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이 말하는 사랑의 언어
"사랑해."
"나도 사랑해."
"내가 더 많이 사랑해."
"아냐. 내가 더 많이 많이 사랑해."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셔츠 우산을 펼치고 빗속을 달리던 남녀가 나누는 클래식한 대화가 아니다.
라면 냄비를 앞에 두고 은근한 눈빛을 교환하던 남녀가 나누는 봄날의 대화도 아니다.
이 대화의 장르는 멜로가 아니다. 80대 엄마와 50대 딸의 현실 토크다.
몸은 괜찮은지, 새로 바뀐 요양보호사는 괜찮은지, 폭우에 집은 괜찮은지, 더위에 에어컨 바람은 괜찮은지.
딸은 마치 가스점검기사처럼, 하나하나 괜찮은지를 체크리스트로 점검하듯 묻는다.
몸은 늘 그렇듯 힘들지만 괜찮고, 요양보호사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괜찮고,
폭우에 꼼짝 못 하지만 괜찮고, 에어컨은 전기세가 걱정이지만 괜찮다고.
엄마는 세모인지 동그라미인지 모를 대답을, 빠짐없이 성실히 내놓는다.
핑퐁 리듬의 대화는 핑~퐁 핑~~퐁, 늘어진 카세트테이프처럼 꼬리를 늘리며 이어지고,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감지되는 클로징 순간, 어김없이 엄마의 고백이 따라온다.
"사랑해. 우리 딸. 엄마가... 너무 많이, 너무너무 사랑해."
여기까지 읽고 주실 댓글 모범답안을 예상해 본다.
-어머니께서 엄청 여성스러우신가 봐요.
-사랑 표현이 많은 어머님이시군요.
땡~! 아쉽지만 오답처리하겠습니다.
엄마는 사내대장부라는 말이 어울리는 여자였다.
집안에는 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성화봉송처럼 활활 타올랐고,
손길은 보드랍기보다 매섭고, 배구선수의 스파이크처럼 정확했다.
어린 시절을 아무리 되돌려보아도,
동화책 속 장면처럼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랑해"를 속삭이는 페이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부모님의 흑백 결혼사진을 보며 궁금한 이야기Y에 제보하고 싶은 적도 있었다.
머리에 커다란 꽃을 얹은 엄마는, 새초롬한 아빠와 "사랑해"라는 말을 주고받았을까.
사랑 고백은 생략하고, 바로 예물반지를 교환하는 속성과정을 밟은 건 아니었을까.
지금처럼 감성을 중요시하던 시절이 아니었지만, 나름의 갬성은 있었을 테고,
사랑이라는 단어가 밀레니엄 특집으로 생긴 신조어는 아닌 이상, 그때도 존재했을 텐데.
엄마는 "사랑해"라는 말을, 듣거나 해본 적이 있었을까.
확실한 건, 내 기억엔 "사랑해"로 귓불을 간지럽히는 엄마는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엄마가 사랑을 말하고,
사랑을 또 말하며,
사랑을 반복하고, 박제하듯 건넨다.
오래되지 않은 어느 날부터였다.
사십 대부터 배구선수가 아닌 YMCA 주부 수영선수로 각종 대회에 출전하던 엄마.
얼핏 보면 미스코리아 수영복 심사장면 같지만,
배꼽까지 내려오는 커다란 메달을 목에 걸고 찍은 사진 속 엄마는
칠십 대에도 수영장의 왕언니로 리더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깔끔도 병이라던가.
세탁한 커튼을 달다가 의자에서 떨어진 그날부터, 엄마의 병은 시작되었다.
척추뼈 33개 중 5개의 요추를 세 번의 수술을 거쳐 겨우 세웠고,
고관절과 인공관절 수술까지 이어지며, 엄마의 몸은 더 이상 엄마의 것이 아니게 되었다.
70대에도 꼿꼿하게 허리에 손을 얹던 그 포즈는,
이제는 지팡이와 워커 없이는 서 있기도 어려워졌다.
불과 3년 사이, 엄마는 진짜 '할머니'가 되었다.
