킥보드, 자전거, 오토바이, 유모차가 점령한 인도
1장. 사라진 공간, 사라진 걷는 사람들
― 도시는 언제부터 걷는 이를 밀어냈는가
도시는 본래 걷는 사람들의 것이었다. 거리와 인도, 골목과 횡단보도는 자동차나 오토바이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었다. 사람의 두 발이 닿으며 그 의미가 완성되는 곳, 도시는 그렇게 존재해왔다. 사람들이 걸으며 서로 스치고, 마주 보고 인사를 나누며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 속에서 공동체는 생겨났다. 자동차 이전, 도시는 자연스레 걷는 이를 중심으로 질서와 관계, 삶을 쌓아 올렸다.
그러나 지금, 걷는 사람은 도시에서 밀려나고 있다. 인도와 거리는 더 이상 보행자의 공간이 아니다. 우리는 인도 위에서도 조심스럽게 걷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언제 어디서 킥보드가 돌진해올지, 자전거가 경고 없이 스쳐 지나갈지 경계해야 한다.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조차 방어와 인내, 양보를 요구받는 시대가 되었다.
전동 킥보드는 인도를 질주하고, 공유 자전거는 아무렇게나 버려진다. 유모차는 인도를 넓게 점유하며 이동하고, 배달 오토바이는 신호도, 경계도 무시하며 인도를 가로지른다. 공공의 보행 공간은 다양한 이동 수단에 의해 점령당했다. 이제 보행자는 공간의 주인이 아니다. 도로에서는 자동차를 피하고, 인도에서는 킥보드와 오토바이를 피해 몸을 숨겨야 한다. 스스로 조심하지 않는 한 안전은 보장되지 않는다. 오늘날 도시에서 가장 위태로운 존재가 바로 걷는 사람이다.
걷는 행위는 더 이상 누구에게나 보장된 권리가 아니다. 걷는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일, 혹은 그 위험 속에서 묵묵히 참아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오토바이와 맞닥뜨리고, 인도에서 킥보드와 부딪힐 뻔한 경험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걷는 이는 도시 공간 안에서 가장 약하고, 가장 보호받지 못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문제는 공간의 문제를 넘어선다. 우리는 더 이상 걷는 사람을 배려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다. ‘먼저 걷는 사람에게 길을 양보한다’는 기본적인 질서는 무너졌다. ‘보행자 우선’이라는 표어는 거리의 장식에 불과하다. 그 아래 실제로 우선되는 것은 킥보드의 속도, 자전거의 편의, 배달의 신속함이다. 걷는 이는 불만조차 제대로 표출할 수 없다. 잘못된 것을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누구도 시정을 요구하지 않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그저 조용히 걷고 있을 뿐이다.
걷는 사람은 이제 도시에 잠시 머물다 떠나는 손님처럼 취급받고 있다. 걷는 이의 권리는 점점 얇아지고, 속도와 편의를 앞세운 이동 수단들에 의해 보행 공간은 조각난다. 인도에서조차 사람은 머뭇거리며, 차도에 발을 들이면 자신이 잘못된 위치에 있는 듯 위축된다. 공공 공간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밀려나는 것은 결국 사람, 그중에서도 걷는 사람이다.
‘보행자’라는 단어가 어색해진 시대다. 우리는 도시에 나서며 왜 걷는다는 기본적 행위에 이토록 조심하고, 이토록 피로를 느껴야 하는가. 그 이유는 분명하다. 도시는 더 이상 걷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타고, 빠르게 이동하려는 이들의 편의에 맞춰 도시는 재편되었다. 걷는 이는 그 흐름 속에서 점점 더 좁아진 공간 위를 걷고 있다.
