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선을 넘지 않는 법’을 배웠을까
어린 시절부터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이런 말을 들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어.”
“괜히 나서지 마.”
“선을 넘으면 안 되지.”
그 말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회사에서, 모임에서, 친구 사이에서, 심지어 가족 안에서도 우리는 서로가 그어놓은 ‘보이지 않는 선’을 눈치로 감지하며 그 안에서만 움직인다. ‘선을 넘지 않는 것’은 곧 ‘상식적이다’, ‘예의 바르다’, ‘공감 능력이 있다’는 평가와 연결된다. 반대로 그 선을 넘으면 무례하다거나 눈치 없고, 예민하다는 인상까지 겹쳐 ‘피곤한 사람’으로 낙인찍히기 쉽다.
그래서 다들 정도는 달라도 말투를 조심하고, 감정을 억누르며, 질문을 삼키고, 심지어 웃음의 크기, 말하는 속도, 반응 하나하나까지 ‘지나치지 않는 선’을 의식한다. 자기 검열의 전형적인 예다.
이 선은 어디에 있는 걸까? 누가 그어놓은 걸까? 명확한 정답은 없다. 누군가가 분명히 규정하거나 법으로 정해놓은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공기 중에 떠다니는 ‘눈치의 지형도’ 속에서 우리는 조심스럽게, 지나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조율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이러니다.
선의 이름으로 사라지는 말들
우리는 어느새 ‘말하는 법’이 아니라 ‘참는 법’을 더 많이 배워왔다. 모든 것을 말해도 되는 자리는 드물고, 모든 감정을 드러내도 괜찮은 순간은 더욱 적다. ‘그 정도면 됐지’라는 말 앞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접고 또 접는다.
질문은 가파르게 위축되고, 의견은 완곡한 표현 뒤에 숨는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할 때조차 “제가 괜한 말을 꺼낸 것 같네요”라며 먼저 사과한다. 언젠가부터 이 사회는, 너무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을 불편해하고 경계하게 되었다.
중요한 말일수록 더 쉽게 사라진다. 불편한 질문, 예리한 비판, 때로는 어떤 고백들은 ‘선을 넘는 말’로 여겨져 더 이상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다. 그렇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 점점 더 성숙한 사람처럼 보이게 되었고, 말하는 사람은 문제적인 사람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선을 넘지 않는 대신, 우리는 무엇을 잃고 있는가
‘선을 넘지 않기’는 처음엔 타인을 위한 배려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것은 스스로를 축소시키는 기술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지나치게 배려하며, ‘괜찮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검열한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나조차 내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
자기표현의 위축은 곧 관계의 위축으로 이어진다. 말하지 않는 관계에서 신뢰는 깊어질 수 없고, 말하지 않는 사회에서 변화는 기대하기 어렵다. 지나치지 않으려는 조심스러운 태도들은 결국 우리를 서로로부터 단절시키고, 각자 고립된 섬 위에 머물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선 앞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선을 넘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가 편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선을 감지하느라, 어기지 않으려 애쓰느라 우리는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러나 그 에너지는 스스로를 방어하는 데에만 쓰일 뿐, 세상을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데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때로는 조심스럽게, 때로는 단호하게 우리는 묻고 말해야 한다.
“이 선은 왜 필요한가?”,
“누구를 위한 선인가?”,
“그런 선이라면 훌쩍 뛰어넘어도 되는 거 아닌가?”
모든 선을 허물 필요는 없다. 그러나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침묵시키는 불필요한 선이라면, 우리는 의문을 던져야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타인의 존엄이지, 침묵을 미덕인 양 가장하는 태도가 아니다.
심층 학습
감정노동, 자기 검열, 사회적 규범 관련 국내 번역서 3권
『감정노동』 (원제: The Managed Heart)
저자: 앨리 러셀 혹실드 (Arlie Russell Hochschild)
‘감정노동’이라는 개념을 처음 제시한 책으로 서비스업뿐 아니라 현대 사회 전반에서 개인이 감정을 어떻게 관리하고 통제당하는지를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저자 호크실드는 감정을 단순한 내면의 경험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감정을 노동의 한 형태로 규정하며, 고객이나 상사 앞에서 ‘적절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사실상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역할임을 밝힌다.
특히 ‘눈치 보기’와 ‘선을 넘지 않기’ 같은 사회적 규범이 개인의 감정과 노동 현장에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어 있는지를 다각도로 분석한 데 이어 감정을 숨기고 조절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내면의 갈등과 피로, 그리고 자기 소진 문제를 치밀하게 조명하고 있다. 현대인의 일상 속에 내재된 감정 억압 구조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인 저작이다.
『불완전함의 선물』 (원제: The Gifts of Imperfection)
저자: 브레네 브라운 (Brené Brown)
이 책은 완벽주의와 자기 검열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수용하는 것이 어떻게 진정한 행복과 인간관계 회복으로 이어지는지를 심리학적 관점에서 탐구한다. 브레네 브라운은 사람들이 사회적 기대와 ‘선을 넘지 않기’라는 무의식적 자기 검열 속에서 자신의 진정한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고 지적한다.
책은 자기 수용과 취약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불완전한 자신을 인정하고 진솔하게 표현하는 것이 건강한 관계와 자기 존중의 출발점임을 다양한 연구 결과와 사례를 통해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감정을 숨기고 조심하는 대신, 용기 있게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삶을 제안하는 이 책은 많은 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공포의 문화』 (원제: The Culture of Fear)
저자: 베리 글래스너 (Barry Glassner)
이 책은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와 정치가 어떻게 ‘공포’라는 감정을 증폭시키고, 이를 대중을 통제하는 도구로 활용하는지를 분석한다. 저자 베리 글래스너는 공포가 사회적 자기 검열과 ‘눈치 보기’ 문화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과장된 위험과 불안에 휩싸인 채, 사회적 규범 안에서 ‘선을 넘지 않는’ 안전한 행동만을 선택하게 된다. 그 결과 개인의 자유로운 표현과 행동은 점차 제한되고, 감정적 위축은 더욱 심화된다.
이 책은 ‘공포의 문화’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심리적·사회적 영향을 폭넓게 조명하며, 왜곡된 두려움과 검열이 우리 삶과 공동체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깊이 있게 성찰할 기회를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