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제기
“같은 사안인데, 왜 태도가 다를까?”
어느 정치인이 부적절한 발언을 했을 때, 한쪽 언론은 거침없이 그를 비판하는 반면, 다른 쪽 언론은 발언의 맥락과 의도를 고려하며 다소 관대한 태도를 보인다.
유명인의 과거 잘못이 드러나면, 어떤 이는 “공인으로서의 자격을 상실했다”며 즉각적인 사회적 퇴출을 요구하지만, 또 다른 이는 “인간적인 실수일 뿐”이라며 재기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셜미디어 공간에서는 한 진영의 실책은 가차 없이 공격받고, 반대편의 유사한 행위는 무시되거나 변명으로 포장되기 일쑤다.
우리는 이처럼 수없이 반복되는 장면들을 매일같이 목격한다. 문득, 가슴 한켠에 의문이 피어난다. “같은 상황, 같은 잘못인데, 왜 반응과 태도가 이렇게 달라질까?”
이 글은 바로 그 의문에서 출발한다.
그 의문에 답을 주는 개념이 바로 ‘이중 잣대’다.
이중 잣대란 동일한 사안에 대해 일관된 기준을 적용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평가 기준을 달리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는 공정함의 가장 큰 적일 뿐 아니라, ‘정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불공정이기도 하다.
겉으로는 원칙과 공정성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기준을 자의적으로 조정한다. “우리는 원칙에 따라 판단한다”고 하지만, 그 원칙은 누구에게는 엄격하게 적용되고, 누구에게는 관대하게 면제된다.
이처럼 명분과 실제 동기가 어긋날 때, 우리는 거기서 진정한 위선을 마주하게 된다.
이중 잣대는 단순히 개인의 편견이나 감정적 반응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이 언론, 정치, 사회 규범 전반에 깊이 뿌리내릴 때, 그 파장은 훨씬 크고 오래 지속된다. 정의를 외치는 이들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내 편에는 관대하고 남의 편에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댈 때, 사회의 윤리적 기반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특히 공적 책임을 지는 집단이나 기관에서 이중 잣대가 자리 잡으면, 이는 단순한 모순을 넘어 신뢰의 붕괴와 권력 남용의 출발점이 된다.
문제는 이중 잣대가 항상 명확한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대개 ‘정당성’이라는 겉옷을 입고 은밀하게 작동한다. 예컨대, 어떤 의견은 ‘사회적 약자 보호’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지만, 다른 견해는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된다. 또 어떤 정책은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며 강행되지만, 비슷한 상황에서는 ‘시민 반발’을 이유로 멈춰선다.
겉으로는 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보다 훨씬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은 뒤에 숨겨진 선택성이다. 결국 진짜 판단 기준은 논리나 원칙이 아니라, ‘누구의 입장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이 글은 사회 곳곳에 퍼져 있는 이중 잣대의 작동 양상을 정치, 언론, 사회 도덕 영역에서 다룬다. 특정 진영이나 집단을 겨냥하려는 의도는 없다. 오히려 우리가 어떤 입장에 서 있든, 그 입장이 자기 편에게만 관대한 편파적 윤리가 되지 않도록 지금 이 문제를 성찰적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뜻이다. 스스로 ‘정의’를 말할 자격이 있는지 되묻는 질문은 결코 상대 진영에만 던질 문제가 아니다. 가장 먼저, 그리고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다.
‘공정’이라는 단어가 과잉 소비되는 시대에, 정작 공정함의 핵심 조건인 ‘일관성’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이 글이 그 일관성을 되찾는 작은 계기가 되길 바라며, 다음 장에서는 구체적인 이중 잣대 사례를 통해 이 문제의 구조와 파급 효과를 보다 깊이 탐구해 보고자 한다.
이중 잣대의 유형과 사례 분석
정치 영역: 정파에 따라 달라지는 기준
정치야말로 이중 잣대가 가장 광범위하고도 뿌리 깊게 작동하는 영역 중 하나다. 정당과 정치인, 그리고 그 지지자들은 끊임없이 ‘정의’와 ‘원칙’을 외친다. 그러나 그 정의는 적용 대상에 따라 놀랄 만큼 다른 태도로 나타난다.
같은 사안, 유사한 맥락, 비슷한 실책임에도 불구하고, 평가와 비난의 강도는 ‘누가 그 행위를 했는가’에 따라 전혀 달라진다. 상대 정당 정치인의 실언은 “인격의 본질”로 낙인찍히고, 같은 편의 실수는 “맥락이 있었다”거나 “실언일 뿐”으로 수습된다.
정치적 이중 잣대는 바로 이러한 ‘기준의 유연함’ 속에서 은밀히, 그러나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그 결과, 정치 담론은 원칙보다는 편의에 의해 움직이게 되고, 공적 신뢰는 그만큼 빠르게 침식된다.