걷는 사람이 사라지고 있다. 아니, 걷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있다. 걷는 행위가 권리가 아닌 감내의 대상이 된 도시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하며 걷는다. 누구도 걷는 이를 배려하지 않는 곳에서 걸음은 곧 피로이고, 공간은 곧 위험이다. 결국 걷는 사람이 없는 도시는 살아 있는 도시일 수 없다. 걷는 이가 안전하고 존중받는 곳, 그곳에서 비로소 공동체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
2장. 무질서의 일상화
― 누가 인도를 점령하는가
전동 킥보드와 공유 자전거는 ‘친환경’이라는 이름 아래 도시 전역으로 빠르게 퍼졌다. 하지만 그 확산 속도만큼, 공간에 대한 책임과 질서는 따라오지 않았다. 주차는 방치되고, 속도는 통제되지 않으며, 안전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인도 위에 아무렇게나 방치된 킥보드와 쓰러진 자전거는 일상이 되었다. 인도는 걷는 사람의 공간이 아니라, 떠돌이 기계들의 임시 보관소로 전락했다.
이런 변화는 일순간에 일어난 것이 아니다. 제도를 만들기 전에 시장이 먼저 달렸고, 규제는 늘 한발 늦었다. ‘편리함’이라는 이유로, ‘친환경’이라는 명분으로, 도시 곳곳에 킥보드와 자전거가 퍼졌지만, 정작 그들이 점유한 공간에서 밀려나는 것은 언제나 걷는 이들이었다. 규칙 없는 점유가 거듭되자, 무질서는 자연스럽게 풍경이 되었고, 그 풍경 속에서 걷는 이는 더 조심하고 더 양보하며 스스로를 숨겨야 했다.
유모차와 배달 오토바이 역시 인도와 차도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유모차는 물론 필요한 존재다. 하지만 인도를 가로막고 느리게 움직이는 그 물리적 점유는 때로 보행자의 흐름을 끊고, 공간을 독점한다. 배달 오토바이는 더 노골적이다. 시간에 쫓긴 그들은 인도를 질주하고, 신호를 무시하며, 걷는 이들 사이를 요리조리 비집고 들어간다. 인도의 경계는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고, 보행자는 그 안에서 방해물처럼 취급된다.
결국 보행자는 늘 밀려나는 존재가 되었다. 걷는 이는 도시의 공간 속에서 우선순위를 빼앗긴다. 인도에서도 차도에서도, 그들은 늘 무언가를 피해 걸어야 한다. 잠시 멈춰 서는 일조차 방해가 되고, 걸음을 늦추면 공간을 방해하는 존재로 취급받는다. 도시의 흐름 속에서 걷는 사람은 언제나 가장 약하고 가장 눈치 보아야 하는 존재로 밀려났다.
이 모든 현상 뒤에는, 타인에 대한 고려가 사라진 풍경이 있다. 각자의 편의와 목적이 공간을 우선 점유하는 근거가 되었다. 누군가는 잠시의 편리함을 위해 킥보드를 아무 데나 버리고, 누군가는 배달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인도를 질주하며, 누군가는 유모차를 내 권리라 믿으며 보행로를 독점한다. 공공의 공간을 함께 쓴다는 감각은 사라졌고, 불편을 감내하는 것은 걷는 이들의 몫이 되었다.
무질서는 이제 일상이 되었다. 걷는 이는 어느새 피해 다니는 법에 익숙해졌다. 공간의 질서는 자취를 감추었고, 개인의 편의가 그 자리를 대신 채웠다. 그렇게 우리는 조용히 무질서 속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다. 불편을 이야기하는 이는 ‘예민하다’는 말을 듣고, 규칙을 요구하는 이는 ‘구시대적’이라는 비난을 받는다. 배려 대신 각자의 편의가 우선되는 도시는, 이제 그 불편마저 개인이 감당하는 곳이 되었다.
도시 공간의 무질서는 걷는 이들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문제가 아니다. 보행자가 안전하지 않은 공간은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다. 인도의 혼잡과 무질서는 결국 도로 위로 번지고, 질서 없는 공간은 또 다른 위험을 낳는다. 이기적 점유는 결코 개인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도시 전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결국 공동체 전체의 불편과 위험으로 돌아온다.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이동 수단도 아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와, 그것을 방치한 도시의 구조가 문제다. 우리가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라는 감각, 타인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가 무너진 자리에 무질서는 정착한다. 그리고 그 무질서는 걷는 사람을 가장 먼저 밀어낸다.
공공의 공간은 모두의 것이지만,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공간이 되어버렸다. 불편을 참는 자만이 침묵 속에서 공동체를 떠받치고 있다. 그러나 그 침묵이 계속될 수는 없다. 무질서 속에서 걷는 이들의 권리는 더욱 얇아지고, 언젠가는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다.
