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도 얼굴이 있다
미리 공지한 대로
오늘 불금 가풍행사는 내일로 연기합니다.
독서모임은 9시 40분~10시 사이 종료 예정이고,
혹시 저녁을 거른 분들을 위해
10시 이후 치킨타임이 준비됩니다.
대문에 F-4라고 적힌 가족대화방에 확인 공지를 올린다.
책상에 앉아 허리를 곧게 펴고, 천장을 향해 두 팔을 길게 기지개 켠다.
배송 온 식재료는 제자리를 찾았고, 상자와 봉지는 모두 분리수거함에 합방시켰다.
지금은 오후 4시,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커피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누른다. 하얗게 피어오르는 커피 향을 맡으며 책을 편다.
이미 두 번 읽은 소설이지만, 복습 삼아 다시 펼쳐든다.
오늘 독서모임 준비는 이보다 더 완벽할 수가 없다.
글을 이야기하다
출근하고 퇴근하며, 돈을 벌고 돈을 쓰는 일상 속에서 늘 간절했던 한 가지.
'독서모임'
지갑을 두고 나가도. 가방에는 늘 책 한 권은 챙겼다. 덕분에 내 어깨엔 항상 빅백이 매달려 있었다.
명절에 서울 도심 부모님 댁에 갈 때도 마찬가지. 과일이나 고기를 담는 시간보다, 차 안에서 읽을 '오늘의 책'을 고르는 시간이 더 길었다.
도서사이트는 이제 액세서리, 장식품 광고가 더 많지만, 혹시나 신간 소식을 놓칠까 싶어 알림을 해지하지 않았다.
습관적인 정기구매를 눌러댄 탓에 협탁 위엔 신간과 베스트셀러가 아파트 건설현장처럼 쭉쭉 올라갔지만,
헌실은 한 페이지도 못 넘기고 졸다가 얼굴에 책싸다구 맞기 일쑤였다.
독서모임.
내가 좋아하는 책을 함께 좋아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책을 가운데 두고 마시는 커피는 얼마나 향기로울까?
책을 보고, 나누고, 이야기하는 순간은 또 얼마나 즐거울까?
나에게 독서모임은 파스텔빛으로 한껏 부푼 솜사탕 같았다.
끈적한 손으로는 쉽게 만질 수 없는, 그래서 더 간절한.
간절히 바라니 기회가 왔다.
우연히 기회가 왔고, 나는 그 기회를 호랑이가 찹쌀떡 삼키듯 덥석 물었다.
방송국 카메라의 줌렌즈나 콩나물 한 줌 두 줌 밖에 모르는 나에게, '줌 독서모임' 안내장이 도착했다.
아들이 달려와 노트북을 확인해 주며, 연결방법과 카메라 각도를 일타강의한다.
남편은 "안방 뒷배경에 붙박이장이 걸린다고 NO, 책장을 배경으로 하면 자세가 불편하다고 NO,"라며 고개를 젓는다. 결국 창문을 바라보며 앉은 책상 자리에 OK 사인을 준다.
비록 주방 쪽이 살짝 비치긴 하지만, 책상 위 조명을 맞춰 얼굴이 환하도록 세팅해 주었다.
그리고 가족들은 금요일 독서모임에는 자진 '늦퇴'를 선언했다.
이어폰을 끼고 청각 테스트할 필요 없다며, 거실에서 볼륨을 올리고 신나게 떠들어보라고.
그리고 오늘은 3월, 4월의 파일럿 독서모임을 거쳐, 드디어 정규 모임의 첫날이다.
메일로 받은 책을 구입하고,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듯 읽었다.
필사하듯 문장을 옮겨 적고, 집에 있던 형광펜을 총 출동시켰다.
책갈피는 오색찬란, 툴러의 날개가 활짝 펼쳐진 공작새처럼 화려하다.
3월의 책은 온다리쿠의 <스프링>
4월은 제임스 M. 케인의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
5월은 <그 개와 혁명>- 2025 이상문학상 작품집이었다.
이상문학상.
어렸을 때 부모님 손을 잡고 가던 시골 친척집 같았다.
가정교육 잘 받은 어린이처럼 배꼽인사를 하고, 무릎을 모아 얌전히 앉아 있어야 했다.
