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엄마’, ‘성실한 직장인’ 같은 이상적 역할에 대한 압박
1
우리는 모두 어떤 기대 속에 살아간다.
누구도 노골적으로 강요하지 않지만, 어느새 그 기대는 우리 삶 깊숙이 들어와 있다. ‘좋은 엄마’, ‘성실한 직장인’, ‘배려 깊은 친구’, ‘이해심 많은 연인’, ‘성숙한 어른’이라는 말들은 겉으로는 칭찬처럼 들리지만, 실은 우리에게 조용한 요구를 던진다. 그렇게 우리는 모르는 사이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 삶’을 살기 시작한다.
“엄마라면 이 정도는 당연하지.”
“직장인이라면 회사 사정쯤은 이해해야지.”
“가정이 있는데, 자식이 있는데, 그 정도는 희생해야지.”
이런 말들은 직접적인 명령처럼 들리지 않는다. 대부분은 충고처럼, 조언처럼, 때로는 아주 미묘한 눈빛과 분위기로 전해진다. 그러나 그 말들은 분명한 신호다. ‘당연한 것’을 수행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낙인이 따라붙는다는 암묵적 경고. 그리고 그 신호는 우리 안에 ‘기대에 맞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심어 놓는다.
문제는 그 기대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좋은 엄마’가 되려는 순간, 육아도 살림도 완벽해야 한다. 감정적으로도 늘 평온하고 아이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며, 사회적으로도 뒤처지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성실한 직장인’이라면 회사 사정을 헤아리고, 필요 이상의 책임을 떠안으며, 야근에도 불평하지 않는 모습이 미덕처럼 요구된다.
그러나 한 가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다고 해서 기대는 멈추지 않는다.
그다음에는 또 다른 기대가 기다리고 있다. 좋은 엄마이면서도 일에서 성과를 내야 하고,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으면서도 가정에서는 무탈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이 모든 것 위에 ‘배려 깊은 딸’ 혹은 ‘언제나 괜찮은 친구’라는 기대까지 더해진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 누군가의 기대 속에서 또 다른 기대를 덧입으며 산다.
2
이러한 기대는 마치 투명한 감옥 같다.
눈에 보이지도, 실체를 잡을 수도 없지만 분명 존재하며, 한 걸음만 벗어나도 ‘무책임’, ‘이기적’, ‘철없음’이라는 비난이 돌아온다. 스스로도 알게 모르게 이 감옥의 규칙에 순응하게 된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에게 묻는다.
“이 정도는 참아야 하는 거 아닐까?”
“다들 이렇게 사는데 나만 힘들다고 해도 되는 걸까?”
“그래도 내가 더 잘해야 하지 않을까?”
이 물음들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채근하고, 마음을 닫고, 감정을 억누른다. 때로는 기대를 잘 수행하는 자신에게 안도하면서, 때로는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를 꾸짖는다.
이렇듯 ‘기대의 감옥’은 외부에서 오는 듯 보이지만, 가장 견고한 벽은 내면에서 만들어진다.
내가 나를 옭아매고, 스스로를 다그치며, 자발적으로 그 감옥 안에 머문다.
3
묻고 싶다.
도대체 ‘좋은 엄마’란, ‘성실한 직장인’이란 누가 만든 틀인가.
그 기준은 정말 보편적인 정의이자 도덕인가, 아니면 시대와 사회가 만들어낸 일종의 ‘강요된 이상’인가.
우리는 이제 익숙하게 듣고 말한다. “엄마니까.”, “직장인이니까.” 그러나 그 모든 말 뒤에는 보이지 않는 무게가 있다. ‘기대에 맞게 살아야만 한다’는 말 없는 압박, ‘다른 선택을 해서는 안 된다’는 보이지 않는 금기.
문제는, 그렇게 살아가며 우리는 조금씩 자신의 목소리를 잃어간다는 것이다.
무언가 불편해도, 억울해도, 힘들어도, “괜찮아요”라는 말로 감정을 봉합하게 된다. 기대에 맞는 사람이 되는 법은, 곧 자신의 욕망을 지우는 법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수록 우리는 지쳐간다.
‘기대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바로 그 틀을 의심하는 일이다.
진짜 ‘좋은’이란 무엇인가.
진짜 ‘성실’이란 무엇인가.
진짜 ‘나답게 산다’는 것은 어떤 모습인가.
남이 만들어둔 틀 안에 스스로를 끼워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모습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기대가 아닌 선택으로 살아갈 수 있다.
심층 학습
‘기대의 감옥’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사유는 정신분석과 사회학에서 자주 다루어져 왔다. 대표적인 논의는 자크 라캉의 ‘타자의 욕망’ 개념이다. 우리는 스스로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사회가 요구하는, 타인이 기대하는 욕망을 욕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좋은 엄마’, ‘성실한 직장인’이라는 이상적 이미지가 어떻게 우리 내면에 깊숙이 침투하게 되는지를 설명해 준다.
또한 심리학자 브렌 브라운은 《불완전함의 선물(The Gifts of Imperfection)》에서 완벽하려 애쓰는 태도가 어떻게 우리를 번아웃에 빠뜨리고 자기혐오로 이끄는지 설명한다. 그녀는 ‘충분히 괜찮은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기대와 압박에서 벗어나 자기 연민과 자율성을 회복할 것을 조언한다.
사회문화적으로는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아픈가》에서 다루듯, 현대사회는 역할 기대와 감정 노동을 일상화하며 개인에게 모순된 요구를 던진다. ‘모든 것을 잘 해내는 존재’가 되라는 강박이야말로 ‘기대의 감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논의들은 본문에서 언급한 ‘기대’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 속에서 어떻게 형성되고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나침반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