예컨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의 발언은 “단순한 말실수” 혹은 “정치적 맥락에서 빚어진 과장”으로 관대하게 해석되지만, 반대 진영 정치인의 유사한 발언은 “속내가 드러난 것”이라며 거센 비난을 받는다. 특히 선거 기간이 되면 이 같은 경향은 더욱 노골적이고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내 편의 거짓말은 전략적 계산으로 둔갑하고, 상대의 오류는 곧장 ‘사퇴’ 요구로 이어진다. 정치적 ‘자기 편의 오류’는 언론과 당 내부에서 최대한 축소되거나 은폐되고, 반면 상대 진영의 실수는 반복적으로 부각되며 증폭된다. 이러한 현상은 정파적 이해관계가 도덕과 윤리의 판단 기준을 서서히, 그러나 깊숙이 잠식해가는 전형적인 이중 잣대의 양상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범죄나 부도덕성 같은 중대한 사안에서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대표적인 예가 정치권의 성추문 사건들이다. 진보든 보수든, 어느 진영에서든 지도급 인사의 성 비위가 드러난 적이 있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진영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진보 진영에서 사건이 터지면, 지지자들은 곧바로 “개인의 일탈”이나 “사생활의 문제”, “정치적 음해의 가능성”이라는 논리를 들고나와 방어적 태도를 취한다. 반면, 같은 수준의 사건이 보수 진영에서 발생하면 “공직자의 자격 상실”, “구시대적 인식”, “사법적 처벌이 불가피하다”는 비판이 거세게 쏟아진다.
이와 반대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보수 지지자들 역시 자신들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성 비위에 연루되었을 경우, 침묵하거나 “그동안 잘해온 것 하나만큼은 봐줘야 한다”는 식으로 논점을 흐리며 비판을 회피한다.
결국 문제의 본질은 뒷전이 되고, 그 문제가 ‘누구에 의해 저질러졌는가’가 판단의 기준이 된다. 이처럼 정치적 성향에 따라 도덕적 기준이 달라지는 태도야말로, 이중 잣대가 작동하는 가장 전형적인 사례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단지 열성적인 정치 지지자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언론, 지식인, 시민운동가 등 공적 책임과 영향력을 가진 이들조차 이 정파적 편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어떤 정치인의 행보는 ‘개혁’으로 미화되고, 다른 인물의 동일한 시도는 ‘독선’으로 낙인찍힌다. 유사한 정책 실패도, 한쪽에서는 “불가피한 진통”으로 관용받지만, 다른 쪽에서는 “명백한 무능”으로 매도된다.
문제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을 해석하는 시선에 있다. 정파의 이해에 따라 판단의 기준이 달라지고, 진실의 무게마저 요동친다. 이처럼 정치적 입장이 사실 인식과 평가의 기준을 결정하는 구조 속에서, 공적 담론은 점점 공정성과 신뢰를 잃어간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정치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리고, 시민 사회의 분열을 심화시킨다. 유권자들은 정제되지 않은 SNS 여론과 진영 논리에 물든 언론 보도에 쉽게 휘둘리며, 공적 갈등은 더욱 격화된다. 그 결과,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합리적 토론과 상호 견제의 문화는 점차 약화되고, 남는 것은 서로를 향한 혐오와 불신뿐이다. 정치가 국민의 다양성을 대표하고 조율하는 공간이 아니라, 정파 간의 ‘응징과 보복의 무대’로 전락할 위험이 커지는 것이다.
한 가지 아이러니한 점은, 이러한 이중 잣대를 가장 자주 작동시키는 이들이 오히려 ‘정의’, ‘민주주의’, ‘국민의 뜻’을 가장 자주 입에 올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는 그럴듯한 언어를 반복하는 곳이 아니라, 그 언어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일관되게 적용될 때에만 진정한 설득력을 갖는다. ‘정의’가 내 편에게만 관대하게 작동한다면,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기득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원칙은 누구에게든 냉정하고, 공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진정한 정치는 자신이 속한 진영에게도 그 잣대를 들이댈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숙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렇게 쉽게 이중 잣대에 물들게 되는 걸까? 심리학자들은 그 원인을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에서 찾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신념에 부합하는 정보만을 받아들이고, 그에 반하는 사실은 무시하거나 불신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향은 특히 정치적 신념이 강할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정파적 이념은 단순한 의견을 넘어, 자기 정체성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이념과 배치되는 사실은 곧 ‘자아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고, 이는 곧 방어적 태도와 감정적 반발로 이어진다. 결국 이중 잣대는 단순한 위선이나 악의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심리에 내재된 인지적 편향과 정체성에 대한 집착이 맞물리며 생겨나는 복합적인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먼저 엄격해야 한다. 누군가를 향해 정의를 외칠 때, 그 외침이 내 친구,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 내가 속한 집단에게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되묻는 습관이 필요하다. 정치는 단지 신념을 표출하는 공간이 아니라, 윤리적 일관성을 끊임없이 시험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윤리는 감정적 충동이나 진영 논리에 따라 선택적으로 적용될 때 그 힘을 잃는다. 오히려 그것이 불리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고 유지될 때, 비로소 설득력과 신뢰를 얻는다.