한가득 차려진 10첩 반상은 어린 입맛에 재미가 없었고, 떠날 때 받은 용돈은 반가웠지만 그것 때문에 다시 찾고 싶은 집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다시 집어 들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을.
엄마 심부름으로 전해주듯, 별 기대 없이 첫 장을 펼쳤다.
그런데 웬일인가. 친척집을 가는 길에 메타스퀘어 나무가 펼쳐지고, 어디선가 통기타 버스킹이 들려온다.
길가에 세워둔 따릉이를 타고 달리자,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오늘 오프닝부터 하고 싶은 말이 넘친다.
무엇보다 이상문학상의 변신부터 짚어야겠다. 마음이 바빠진다.
게다가 대상 수상작 <그 개와 혁명>은 본문 11쪽부터 35쪽까지.
새롭게 개편된 구성 덕분에 수상작, 추가 대표작, 작가와의 대담, 작품론까지 다 읽어도 109쪽에 불과하다.
2주 전, 두 차례에 걸쳐 완독과 정독을 마쳤지만 마지막으로 한번 더 펼쳐 든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확인한다.
샤워를 너무 일찍 한 건 아닌가, 머리가 눌릴까봐 낮잠도 자지 않았다.
양치를 마치고, 온라인이지만 예의를 다해 준비 의식을 끝낸다.
글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7시 55분. 링크 버스를 타고 약속 장소에 도착한다.
정원은 8명, 오늘은 다섯 개의 네모 칸에 얼굴이 나타난다. 그중 두 분은 처음 보는 얼굴이다.
간단한 근황 토크가 지나가고, 본격적인 독서토론이 시작된다.
모임을 주관한 작가님이 진행 멘트를 건넨다.
"오늘은 이미 안내해 드린 대로 이상문학상 작품집입니다.
이야기할 작품은 총 여섯 편, 첫 번째 대상 수상작 <그 개와 혁명>을 시작으로 우수상 순서대로 진행하겠습니다."
하마터면 노트북 전원을 누르고 나갈 뻔했다. 차라리 정전이라도 나서 자동으로 튕겨져 나가길 바랐다.
나는 <그 개와 혁명>이라는 제목만 보고, 대상작만 다루는 줄 알았다. 호기심에 우수상을 몇 장 훑어보긴 했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야. 독서모임부터 끝내고 나중에 만나자." 하며 책을 덮어버렸다.
올림픽대로 한가운데서 급똥 신호가 온 듯, 정신이 혼미해졌다.
원피스에 하이힐을 신고 강남역 사거리 한복판에서 자빠진 여자처럼 얼굴이 홍당무가 된다.
갱년기가 갑자기 들이닥친 건가, 머리에서는 스팀이 폭폭 치솟는다.
뉴턴의 진자처럼 흔들이는 눈동자를 겨우 진정시키며 손을 든다.
"먼저 자수합니다. 저는 책 제목만 보고 대상 수상작 <그 개와 혁명>만 준비했습니다. 작품집 전체를 읽어야 하는 줄은 몰랐습니다. 대상작에는 몰빵했지만, 나머지 다섯 편은... 죄송하지만 도강하겠습니다."
4개의 화면에서는 "괜찮다." "중간중간 생각나면 편하게 참여하라."는 응원이 들려왔다.
하지만 토닥토닥 소리가 커질수록, 오히려 등짝을 세게 얻어맞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첫 번째이자 마지막 발언을 했다. 세 번이나 읽고 메모장도 빼곡했지만, 이미 털린 멘탈은 그 모든 걸 풀어내지 못했다. 입으로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개가 되어 멍멍 짖는 소리만 가득했다.
순식간에 두 번째 작품으로 넘어갔고, 나는 청취자 모드로 고개만 끄덕였다.
숙제를 안 해온 사람은 딴짓도 못한다. 평소엔 자연스레 텀블러를 들이켰지만, 그마저도 괜히 눈치가 보여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화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것도 어색했고, 고개를 숙이자니 더 이상했다.
글의 얼굴을 보다
그러다 문득, 나만의 독서 습관 하나가 떠올랐다.
나는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면 제일 먼저 검색창에 얼굴부터 찾아본다.
책을 사면 표지 뒷면의 사진부터 확인하고, 그렇게 일면식을 맺는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 글과 함께 작가의 표정이 겹쳐진다.
