 없는 채널이나 돌리며 앉아있을 때보다 훨씬 편안했다. 그리고 에릭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어차피 15,000개의 망작을 적게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얼른 망작을 떨쳐버리고 나면 괜찮은 작품을 더 빨리 쓸 수 있겠지.


그러니 그냥 쓰자.


괜한 기대감이나 공포에 휘둘리지 말고, 앉아서 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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