정파적 이중 잣대는 결국 정치 그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어떤 정책이나 인물이 타당한지를 따지기 전에, 누가 그것을 말했는지부터 묻는 문화는 민주주의의 퇴행이다. 갈등은 민주 사회에서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할 수 있는 기반은 반드시 공통의 기준, 곧 일관된 원칙 위에 놓여야 한다. 그 기준이 무너질 때, 남는 것은 의견의 교환이 아니라, 오직 ‘우리 편’과 ‘너희 편’ 사이의 끝없는 대립과 증오뿐이다.
언론과 대중문화: 누구에게는 용서, 누구에게는 퇴출
오늘날 언론과 대중문화는 한 개인의 평판을 형성하고, 사회적 기준을 설정하며, 대중의 판단을 이끄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공간이다. 그러나 이 영역 또한 이중 잣대에서 자유롭지 않다. 특정 사건에 대한 언론 보도의 태도, 유명인의 논란에 대한 문화계의 반응은 종종 일관된 기준이 아니라, 정서적 편향과 정치적 선호에 따라 좌우된다.
같은 수준의 실수, 유사한 문제를 두고도 어떤 이는 ‘영원한 퇴출’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또 다른 이는 ‘이해와 재기의 상징’으로 복귀한다. 과거 발언이나 행동이 갑작스레 도마에 오를 때, 그 평가의 기준은 실상 ‘무엇을 했느냐’보다 ‘누가 했느냐’에 더 가깝다. 이는 언론과 문화가 공정한 심판자가 아니라, 감정과 프레임을 동원해 선택적 중재자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는 언론이 유명인 논란을 다루는 방식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정치인, 연예인, 지식인, 운동선수 등 사회적 영향력이 큰 인물이 논란에 휘말릴 때, 언론은 그들의 성향이나 인맥, 정체성에 따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인다. 진보 성향 인물에게는 “사회적 공헌이 많았던 사람”, “비판적 지성의 상징”, “시대가 만든 희생양” 등의 서사를 덧붙이며 맥락을 설명하는 반면, 보수 성향 인물에 대해서는 “구시대적 사고”, “반인권적 인식”, “공인으로서의 자격 상실”이라는 낙인을 거리낌 없이 찍는다.
이러한 프레임 설정은 대중의 판단을 유도하며, 사건 자체보다 그 해석 방식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보도 시점, 기사 배치, 헤드라인 문구, 그리고 SNS를 통한 확산 방식까지, 모든 언론적 선택이 특정 방향성을 형성한다. 특히 이념적 편향이 강한 매체일수록 사안을 있는 그대로 전하기보다, 해당 사안이 자신의 독자층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를 먼저 고려한다. 결국 언론의 객관성은 퇴색하고, 언론사도 하나의 진영 구성원처럼 기능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중성은 언론에 국한되지 않고, 대중문화 전반, 특히 연예 산업과 SNS 기반 여론 형성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오늘날 유명인의 ‘과거 발언’, ‘SNS 글’, ‘학교 폭력’, ‘성희롱’ 의혹 등이 불거질 때, 어떤 이는 즉각 광고 계약이 종료되고 방송에서 하차하며 인터넷 커뮤니티의 집중 비난을 받는다. 반면, 유사한 과거 잘못에도 불구하고 팬덤과 여론의 ‘정서적 방패’를 등에 업은 이는 빠르게 복귀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논란의 본질이나 심각성보다는, 해당 인물에 대한 선호와 지지 기반이 처벌 강도를 결정하는 구조가 되어버렸다.
이러한 문화적 이중 잣대는 ‘캔슬 컬처(cancel culture)’가 자의적으로 작동하는 양상에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캔슬 컬처란 본래 특정 인물의 발언이나 행동이 사회적 기준에 부합하지 않을 때, 대중이 집단적으로 비판하고 불매하거나 배제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이 개념은 ‘누구를 캔슬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이중적 윤리 체계 속에서 작동하게 되었다.
예컨대, 어떤 유명인의 과거 부적절한 언행이 드러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며 사회에서 완전히 배제되어야 할 대상으로 낙인찍히는 반면, 다른 인물이 유사하거나 더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을 때는 “그동안의 공로를 생각하자”, “개인의 일탈일 뿐”이라며 빠르게 용서를 구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그 인물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조차 “사회적 약자에 대한 공격”이라며 비판을 억제하는 현상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용서의 기준은 전혀 일관적이지 않다. 진심 어린 사과 여부, 피해자와의 화해, 재발 방지를 위한 노력과 같은 본질적 평가 요소는 무시된 채, 그 인물이 누구인지, 어느 진영에 속하는지, 그리고 누가 지지하는지에 따라 복권 여부가 결정된다. 이는 정의와 윤리라는 이름 아래 행해지는 ‘심판’이 사실상 대중의 감정과 이념적 편향에 좌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론 대중문화는 본질적으로 감정의 영역이다. 사람들은 좋아하는 이에게는 관대하지만, 싫어하는 이에게는 가혹해지기 마련이다. 문제는 그 감정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고 정당화될 때 발생한다.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왜 누구는 그 책임을 평생 짊어지고, 누구는 곧바로 면제되는지 설명할 수 없다면, 그 말은 결국 허울뿐인 명분에 불과하다.