그래서인지 글에서 받은 인상이 한층 더 선명해진다.
나는 독서모임의 여집합이 되어, 나만의 독서모임을 시작했다.
모임을 주관한 작가님은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스트, 스테디셀러 작가다.
대표 장편소설도 이미 읽었고, 산문집까지 챙겨 읽었다.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면, 소설 속 대사와 묘사가 떠오른다.
눈, 코, 입--- 주인공과 닮아 있다.
잔잔하면서도 은은한 목소리,
일정한 거리를 지키면서도 따뜻한 눈길을 잃지 않는 태도.
그녀의 책에서 만났던 '허락', '회복' 같은 단어가 얼굴에 그대로 묻어 있었다.
어쩜 얼굴도, 표정도, 목소리까지 자신이 쓴 글과 저렇게 닮을 수 있을까?
책을 편다.
2025 이상문학상 대상 수상작 <그 개와 혁명>은
1990년대 페미니스트 딸이 1960년대생 민주화 운동권 세대 아버지를 배웅하는 이야기다.
부녀는 함께 혁명을 도모한다.
그 무대는 다름 아닌 아버지의 장례식장. 마지막은 통쾌한 피날레로 장식된다.
각각의 에피소드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늘 예상을 빗나가며, 유머와 위트로 버무려진다.
무엇보다 글에서 느껴지는 통쾌함과 유연함은 젊은 작가만이 낼 수 있는 힘이었다.
나는 작품을 읽으며 그 에너지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작가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작가 인터뷰 중,
"슬픈 와중에도 틈틈이 웃겨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람과 죽음 사이에 놓인 이야기들이 되게 비장하기는 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좀 어설픈 구석이 있어요.
유머는 진심을 격식 있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p83)
"온도님, 괜찮으세요?"
대표 작가님이 조용히만 앉아 있는 내가 염려스러웠는지 안부를 묻는다.
"제가 잠시 1분 광고를 틀어도 될까요? 책을 읽을 때 제가 꼭 하는 습관인데... 함께 해보실래요?"
나는 사랑해 듀오 커플매니저가 된 듯, 작가 얼굴과 글을 매칭해보자고 제안한다.
멤버들이 책을 펼친다.
"진짜 그러네요. 우수상 김기태 작가님은 고민 끝에 전기기타를 샀지만, 이웃 눈치를 볼 것 같은 얼굴이네요. 역시 관상은 과학입니다."
우수상을 받은 김기태 작가의 작품은 <일렉트릭 픽션>이다.
평범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쓰던 한 사람이 전기 기타를 연주하게 되고, 층간소음을 걱정하며 조마조마하는 소시민의 착한 마음이 이야기의 바탕이 된다. 하지만 어느 순간 전기가 통하듯, 삶에 짜릿한 반전이 찾아온다. 그의 글은 늘 '보통의 삶'을 소재로 삼는다. 소외된 인간의 내면을 차분히 파고드는 시선이 특징인데, 작품의 얼굴과 작가의 얼굴이 꼭 닮아 있었다.
작가 인터뷰 중,
"나는 얼굴 모를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서 소설을 쓴다. 독자들은 허구인 줄 알면서 소설을 읽는다. 모두 그런 일을 왜 하고 있을까.
아는 사람에게 최대한의 사랑을 쏟는 일만큼,
모르는 사람에게 최소한의 존중을 품는 일도 중요하지 않나. 모두가 벽과 벽사이에 사는 지금,
소설의 가능성에 대한 소박한 옹호를 담은 제목이 '일렉트릭 픽션'이다. (p145)
글도 관상이다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들이 결국 우리의 몸을 만들 듯, 글도 그 사람의 얼굴을 닮는다.
문장의 톤, 말투, 쉼표 하나, 마침표 하나까지도 '쓰는 사람'을 닮는다.
어떤 글은 미간에 주름이 깊고, 또 어떤 글은 눈매가 길고 날카롭다.
글은 손 끝에서 나오지만, 출발점은 머리와 마음에 있다. 그래서 얼굴과 분리될 수 없다.