3장. 걷는 행위의 해체
― 가장 기본적 권리의 붕괴
걷는 것은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이동 방식이다. 문명이 시작된 이래, 사람들은 두 발로 거리를 걷고, 길을 만들고, 도시를 형성해왔다. 도시는 본래 걷는 이들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 걷는다는 가장 기본적인 권리는 서서히 무너지고 있다.
도로는 자동차의 것이다. 인도는 이제 기계들의 것이다. 킥보드, 자전거, 오토바이가 인도를 넘나들고, 보행자는 그 안에서 눈치껏 피하며 걷는다. 걷는 이는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 도로에서는 방해가 되고, 인도에서는 점유당한다. 결국 걷는 이는 도시 속에서 가장 우선순위가 낮은 존재로 밀려난다.
보행자를 위한 최소한의 신호마저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 이를 보여준다. 횡단보도의 보행자 신호가 켜져 있어도, 오토바이는 무시하고 지나간다. 좌회전 차량은 보행자를 위협하며 밀어붙이고, 신호를 어기는 킥보드는 언제나 어디선가 나타난다. ‘보행자 우선’이라는 말은 더 이상 현실의 질서가 아니다. 공공 디자인의 장식일 뿐, 실제 공간에서는 누구도 걷는 이를 우선하지 않는다.
걷는 사람은 이제 권리를 주장할 수도, 보호받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사고가 나도 언론은 주목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는 자동차 중심의 구조에 맞춰져 있고, 보행자가 피해자가 되어도 ‘주의 부족’이라는 말로 책임이 전가된다. 걷는 이는 스스로를 지켜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안에서 걷는다는 행위는 권리가 아닌 인내가 되고 있다.
문제는 단순히 공간의 문제에 머물지 않는다. 걷는 이를 배려하지 않는 도시는, 결국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도시로 변모한다. 보행자의 공간을 빼앗는 행위는, 타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걷는 이는 모두의 기본값이자, 공동체의 최소 단위다. 그 최소한의 존재가 보호받지 못하는 곳에서, 공동체는 조금씩 무너진다.
무질서가 당연해질수록 걷는 이는 더욱 조용해진다. 목소리를 내는 순간, 예민하거나 시대착오적인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권리를 요구하기보다, 불편을 감수하며 걸음을 조심스럽게 옮긴다. 그렇게 걷는 이들의 권리는 점점 얇아지고, 결국 존재감조차 희미해진다.
우리는 언제부터 걷는 것조차 두려워하게 되었을까. 인도에서 킥보드를 피해 걷고, 도로에서 오토바이를 피해 멈춰 서야 하는 이 모순 속에서, 걷는 행위는 점차 해체되고 있다. 걸음은 안전하지 않고, 거리 위 관계는 사라졌다. 사람은 서로를 인식하지 않고, 타인의 존재를 고려하지 않는 공간 속에서, 걷는 이는 단지 부딪히지 않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걷는 사람이 밀려난 공간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그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 서로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다. 걷는 이를 배려하지 않는 도시는, 결국 그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은 곳으로 변한다. 보행자의 권리가 존중되지 않는 곳에서, 타인의 권리 역시 언제든 침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걷는 행위의 해체는 결국 공공성의 해체다. 걷는 사람을 위한 공간이 사라진 도시는, 공동체가 무너진 도시와 같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각자도생의 방식으로, 더 거칠고, 더 이기적인 방식으로 살아가게 된다.
4장. 이기적 점유와 공동체 붕괴
― 편의라는 이름 아래 사라진 질서
문제는 기술이 아니다. 기술은 언제나 그 자체로 중립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태도, 그리고 그것을 방조하거나 관리하지 않는 도시의 구조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지금 도시는 그 방조의 결과 위에 서 있다. 질서는 무너졌고, 공공 공간의 사유화는 어느덧 일상이 되었다.