여기에 SNS의 즉각성과 확산력은 기름을 부은 격이다. 캔슬 컬처는 대개 SNS에서 촉발되어 순식간에 수십만 명의 동조자를 모으고, 강력한 압박 수단으로 작동한다. 여론은 빠르게 달아오르지만 곧 식어버리고, 이내 다음 타깃으로 옮겨간다. 이 과정에서 사실 확인이나 맥락 분석, 사후적 반성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중요한 것은 ‘지금 누가 공격받고 있는가’와 ‘누가 그 공격에 정당한 감정을 실을 수 있는가’일 뿐이다.
결국, 언론과 대중문화가 보편적 윤리 기준이 아닌 ‘우리의 감정’을 대변하는 구조로 굳어질 때, 우리는 ‘정의’와 ‘공정’이라는 이름 아래 또 다른 형태의 편파성을 강화하는 셈이다. 이는 사회 전체의 도덕적 기준을 일관되게 끌어올리기보다, 편을 가르고 누가 비난받을 대상인지를 결정하는 윤리적 위계를 만드는 결과를 초래한다.
진정한 공정함은 한 사람의 실수를 얼마나 가혹하게 비난하는지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비난의 기준이 누구에게나 일관되게 적용되는지, 그리고 그 기준이 감정적 선호를 넘어 보편적 윤리에 부합하는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어떤 이의 잘못을 비판할 자격이 있으려면, 동일한 잘못을 다른 사람이 저질렀을 때에도 똑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비판은 정당한 윤리적 행위가 아니라 단지 정서적 응징이나 정파적 도구에 불과할 뿐이다.
언론과 대중문화는 사회적 도덕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다. 그러나 그 거울이 특정한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다면,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은 왜곡되고, 사회 전체의 도덕 감각 또한 불균형해진다. 감정을 동반한 대중의 분노가 모두 정당한 것은 아니며, 침묵과 관용이 항상 고상한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기준의 일관성이다. 그리고 그 일관성이야말로 사회적 신뢰를 구축하는 가장 근본적인 토대다.
지금 우리가 마주한 과제는 분명하다. 언론과 대중문화가 더 이상 진영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대중의 인기나 정서에 기대어 정의를 재단하지 않으며, 모든 사안에 대해 동일한 기준과 공정한 해석을 제시할 수 있도록 구조적 재정비에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가능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을 진정으로 평가하고, 그에 합당한 책임을 요구할 수 있다. 공정한 사회란 누가 용서받고, 누가 퇴출당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같은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되는 사회에서 비로소 시작된다.
사회 정의 담론: 소수자 인권을 둘러싼 불균형
사회 정의(social justice)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다양한 사회적 논의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다. 특히 성소수자(LGBTQ+), 이주민, 여성 등 오랜 시간 차별과 억압을 경험해온 소수자 집단의 인권 신장은 정의로운 사회 실현을 위해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새로운 불균형이나 역차별이 발생한다면, 사회 정의를 위한 노력 자체가 정당성을 잃을 수 있다. 최근 일부 사회 정의 담론은 특정 소수자 집단의 권익을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그 밖의 집단이 지닌 권리와 감정을 간과함으로써 ‘차별 반대’라는 이상 아래 또 다른 차별을 만들어내는 구조로 작동하기도 한다.
특정 소수자 그룹에 대한 권리 보호와 그 이면
현대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이주민은 오랫동안 제도적·사회적 차별과 배제에 직면해왔다. 이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보다 평등한 대우를 실현하려는 노력은 인권의 확대이자 공동체의 성숙을 위한 필수적인 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권리 보호의 과정이 때로는 다른 집단의 권리나 정서, 사회적 우려를 배제하거나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될 때 발생한다. 정당한 권리 보장은 반드시 상호 존중과 균형의 원칙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어느 한쪽의 권익만을 절대시하는 접근은 또 다른 갈등과 배제를 낳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젠더 이슈와 관련하여 성소수자나 특정 젠더 집단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확산되면서, 일부 담론은 청년 남성, 농어촌 주민, 종교인 등 다른 집단의 목소리를 소외시키거나 이들의 문제를 주변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청년 남성들이 겪는 높은 실업률, 병역 의무로 인한 경력 단절, 그리고 ‘남성 특권’이라는 일반화된 인식 속에 가려진 구조적 어려움은 사회 정의 담론에서 충분히 조명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농어촌 주민들이 직면한 경제적 고통이나 교육 격차와 같은 현실적 문제들도 도시 중심의 권리 담론에 밀려 뒷전으로 취급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종교인의 감정 역시 자주 간과된다. 종교적 신념은 많은 이들에게 정체성의 핵심이자 삶의 중요한 도덕적 나침반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 신념이 성소수자 문제나 젠더 이슈와 충돌할 경우, 종교적 관점은 종종 "시대착오적", "반인권적"이라는 비판 속에 배제되거나 폄하된다. 이는 종교적 신념을 지닌 이들이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권리마저 부정당하는 모순을 초래하며, 결과적으로 또 다른 형태의 억압을 낳을 수 있다.