글의 기운과 얼굴의 결이 닮아있는 건,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사주보다 관상이라는 말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얼굴의 생김새는 그 사람의 성격과 기질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단순히 눈, 코, 입의 배치나 크기, 입술 두께로 점수를 매기는 외모 평가와는 전혀 다르다.
누구나 태어날 때는 빵빵한 얼굴에 두 눈, 하나의 코와 입을 갖고 세상에 나온다.
아기 때 빵빵하고 골고루 가득 찼던 지방과 근육은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굴 형태가 달라진다.
아기 때 동그랗던 볼은 파이고, 광대는 솟고, 입술은 늘어진 반달처럼 처지기도 한다.
사춘기가 되면 똥글똥글했던 눈이 마징가제트 마름모로 변해 레이저를 쏘지만, 사춘기가 끝나면 다시 각이 풀리듯 눈빛도 순해진다.
TV에 나오는 유명인을 떠올려봐도 그렇다.
사생활이 유리처럼 들여다보이는 시대, 반듯한 조각 미남도 어느 순간 어두운 그림자와 탁한 눈빛을 내뽐는다. 그리고 곧 사생활 논란이 뒤따른다.
소신 있게 목소리를 내던 정치인도 시간이 지나면 얼굴이 변한다.
어느 날부터 번들거리는 피부 위에 두둑하게 차오른 살, 맑던 눈빛은 한여름 시장 좌판 위 생선처럼 탁해진다.
사람은 얼굴로 말한다
사람은 얼굴로 말한다.
타고난 생김새보다 중요한 건 그 얼굴을 어떻게 사용해 왔는지다.
무엇에 많이 웃고, 어디서 얼마나 찡그렸는지.
말을 하지 않아도 얼굴에는 시간이 남긴 감정의 흔적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관상이란 결국, 어떤 마음을 품고 살아왔는지, 어떤 표정을 오래 지어왔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어쩌면 마음의 사용 설명서가 얼굴에 새겨진 것인지도 모른다.
거울을 본다.
피부 상태는 어떤지, 잡티는 늘지 않았는지, 눈가 주름은 더 깊어지지 않았는지 매일같이 확인한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들여다봐야 하는 건, 거울 이면에 있다.
내 눈동자가 향하는 시선은 옳은 곳인지, 눈매가 시샘으로 치닫지는 않는지, 입꼬리가 불만으로 삐죽이지는 않는지.
나의 관상을 점검하고, 나의 관상을 스스로 빚어가야 한다.
거울 앞에서 선 나에게 온도씨가 다가온다
"어떤 얼굴이고 싶어?"
"내 글이 나를 닮았으면 좋겠어.
자주 듣는 말처럼, 어딘가 낯설지 않고 오래 알던 사람 같은 글.
그래야 내 글에 기대어 웃고, 울고, 버티는 힘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글에는 마음이 있다. 마음은 얼굴에 남는다.
글에도 주름이 있고, 문장에도 눈빛이 있고, 숨결이 있다.
5월의 독서모임은 파란만장 에피소드를 남기고 10시 20분에 마무리됐다.
반반치킨처럼 토크반 청취반으로 채운 시간이었지만, 비록 모든 작품을 다 읽지 못했어도
나는 사람을 읽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나머지 우수상 5편은 자체 숙제로 완료했음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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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키 스토리>
9시 40분 : 띠띠띠띠 띠-
아들이 들어온다. 거실 벽에 머리만 빼꼼 내밀고 구경한다.
10시 : 띠리리링 띠리리링~
치킨 배달원이 도착해 1층 현관을 열어달라고 벨을 누른다.
10시 10분 : 따다다당 따라라랑~~
에어팟을 끼고 노래 부르며 들어오던 딸이 주방 앞에서 10초간 정지모드로 서있다가 방으로 뛰어든다.
10시 15분 : 차량이 도착했습니다-
남편이 치킨 봉지를 들고 성큼성큼 들어온다.
분위기를 감지하고 식탁 위에 치킨을 올려 놓고는,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방으로 들어간다.
나는 이 모든 장면을 뒤돌지 않고 줌 화면 속에서 본방사수한다.
이어폰을 꽂을 걸, 다음부터는 아예 방 안에서 '붙박이장 배경'으로 참여해야겠다.
오늘 독서모임, 끝까지 완벽하다.
*대문 이미지 Daum / 사진 이미지 Daum, Naver에서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