킥보드, 자전거, 오토바이, 유모차. 이들은 모두 이동을 위한 수단이다. 그러나 이 수단들은 점점 더 공공 공간을 개인의 편의에 맞게 점유하고 있다. 전동 킥보드는 아무 곳에나 버려지고, 공유 자전거는 점자 블록을 막고 서 있다. 배달 오토바이는 인도를 자신의 도로 삼아 질주하고, 유모차는 인도의 흐름을 가로막으며 공간을 독차지한다. 이 모두가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점유의 풍경이다.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이동의 권리는 모두에게 보장되어야 한다고.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권리가 타인의 공간을 침해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권리가 아니라 횡포다. ‘나는 급하니까’, ‘나는 어쩔 수 없으니까’라는 개인의 사정이 공공의 공간을 점령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논리가 지배하는 도시에 살고 있다.
이기적 점유가 일상이 되면, 그 불편은 조용히 감내하는 이들에게 돌아간다. 걷는 이들은 피해 다닌다. 차도와 인도를 오가며 스스로를 방어한다. 누군가는 넘어지고, 누군가는 부딪히지만,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공간을 어지럽히는 이는 늘 잠시 머물 뿐, 그 뒤의 불편은 언제나 남는다. 질서는 그렇게 무너진다.
공공 공간은 모두의 것이지만, 모두가 책임지지 않는 순간, 그 공간은 아무도 지키지 않는 땅이 된다. 도시의 질서는 침묵과 인내 위에 겨우 유지될 뿐이다. 불편을 참는 자들이 공동체의 마지막 방어선이 된다. 그러나 침묵이 계속되는 한, 그 불편은 점점 더 자리를 넓혀간다. 결국 모두가 피해자가 되거나, 모두가 가해자가 되는 날이 온다.
도시는 관계로 이루어진다. 공공의 공간은 그 관계가 눈에 보이는 형태로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관계가 사라진 자리에는 이기적 점유만이 남는다. 누군가는 생각한다. ‘잠깐이면 괜찮겠지’, ‘다들 이렇게 하는데 뭐’. 그 순간 공간은 누군가의 일시적 편의에 잠식당하고, 그 편의가 모여 공공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편의라는 이름 아래 질서는 사라졌다. 규칙 없는 공간에서 약한 자는 스스로를 지켜야 하고, 피해 다녀야 하고, 결국 그 공간을 포기하게 된다. 걷는 이들은 그 피해자이자, 침묵 속에서 공동체를 지탱하는 존재다. 그러나 침묵이 계속될 수는 없다. 질서를 지키지 않는 이기심이 판치는 도시에서, 언젠가는 모두가 불편을 견딜 수 없는 지점에 도달할 것이다.
공동체는 말없이 무너진다. 공공의 공간을 함부로 점유하는 작은 이기심들이 쌓이고, 타인을 고려하지 않는 태도가 퍼질 때, 도시는 결국 공동체가 아닌, 각자도생의 전장이 된다. 그 전장은 누구에게도 안전하지 않다.
질서란 누군가를 위한 규제가 아니다. 모두를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다. 그 약속이 깨진 자리에는 오직 더 큰 불편과 더 많은 침묵이 남는다. 그리고 그 침묵 속에서 걷는 이는, 가장 먼저 사라진다.
5장. 도시는 누구의 것인가?
― 보행자가 존중받는 공간이 공공이다
도시는 단순한 인프라가 아니다. 도로와 건물, 전기와 수도 같은 물리적 시설의 집합체만이 아니다. 도시는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와 약속, 그리고 공존의 총체다. 그 관계의 중심에는 ‘걷는 사람’—가장 약하고, 가장 기본적인 존재가 있다.
도시가 진정한 ‘공공’이 되려면, 가장 약한 존재가 안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권리가 보호받을 때, 비로소 모두가 누리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생긴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그 약자를 가장 쉽게 배제하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보행자는 도로 위에서 가장 취약한 존재다. 그렇기에 보행자를 위한 최소한의 배려와 안전장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산책길은 주차장으로 변하고, 인도는 창고가 된다. 전동 킥보드가 아무 데나 방치되고, 유모차가 지나가기 힘든 좁은 인도는 누구의 편의를 위해 그런가? 그 결과, 걷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공간에서 밀려나고 있다. 보행자의 안전과 편의는 차차 뒷전으로 밀리며, 도시는 점점 더 이기적인 공간으로 변모한다.