1. 차별 반대 담론의 모순과 문제점
‘차별 반대’를 외치면서도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내는 현상은 사회 전반에서 두드러진다. 예컨대, 성소수자의 권리 보호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만큼, 이에 반대하거나 다른 의견을 표명하는 사람들은 ‘혐오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일이 빈번하다. 이러한 태도는 건강한 공론장과 상호 존중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결국 사회적 분열을 심화시키는 역효과를 초래한다.
또한, 특정 소수자 집단의 권익을 보호하는 법률과 정책이 다른 집단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그들의 필요를 간과할 때, 사회적 갈등은 더욱 심화된다. 예를 들어, 이주민 권리 보호를 위한 정책이 농어촌 주민들의 일자리 감소로 이어지거나, 지역 사회 내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이러한 정책적 불균형은 불필요한 적대감을 키우고, 궁극적으로 사회 통합을 저해하는 악순환을 초래한다.
‘포용’을 지향하는 사회 정의 담론이 실제로는 더 큰 배제와 편향을 조장한다면, 그것은 포용의 본질을 배반하는 일이다. 모든 사람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이상 아래, 특정 집단의 감정과 필요를 무시하거나 상대화하는 접근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차별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2. 대안: 균형과 상호 존중의 회복
진정한 사회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권리 보호의 초점이 특정 집단에만 치우쳐서는 안 된다. 하나의 권리를 강화하는 과정에서 다른 집단의 권리가 위축되지 않도록, 균형 잡힌 시각과 접근이 필수적이다. 이는 단순한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담론이 형성되고 확산되는 모든 과정에서 함께 고려되어야 할 기준이다.
우선, 모든 집단이 공정하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한다. 성소수자와 이주민은 물론, 청년 남성, 농어촌 주민, 종교인 등 모든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권리와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공적 공간과 플랫폼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서로 다른 경험과 관점이 교차하고, 상호 이해와 존중의 문화가 형성될 수 있다.
또한, 정책적 차원에서는 각 집단의 권리와 필요를 세심하게 분석하고, 상호 충돌을 최소화할 수 있는 다층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예컨대, 이주민 노동자를 위한 지원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농어촌 주민의 고용 안정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대책이 동시에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다차원적 접근은 정책의 정당성과 설득력을 높일 뿐 아니라, 사회적 갈등을 예방하고 공동체의 통합을 촉진하는 기반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교육과 미디어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다양한 집단의 경험과 관점을 이해하고,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돕는 교육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언론과 대중문화 역시 특정 집단의 권익을 강조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시각을 균형 있게 조명하며 사회 전체의 통합에 기여할 책임이 있다.
3. 진정한 사회 정의를 향해
사회 정의는 특정 집단의 권리를 강화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모든 구성원이 동등한 존중과 대우를 받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정의의 모습이다. 이를 위해서는 차별받아온 소수자에 대한 보호는 물론, 그 과정에서 소외될 수 있는 다른 집단의 권리와 감정 역시 정당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이제는 사회 정의의 이름 아래 새로운 차별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넘어서야 한다. 상호 존중과 이해를 바탕으로, 모두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균형 잡힌 공동체를 향해 나아가야 할 때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준의 일관성이다. 권리 보호의 궁극적 목표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데 있다. 따라서 특정 집단의 감정이나 필요를 과소평가하거나 희생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사회 정의는 감정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균형을 기반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도덕과 윤리의 적용: 권력과 명분이 만든 불균형
현대 사회에서 ‘도덕’과 ‘윤리’는 모든 집단과 개인이 지켜야 할 보편적 기준으로 여겨진다. 정치인부터 유명 인사, 기업가, 일반 시민에 이르기까지 공공의 도덕을 준수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로 간주되며, 윤리적 일탈은 사회적 비난과 제재를 초래한다.
하지만 문제는 이 ‘기준’이 누구에게는 엄격히 적용되는 반면, 누구에게는 관대하게 적용된다는 데 있다. 같은 잘못이라도 행위자의 정체성, 정치적 입장, 그리고 사회적 명분에 따라 평가가 달라지는 현실은 도덕과 윤리가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선택적으로 작동하는 도구로 변질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가 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비난의 강도
도덕적 판단의 핵심은 일관성에 있다. 같은 행위에는 같은 비판이 따라야 하며, 개인의 배경이나 정치적 성향이 평가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어떤 사람의 실수는 ‘인간적인 약점’이나 ‘상황적 맥락’으로 감싸지지만, 같은 실수가 다른 사람에게서 발생하면 ‘도덕적 타락’으로 규정하며 파면이나 사회적 퇴출까지 요구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가령 거짓말, 이력 위조, 갑질, 성희롱 등의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에 대한 공개 여론의 반응은 해당 인물이 어느 진영에 속해 있는가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정치적으로 진보 성향의 인사가 거짓말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선한 목적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서사로 희석되는 반면, 보수 성향의 인사가 같은 행위를 하면 “그간 감춰온 위선의 민낯”이라는 낙인이 따라붙는다. 이러한 이중 잣대는 결국 사람들로 하여금 “도덕이란 권력과 관계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는 깊은 회의감을 갖게 만든다.
실제로 일부 정치 진영에서는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의 부정행위를 ‘내로남불’이라 지적받는 상황에서도 감싸기 급급하다. 부패와 거짓이 문제이기보다는 그것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가 더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된 것이다. 이는 도덕 판단이 정파적 이해관계에 종속되었음을 보여주며, 사회적 신뢰의 근간을 허문다.
