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글로벌 거버넌스의 종말?(무너지는 국제 규범, 다자주의의 미래)
오늘 읽을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yssey, 1968)》의 '모노리스'
제1화부터 9화까지 우리는 신냉전 시대의 특징인 강대국들의 패권 경쟁, 경제 블록화, 군사적 긴장을 살펴봤습니다. 이 모든 현상의 궁극적인 결과는 바로 글로벌 거버넌스(Global Governance)의 붕괴로 나타납니다. 유엔(UN), 세계무역기구(WTO), 국제법 등 국가 간 협력을 통해 만들어진 '국제 규범'이 강대국들의 이익에 의해 무너지는 시대로 접어든 것입니다.
유엔 안보리의 마비와 무력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와 안보의 최종 보루였던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신냉전 갈등의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거부권의 남용: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침공)와 중국(대만 및 남중국해 문제)은 자국의 핵심 이익에 반하는 모든 결의안에 거부권(Veto Power)을 행사하며 안보리의 기능을 마비시켰습니다. 이는 곧 국제법 집행의 무력화를 의미합니다.
이념 대결의 회귀: 안보리는 중동, 아프리카 분쟁 등에서도 미국-서방 진영과 러시아-중국 진영 간의 이념적, 전략적 대결의 장이 되면서,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에 대한 신속한 대응조차 불가능해지고 있습니다. 유엔이라는 다자주의의 상징이 강대국들의 '각자도생'을 막지 못하고 있습니다.
WTO의 붕괴와 무역 규범의 실종
경제 영역에서도 상황은 비슷합니다. 제4화에서 다룬 글로벌 관세 전쟁과 보호무역주의 확산은 WTO 체제의 붕괴와 맞물려 발생합니다.
상소 기구 마비: WTO의 무역 분쟁을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상소 기구는 미국의 위원 임명 거부로 기능이 정지되었습니다. 이는 회원국들이 WTO의 판결을 무시하거나 자국 법규를 우선시하는 '자력 구제(Self-Help)' 시대를 열었습니다.
'블록 간 무역' 심화: 강대국들은 WTO를 통한 보편적 자유무역 대신, 미국-EU FTA, CPTPP, RCEP 등 자국에 유리한 양자/소다자 무역 협정을 통해 지역 블록 경제를 강화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 무역 규범은 파편화되고 있으며, 규범의 혜택을 보던 중견국들은 예측 불가능한 통상 환경에 노출되고 있습니다.
기존의 글로벌 거버넌스가 무너지는 '혼돈' 속에서, 국제사회는 '새로운 세계 질서'를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새로운 질서는 과거처럼 보편적 가치보다 '이익 공동체'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특징을 갖습니다.
'미니래터럴리즘(Minilateralism)'의 부상
다자주의(Multilateralism, 다수가 참여하는 유엔)가 좌절되면서, 소수의 이해관계가 맞는 국가들끼리 뭉치는 '미니래터럴리즘(Minilateralism, 소자주의)'이 외교의 대세가 되고 있습니다.
안보 분야: 미국 주도의 쿼드(Quad, 미국-일본-호주-인도), 오커스(AUKUS, 미국-영국-호주) 등은 특정 전략적 목표(중국 견제)를 위해 소수 핵심국가들끼리 군사 및 기술 협력을 강화하는 대표적인 미니래터럴리즘입니다.
경제 분야: G7, 브릭스(BRICS)의 확장(8화), 공급망 동맹 등도 모두 이익 공동체를 중심으로 특정 이슈에 대응하려는 소다자 연합의 형태입니다.
이 미니래터럴리즘은 기존 다자 기구의 비효율성을 해소할 수는 있지만, 연합에 끼지 못한 국가들을 고립시키고, 진영 간의 대결 구도를 더욱 심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습니다.
새로운 규범의 씨앗: 기술 거버넌스
무너지는 전통 규범과 달리, AI, 사이버, 양자 기술 등 첨단 분야에서는 새로운 국제 규범이 태동하고 있습니다. 이 영역은 아직 국제법이 정립되지 않아, 기술을 선도하는 강대국이 곧 규범을 주도하려는 '기술 거버넌스 경쟁'이 치열합니다. 누가 이 규범을 먼저 만들고 확산시키느냐에 따라 미래 세계 질서의 형태가 결정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신냉전은 탈냉전기의 이상(理想)적 거버넌스를 종식시키고, 현실(現實)의 힘과 이익에 기반한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과도기적 혼돈'을 의미합니다. 인류는 이 혼돈 속에서 새로운 생존 도구, 즉 '새로운 형태의 협력과 규범'을 찾아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영화로 읽는 제10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모노리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인류는 각 시대마다 정체불명의 검은 직사각형 물체인 '모노리스(Monolith)'와 조우합니다. 모노리스는 인류의 진화를 촉발하고 새로운 지식과 도구를 상징합니다.
모노리스의 의미: 무너진 글로벌 거버넌스 이후 인류가 마주해야 할 '새로운 시대의 도구(패러다임)'를 상징합니다. 기존의 유엔, WTO라는 '낡은 도구'가 파편화된 지금, 우리는 기술, 경제, 안보 분야에서 새로운 규범과 협력 방식이라는 '모노리스'를 발견하고 활용해야 할 기로에 서 있습니다.
진화의 요구: 영화는 인류에게 '진화하라'고 요구합니다. 신냉전의 혼돈은 인류가 과거의 낡은 다자주의를 넘어, 더욱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글로벌 문제 해결 방식(새로운 거버넌스)으로 진화해야 함을 역설합니다.
이 영화는 혼돈의 종말 이후 인류가 맞이할 새로운 질서에 대한 기대와 성찰을 던지며, 파트 1을 마무리하는 데 적합한 메시지를 제공합니다.
[다음 회 예고]
파트 2 예고: 격전지 분석: 뜨거운 불꽃이 튀는 곳 (8편)
파트 1을 통해 우리는 미·중 경쟁이라는 거대한 두 축이 만드는 '신냉전의 구조'를 완성했습니다. 다음 파트 2에서는 이 구조 속에서 실제 충돌이 발생하는 '격전지(Hot Spot)'들을 집중적으로 분석합니다.
첫 번째 격전지인 11화에서는 '유럽 안보의 화약고'가 된 우크라이나 전쟁을 다룹니다. 전쟁 장기화가 유럽의 군사화와 나토의 결속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처럼 끝나지 않는 전쟁의 고통과 지정학적 의미를 짚어봅니다. 파트 2에서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