공공성의 붕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공공의 공간이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 아니라, 일부의 편의를 위한 사유 공간이 되었을 때, 그 도시의 공동체성은 무너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공공’은 단지 형식적인 약속이나 규칙이 아니다. 그것은 약자를 배려하고, 서로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며 함께 만드는 공간이다.
도시는 약자의 것이다. 노약자, 어린이, 임산부, 장애인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보행자 모두가 이 도시에 속한다. 그들이 안전하고 존중받지 못하는 도시는 진정한 도시가 아니다. 강자만이 누리는 공간은 도시가 아니라, 무질서한 사유지에 가깝다.
도시의 가치는 그 안에 사는 ‘사람’의 존엄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그 존엄은 가장 약한 사람을 얼마나 배려하느냐에 달려 있다. 보행자가 안전하게 걷지 못하는 도시, 그 도시에서 우리는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왜냐하면 누군가가 불편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한다면, 그 위험은 언젠가 모두에게 전이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시는 그 자체로 약자를 위한 배려가 실천될 때, 진정한 공공성을 회복한다. 우리는 속도와 효율을 좇는 대신, 존재와 배려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편리함 뒤에 숨겨진 무책임함을 직시하고, 각자의 권리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균형을 찾아야 한다.
걷는 이가 존중받는 공간만이, 비로소 모두에게 열린 도시다. 그곳에서 우리는 함께 살아가고, 서로를 지키며, 진정한 ‘공공’을 만들어간다. 도시는 결국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 가장 약한 존재가 배려받을 때, 그 도시는 온전한 공공의 공간으로 완성된다.
6장. 다시 걷고 싶은 도시를 위하여
― 속도보다 존재, 편의보다 공존, 점유보다 배려
우리는 어느 순간, 묻지 않게 되었다. ‘이 도시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빠르게 움직이고, 더 크게 소리치는 사람들만을 위한 도시가 되어버린 지금, 그 도시는 결국 우리 모두를 파괴하는 무대가 되고 말았다.
속도에 쫓기고, 편리함만을 좇으며, 개인의 점유욕이 공공의 질서를 무너뜨린다. 걷는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도시에서는 배려도, 질서도, 공동체도 함께 사라진다. 조용히 길을 걷는 이들은 점점 주변에서 밀려나고, 공간은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찢기고 부서진다.
그러나 걷고 싶은 도시는 살아가고 싶은 도시다. 걷는다는 행위는 단순한 이동을 넘어, 도시와 사람 사이에 만들어지는 관계의 시작이자, 공동체를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이다. 걷는 공간에서 우리는 서로를 보고, 인사하며, 함께 숨 쉰다. 그 공간이 무너지면 도시는 그 의미를 잃는다.
속도보다 존재가 우선하는 도시, 편의보다 공존이 중요한 도시, 그리고 점유보다 배려가 앞서는 도시를 상상해야 한다. 그 도시는 무리한 질주 대신 느림을 허용하고, 개인의 편리함보다 모두의 안전과 존엄을 먼저 생각하는 곳이다. 누구나 편안히 걸을 수 있는 인도가 있는 곳, 그곳이야말로 도시가 다시 사람의 것이 되는 자리다.
우리가 잃어버린 도시를 되찾으려면, 다시 사람을 중심에 놓아야 한다. 속도의 경쟁이 아닌, 존재의 존중으로, 편리함을 위한 점유가 아닌, 서로를 위한 배려로 도시를 다시 설계하고 관리해야 한다. 공공의 공간이 모두에게 공평하고 안전하게 열려야 한다. 그렇게 도시가 바뀌면, 우리는 다시 그곳을 사랑할 수 있다.
걷는 이가 존중받는 도시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조금 더 관대해지고, 조금 더 함께할 수 있다. 바로 그 공간에서 공동체는 회복된다. 그리고 그 공동체 속에서 우리는 진정한 ‘공공’과 ‘연대’를 느낄 수 있다.
다시 걷고 싶은 도시, 그곳이야말로 우리의 미래다. 그 미래를 위해 지금부터라도 속도보다 존재, 편의보다 공존, 점유보다 배려를 우선하는 도시 만들기에 힘써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모두가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갈 도시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