1. “정의로운 목적을 위한 거짓말”이라는 자기 정당화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이중적 태도가 사회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수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 정의’나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대의명분이 주어졌을 때, 일부는 자신들의 비윤리적 행위를 오히려 정당한 것으로 포장하려 든다. “진실을 말하면 더 큰 혼란이 생긴다”, “결과적으로 옳은 일을 하기 위한 작은 불가피함이었다”는 식의 주장은, 결국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고전적 자기합리화의 전형이다. 이는 도덕과 윤리의 기준이 행위의 정당성보다 명분의 크기나 진영의 위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위험한 전제를 사회에 주입한다.
특히 사회운동이나 정치 활동에 종사하는 인물들 사이에서는, ‘정의의 명분’을 내세운 윤리의 유예가 자주 발견된다. 선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일시적 비윤리나 거짓말은 정당화될 수 있다는 태도는, 결과적으로 그들이 주장하는 도덕적 정당성 자체를 갉아먹는다.
이처럼 목적을 이유로 윤리를 유예하는 관행이 반복될수록, 사회는 “도덕적 이중 기준”을 점차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누가 했는가’, ‘어떤 목적을 가졌는가’에 따라 죄의 경중이 달라지는 구조는 이제 일탈이 아니라 관행이 되었고, 그만큼 공공의 윤리는 취약해졌다.
예컨대, 정치인의 과거 폭언이나 성차별적 발언이 논란이 될 때, 그 인물이 속한 진영의 지지자들은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감안해야 한다”거나 “그는 오히려 피해자였다”는 식으로 변호에 나선다. 반면, 상대 진영의 인사가 유사한 발언을 했을 경우에는 시점이나 맥락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즉각 사퇴하라”는 강한 공세가 쏟아진다.
이러한 현상은 도덕이 더 이상 보편적 원칙이 아니라, 정파적 입장을 강화하기 위한 ‘편 가르기의 도구’로 전락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2. 언론과 시민사회의 도덕 판단 역시 선택적
문제는 이러한 이중 잣대가 정치권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언론과 시민사회 역시 도덕과 윤리에 대해 선택적 감각을 보이며, 편향된 비판과 침묵을 반복함으로써 그 확산에 일조하고 있다.
언론은 특정 인물의 잘못에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사회적 이슈로 부각시키는 반면, 다른 인물의 유사한 행위에 대해서는 짧은 기사 한 줄로 지나치거나 의도적으로 침묵하기도 한다. 이러한 편파적 보도는 언론사의 정치적 성향, 특정 기자의 개인적 인맥, 또는 여론의 흐름에 따라 좌우되며, 결국 언론이 ‘감시자’가 아니라 기호에 따른 선택적 심판자로 변질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시민사회 역시 명분에 휩싸인 선택적 윤리 감각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자신이 지지하는 단체나 운동 내부에서 윤리적 문제가 불거졌을 때, 이를 고발한 인물은 ‘내부 분열을 초래하는 자’로 낙인찍히고, 문제 제기는 “운동 전체를 흔들려는 외부의 음모”로 간주되기 쉽다.
반면, 상대 진영의 윤리적 일탈은 집단적 규탄과 사회적 퇴출로 이어진다. 이처럼 ‘내 편’의 잘못은 축소하고, ‘남의 편’의 잘못은 부풀리는 이중 구조는 공동체의 도덕 감각을 왜곡시키고, 결국 윤리의 정치화라는 심각한 후유증을 초래한다. 정의와 윤리를 말하지만, 그 판단 기준이 ‘누구의 편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은 사회적 신뢰를 무너뜨리는 가장 근본적인 장애물이다.
3. 도덕 기준의 일관성 없이는 신뢰 회복도 불가능하다
도덕적 판단이 사회적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관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기준이 상황에 따라, 혹은 특정 정파나 명분에 따라 달라지는 순간, 윤리란 단지 정치적 구호에 불과한 것이 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권력은 끊임없이 견제되어야 하며, 모든 시민은 동일한 기준 아래 비판받고 평가받을 권리와 의무를 지닌다. 우리가 직면한 ‘도덕의 이중 잣대’ 문제는 단순한 진영 논리나 정치적 유불리의 차원이 아니라, 공공 윤리의 신뢰 기반 자체를 뒤흔드는 심각한 구조적 위기다.
더 나아가, 도덕은 타인을 평가하는 도구가 아니라, 자신 역시 그 기준 아래 놓인다는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내가 옳은 일을 하고 있으니, 예외적으로 거짓말이나 폭력은 허용된다”는 인식은 결국 ‘정의의 이름으로 정의를 훼손하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진정한 윤리는 대의나 결과보다 그 목적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정당하지 않은 수단으로는 결코 정당한 결과를 얻을 수 없으며, 그런 정의는 결국 위선을 가리는 가면에 불과할 뿐이다.