누워 있는 날이 많아지고, 산소호흡기를 착용하는 날이 많아지고, 119에 실려가는 날도 많아지면서
엄마는 말문 터진 아이처럼 "사랑해"라는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엄마가 이런 말도 할 줄 알아? 놀라서 웃었고,
다음엔 엄마가 왜 갑자기 변하지? 놀라움은 무거운 걱정이 되었고,
점점 깊어지는 사랑의 양과 질을 느끼며, 더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엄마는 의식을 치르는 듯했다.
그동안 차곡차곡 예금해 온 '사랑해 적금'을 복리로 한꺼번에 돌려주려는 듯이.
남은 시간을 사랑해로 가득 채워 '사랑의 기억'으로 남겨두려는 듯이.
"사랑해."
"얼마큼?"
"하늘만큼 땅만큼?"
"나도~"
바닷가 모래사장에서 '나 잡아봐라~' 하던 시절의 대사가 아니다.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느끼한 남자 성우에 '아이 몰랑~' 가슴을 치는 시절의 멘트도 아니다.
멜로가 체질인듯한 이 대화는,
20세기 후반에 존재했던 우리 부부의 실제 대화다.
이 부분을 읽고 주실 댓글 모범답안을 예상해 본다.
-작가님, 창의력 부족. 실망입니다
-길게 말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 커플이시군요.
딩동댕~! 역시 아쉽지만 정답처리하겠습니다.
남편은 "사랑해"라는 말을 풍성하게 가진 사람이었다.
양볼은 늘 부풀어 있어 그 안에 사랑해가 한 움큼 들어 있었고,
고기 세 점을 얹은 상추쌈을 삼키는 넉넉한 입에서는 사랑해가 흘러나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사랑해가 떠 있었고, 출근길은 사랑해가 밝혀주었으며.
밥상 위 계란말이에 젓가락이 겹쳐도 사랑해로 나누었고,
자기 전 사랑해는 굿나잇의 또 다른 언어였다.
그렇게 주고받던 사랑은, 아이가 태어나면서 더 크게 열매를 맺었다.
배 위에 입을 대고 사랑해-를 속삭였고,
잠든 아이를 안고 사랑해-를 고백했으며,
넘어진 아이를 안고 울며 사랑해-를,
등굣길 아이에게 사랑해- 노래를 불러주었다.
때론 듀엣처럼, 때론 합창처럼 이어지던 사랑해는
4절 애국가보다 긴 애창곡이 되었다.
우린 언제부터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을까
입에 가득 담겨있던 사랑해는, 어느새 다른 말로 바뀌었다.
"사랑해. 얼마큼?"하던 내 입은 원빈의 "얼마면 돼?" 로,
"미안하다, 사랑한다"던 그의 입은 "미안하다"만 남기고 사랑은 빠져나갔다.
귓가를 간지럽히던 아이의 사랑해는 "사주세요"로,
부모의 입술에서 쏟아지던 사랑해는 "사줄게" 로 정리되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어느 순간부터 빠지기 시작했다.
사라진 건 아닐까, 아니면 그냥 말하지 않게 된 걸까.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서였을까.
혹은, 사랑이라는 말을 담을 여백이 사라진 걸까.
사랑, 그 자리를 대신한 건 다른 말들이었다.
사랑해라는 말은 점점 줄어들고
그 자리를 "밥은 먹었어?" "운전 조심해" "오늘은 일찍 자" 같은 안부가 대신한다.
뜨겁게 외치던 사랑은, 어느새 미지근한 안부로 바뀌었지만, 사라진 게 아니길 바랐다.
나는 그 빈자리를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사랑을 찾아보기로 한다.
사랑이라는 언어의 새로운 해석
침대에 기대 책을 보는 내 앞에 남편의 커다란 등이 불빛을 가린다. 또 시작이다.
결혼 후 남편이 처음으로 요청한 건, 다름 아닌 '등 긁기'였다.
노인도 아닌데 시도 때도 없이 등을 내미는 통에, 그의 손에 쥐어준 효자손만도 여러 개다.
그런데도 굳이 효자손을 들고 와 등을 돌린다.
"이 사람, 간지러운 사랑이 그립구나,"
바다 같은 넓은 등에 말미잘처럼 손가락을 얹고, 시원함이 통증으로 바뀔 때까지 성심껏 긁어준다.
당신의 넓은 등만큼 사랑해.
고등학생 딸아이는 매일 아침, 젖은 머리로 안방 화장대에 앉는다.
당연하다는 듯이 의자에 앉아, 미용실 손님처럼 차례를 기다린다.
주로 내가 메인 디자이너로 드라이어를 들고 나서지만,
가끔 바쁜 아침이면 실장 남편이 달려와 두툼한 손으로 말려주었다.
이 아이는 혼이 나거나 토라졌을 때도 어김없이 자리를 지킨다.
발을 쿵쿵거리며 성난 표정을 하고서도, 머리는 반드시 엄마 손에 말려야 한다.
"이 아이, 사랑을 확인받고 싶은 거구나."
뜨거운 바람과 시원한 바람을 오가며, 긴 머리카락을 정성껏 말린다.
너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만큼 사랑해.
아들의 최애 메뉴는 알리오 올리오.
운동을 즐기고 근육에 애착이 깊은 아이라 탄수화물을 멀리하지만,
파스타만큼은 예외다.
엄마표가 제일 맛있다는 아들은
입덧하는 새댁처럼 파스타 노래를 부르며 하루에 몇 번이고 내게 기대어온다.
"이 아이, 사랑이 고픈가 보구나."
불꽃 없는 가스레인지만 봐도 후끈한 날이지만,
물을 끓이고 오일을 붓는다.
너의 입술을 타고 들어가는 면발 한 줄 한 줄 만큼 사랑해.
우리 가족은 아침식사 대신 잠을 선택한다.
그래서 나는 아침마다 테이크아웃 조식을 준비한다.
방울토마토, 유산균, 두유.
작지만 든든한 구성을 지퍼백에 담아 출근길, 등굣길 손에 쥐어준다.
남편은 전쟁 같은 출근길의 전투식량이라 했고,
아들은 MZ 답게 지하철 안에서 먹는다고 당당했으며,
딸은 쉬는 시간 친구와 토마토 한 알로 수다를 나눈다고 했다.
1년 내내 떨어지지 않는 방울토마토처럼, 매일매일 사랑해.
사랑은
말보다 습관에 가까운 게 아닐까.
먹이고, 만져주고, 말려주고, 챙겨주는 것들.
그 모든 동작에, 사랑이 숨어 있었음을.
입으로 전하던 사랑은
어느새 손끝과 눈빛으로, 또 다른 습관으로
모양을 바꾸어 우리의 곁에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
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공기처럼 곁에 머물러 있었기에
무심하게 잊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말을
잊었다고 해서 사랑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음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 있고,
말해줘야만 하는 사랑도 있으니까.
사랑은
언제든 모습을 드러낼 준비가 된, 살아있는 감정.
우리에겐 단지 어떻게 꺼내어 건넬지를
다시 생각해 보는 일만 남았다.
.
.
.
.
방울토마토 한 알을 온도씨 입에 넣어주며 살짝 웃는다.
그리고 장난스레 묻는다.
'나의 사랑이... 이렇게 작아지다가 사라지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사랑은 그냥, 모양을 바꾼 것뿐이야.
말 대신 손길이 되고, 눈빛이 되고, 라면 위에 계란 하나가 되기도 하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랑도 있는 법이니까."
이 글을 쓰는 지금,
나도 새로운 사랑법을 시작해보려 한다.
테이크아웃 조식에 "사랑해"라는 양념을 살짝 뿌려볼 생각이다.
내일 아침, 이들의 표정이 사뭇 궁금하다.
뜬금없는 고백에
황당해할지, 기막혀할지, 흐뭇해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확신한다.
그 말에 분명,
배시시 웃고 있을 그 얼굴들을.
우리는 더 이상 "사랑해"를 외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말이 사라진 건 아니다.
지금,
우리만의 방식으로 충분히 사랑하고 있다.
그저, 작은 노력은 시도해 보려는 것이다.
언젠가 나 역시,
사랑이란 말을 다급하게 쏟아내야 할지 모른다.
남은 시간을 아쉬워하며 "사랑해"라는 말로 하루하루를 채워갈지도 모른다.
지금, 나의 엄마가 그러하듯이.
그날이 오면 덜 조급하도록,
조금씩 조금씩 사랑을 인출해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