4. 원칙 없는 도덕은 무기일 뿐이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도덕적 무기”들을 목격하고 있다. 누군가는 도덕을 휘두르고, 또 누군가는 그 무기에 희생된다. 그 과정에서 윤리의 본래 목적—공동체의 공정한 기준을 세우고, 상호 간의 신뢰를 구축하려는 노력—은 점차 퇴색되고 있다.
도덕은 칼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비추는 거울이 되어야 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을 잃지 않는 기준으로 기능해야 한다.
모든 사회는 불완전하며, 인간은 누구나 실수를 저지른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어떻게 바라보고 다루느냐이다. 누군가에게는 관대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잔인한 이중 잣대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결국 도덕 그 자체를 믿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비난이 아니라,
더 정직하고 일관된 기준이다. 비록 그 기준이 불편하고 복잡할지라도, 그것만이 사회 전체의 윤리적 기반을 회복하는 가장 견고한 길임은 분명하다.
분석과 성찰: 왜 이중 잣대는 반복되는가
“같은 사안인데 왜 태도는 이렇게 다를까?”
이 질문에 다가가다 보면, 단순한 불공정 사례를 넘어 인간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심리적, 문화적, 권력적 메커니즘과 마주하게 된다. 이중 잣대 현상은 단지 개인의 이기심이나 위선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인지 구조, 사회적 소속감, 미디어 환경, 권력 투쟁 속에 깊이 내재한 복합적 현상이다.
이 장에서는 이중 잣대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네 가지 측면에서 분석하고 성찰해 보고자 한다.
인간 심리의 문제: 자기 편향성, 확증 편향, 도덕적 우월감
우선, 인간의 인지적 한계와 심리적 경향 자체가 이중 잣대의 토대를 형성한다.
자기 편향성(self-serving bias)은 인간이 자신의 행위와 신념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이다. 이는 자신이 속한 집단과 그 신념을 정당화하는 본능으로 이어지며, 객관적 판단을 어렵게 만든다. 예컨대,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이 실수를 저지르면 ‘사소한 실수’ 혹은 ‘정치적 음모’로 치부하며 방어하지만, 반대 진영 인사의 유사한 행위는 곧바로 ‘도덕적 실패’로 단정된다. 같은 사안임에도 전혀 다른 평가가 내려지는 것은 이 같은 심리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역시 이중 잣대를 강화하는 주요 요인이다. 사람들은 기존의 믿음을 지지하는 정보에 집중하고, 반대되는 증거는 무시하거나 왜곡한다. 특히 사회적 미디어 환경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뚜렷해지는데, 사용자는 자신의 관점과 일치하는 정보만 받아들이며, 반대 견해는 차단하는 ‘에코 챔버’(echo chamber)에 머물게 된다. 그 결과, 동일한 사건에 대해서도 서로 전혀 다른 해석과 판단이 존재하게 된다.
여기에 도덕적 우월감(moral superiority)이 더해지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진다. ‘나는 더 도덕적이며, 내 편은 옳다’는 확신은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상대방을 비난하는 근거로 작용한다. 이는 도덕성을 일종의 경쟁 무기로 삼는 태도로 이어지며, 결과적으로 도덕적 논쟁이 합리적 토론이 아닌 감정적 대결로 치닫게 만든다.
이처럼 이중 잣대는 단순한 실수나 일탈이 아니라, 인간 심리에 내재한 자기 보호 본능과 인지적 편향이 교차하면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구조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집단 정체성의 과잉: 정치적 부족주의(Tribalism)의 심화
둘째, 현대 사회에서 집단 정체성의 과잉과 정치적 부족주의(tribalism)는 이중 잣대가 반복되는 중요한 사회적 배경이다.
정치적 부족주의란, 구성원들이 자신과 이익·신념을 공유하는 집단에 강하게 귀속되며, 타 집단과의 경쟁과 대립 속에서 자신의 집단을 무조건 옹호하는 태도를 말한다. 이 현상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심화되고 있으며, 그 배경에는 사회의 점증하는 분열 구조가 자리하고 있다.
정치적 부족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편’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이고, ‘저쪽 편’에게는 과도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는 점이다. 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 도덕적 대결 구도로 비화되며, 상대 집단의 사소한 실수조차 집단 전체의 도덕적 파탄으로 해석된다. 반면, 내 편의 중대한 잘못은 ‘불가피한 실수’나 ‘외부의 공격 탓’으로 축소되거나 합리화된다.
이러한 태도는 민주주의의 핵심인 상호 존중과 합리적 대화를 약화시키는 주요 원인이 된다. 집단 정체성이 강할수록 개인은 자신의 독립적 판단보다 집단의 정서와 규범에 순응하려 하며, 이 과정에서 도덕적 일관성은 희생되고 이중 잣대는 더욱 강화된다.
특히 현대의 온라인 미디어와 SNS는 이러한 부족주의를 증폭시키는 결정적 매개가 된다. 사람들은 비슷한 의견을 가진 이들과만 소통하며, 다른 입장은 쉽게 적대시하거나 배척한다. 이렇게 형성된 ‘폐쇄적 담론 공간’은 점점 더 강한 분열과 편 가르기를 조장하며, 결국 각 집단 내에서 자기 정당화와 타 집단 비난의 기준이 전혀 다른 이중 구조를 낳는다.
미디어 생태계: 편향된 정보 소비와 확산 구조
셋째, 현대 미디어 생태계는 이중 잣대가 반복되고 고착화되는 데 중요한 구조적 조건을 제공한다.
오늘날 정보는 빠르고 광범위하게 퍼지지만, 그만큼 편향과 왜곡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언론은 정치적 성향이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르게 보도하고, 대중은 자신이 선호하는 매체만 선택적으로 소비한다. 이러한 환경은 확증 편향과 에코 챔버를 극대화하며, 객관적 판단보다 집단적 믿음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예를 들어, 동일한 성추문이나 부패 사건이 어떤 언론에서는 집중 보도되고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지만, 다른 매체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거나 단순 해프닝으로 축소된다. 독자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해석만 받아들이며, 반대되는 정보나 비판적 시각은 무시하거나 배척한다. 이렇게 언론이 균형 잡힌 시각보다는 특정 이념이나 진영의 입장을 대변하는 구조 속에서, 도덕적 판단 역시 양극화되어 이중 잣대가 심화된다.
더욱이, 소셜 미디어는 자극적인 정보가 더 널리 확산되는 알고리즘 구조로 인해, ‘분노’, ‘혐오’, ‘비난’ 같은 감정을 유발하는 콘텐츠가 더 잘 노출된다. 그 결과, 복잡한 사회 현실은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단순화되고, 감정적 편향에 따라 도덕적 기준이 임의로 설정된다.
결국 미디어 생태계는 이중 잣대가 반복되고 강화되는 ‘온실’의 역할을 하며, 사회 전반의 윤리적 기준을 흔들고 신뢰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정의의 도구화: 윤리와 정의를 권력 수단으로 활용하는 경향
마지막으로, 이중 잣대가 반복되는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는 정의와 윤리가 권력과 이익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고 있다는 점이다.
본래 정의와 윤리는 공정하고 보편적인 기준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의 사회·정치 영역에서는 ‘정의’가 자신을 정당화하고 상대를 공격하기 위한 무기로 자주 활용된다. 이는 고대부터 반복되어온 권력 투쟁의 방식 중 하나이며, 도덕적 명분을 내세워 정적을 제거하거나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이 과정에서 도덕적 기준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적용되고, 공정한 판단은 정치적 계산에 밀려난다. ‘내 편’의 부정행위는 ‘대의’를 위해 축소되거나 덮이고, ‘상대 진영’의 사소한 실수는 과장되어 도덕적 낙인으로 전환된다. 그 결과, 정의는 권력 유지와 확장을 위한 전략으로 기능하며, 사회적 갈등과 분열은 더욱 심화된다.
예컨대, 정치 세력이나 사회운동 집단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해 윤리적 기준을 선택적으로 적용한다. 자신에게 불리한 사실에는 침묵하거나 왜곡으로 대응하고, 반대편의 도덕적 실책은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이러한 행태는 이중 잣대를 사회 전반에 제도화하고, 도덕 판단의 신뢰를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는다.
결국 정의와 윤리가 권력 도구로 도구화되면, 사회는 점점 더 도덕적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누구도 상대의 진정성을 믿지 않고, 모든 비판은 ‘정치적 의도’로 간주된다. 이렇게 되면 공정하고 일관된 윤리 기준은 사라지고, 권력과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선택적 도덕만이 남게 된다.
결론: 일관성 없는 정의는 또 다른 불의다
사회가 갈등과 분열을 겪는 시대에, 우리가 바라는 것은 단 하나—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다. 그러나 정의와 공정이 일관성 없이 적용될 때,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불의가 된다. 진정한 정의는 자신에게 불리한 순간에도 원칙을 지키는 용기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우리가 반복해서 목격하는 이중 잣대는 단순한 개인의 편견이나 일시적 오류가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기반을 서서히 갉아먹는 느린 독과 같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잣대로 타인을 평가하고, 비난을 일삼으며, 그 결과 사회적 신뢰는 붕괴되고 협력과 공존의 토대는 무너진다. 결국 공동체는 점점 더 불신과 냉소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신뢰의 회복은 단순히 특정 집단이나 인물의 변화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모든 진영, 모든 개인이 먼저 자기 입장과 행동을 성찰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내 편'에는 관대하고 '상대 편'에는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진 이중 잣대와 마주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러한 자기 성찰이 축적될 때, 우리는 비로소 ‘같은 사안에는 같은 잣대가 적용되는 사회’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 순간 정의는 더 이상 선언이나 구호에 머무르지 않고, 모든 사회 구성원이 실천하는 일관된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중 잣대의 함정에서 벗어나려면, 개인과 사회 모두가 끊임없이 자성하며, 공정함을 향한 의지를 흔들림 없이 지켜내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분열과 갈등의 악순환을 끊고, 평등과 존중이 살아 숨 쉬는 사회로 가는 길이다.
진정한 정의는 누구에게나 공평해야 하며, 때로는 자신에게도 가장 엄격해야 한다. 나에게 불리한 정의조차 기꺼이 받아들일 때, 우리는 비로소 더 성숙하고 건강한 민주주의에 다가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