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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문명은 '이야기'로 세워졌고, '군중'으로 무너졌다

유발 하라리와 귀스타브 르 봉이 해부하는 집단성의 역설

by 콩코드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바보들의 이야기

​인류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무엇일까요? 뛰어난 도구를 만든 지능일까요, 아니면 불을 통제한 능력일까요? 유발 하라리(Yuval Harari)의 『사피엔스』는 이 질문에 대해 단호하게 답합니다. 인류를 지배자로 만든 능력은 바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그 이야기를 집단적으로 믿는 능력'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능력 덕분에 수백만 명의 낯선 이들이 '국가', '화폐', '인권' 같은 허구의 질서를 위해 협력하는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의 역설이 숨어 있습니다. 수백만 명을 결속시키는 이 '집단성'이, 때로는 가장 비이성적이고 파괴적인 힘으로 돌변한다는 사실입니다. 귀스타브 르 봉(Gustave Le Bon)의 『군중 심리』는 바로 이 현상을 파헤칩니다. '가장 똑똑한 개인이 모여,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바보 집단'이 되는 이 기괴한 현상을 말이죠.


​오늘 이 글은 이 두 거장의 통찰을 융합하여 인류 역사의 가장 근본적인 역설을 해부할 것입니다.

​창조의 빛: 유발 하라리가 밝힌, 상상의 질서를 통해 어떻게 인류가 거대한 집단을 이루고 문명을 창조했는가.

​파괴의 그림자: 귀스타브 르 봉이 해부한, 그 집단 속에 던져진 개인이 어떻게 이성을 상실하고 광기에 휩쓸리는가.


​우리가 만든 집단성에 대한 냉철한 진단 없이는, 거대 기술과 정보 과잉의 시대에 '떼를 지어 바보가 되는' 비극을 멈출 수 없습니다. 인류는 어디에서 와서, 왜 모여서, 왜 이토록 쉽게 광기에 휩쓸리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지식이 바로 당신이 군중 속에 있으면서도 주체적인 개인으로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무기가 될 것입니다.



​호모 사피엔스의 DNA: '허구'가 낳은 집단 협력 능력

​인지 혁명의 마법: 낯선 이들과의 대규모 협력

​당신은 모르는 사람 100명과 함께 목숨을 걸고 싸울 수 있나요? 침팬지는 수십 마리 이상이 모이면 사회가 붕괴합니다. 그들의 협력 능력은 '직접 알고 있는 개체' 수에 한정되기 때문이죠. 유발 하라리는 약 7만 년 전 일어난 인지 혁명이 이 한계를 깨부수었다고 설명합니다.


​인지 혁명은 호모 사피엔스에게 '허구(Fictions)'를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이 허구 덕분에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집단적으로 상상하고 믿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낯선 사람 100명, 1,000만 명, 심지어 10억 명도 '같은 신(종교)', '같은 가치(인권)', '같은 실체(국가)'를 믿으면 놀라운 유연성을 가지고 대규모로 협력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인류를 지배자로 만든 가장 강력한 DNA입니다. 집단 협력은 지능이 아니라 공통의 신화에서 나왔습니다.


​상상의 질서: 문명을 세운 세 가지 위대한 허구

​인류 문명을 세운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상상의 질서'는 이 위대한 허구의 힘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국가와 법(가상의 공동체)

​대한민국이라는 실체는 물리적으로 존재할까요? 물론 지도에 있지만, 그것을 지탱하는 '주권', '국민', '헌법' 같은 개념은 결국 우리가 집단적으로 동의한 허구입니다. 이 허구 덕분에 우리는 5천만 명이 넘는 낯선 사람들을 '우리'라는 범주 안에 묶어 세금을 걷고, 국방의 의무를 지우며, 복잡한 시스템을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 허구가 무너지는 순간, 국가는 해체되고 모두는 각자도생의 길을 걷게 됩니다.


​화폐와 자본주의(가장 성공적인 신화)

​종이로 된 만 원짜리 지폐에 무슨 가치가 있나요? 아무것도 없죠. 하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이것은 가치가 있다'고 집단적으로 믿는 순간, 화폐는 국경을 넘어 상품과 노동을 교환하는 가장 효율적인 협력 시스템이 됩니다. 하라리는 자본주의 역시 미래의 이익에 대한 집단적인 믿음(신용, 허구)을 바탕으로 한다고 강조합니다. 이 허구가 인류에게 전례 없는 부와 성장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종교와 이데올로기(궁극의 결속 도구)

​고대 종교부터 현대의 민족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데올로기까지, 이들은 모두 '우리가 따라야 할 궁극적인 질서'라는 신화를 제공합니다. 이 신화는 삶의 의미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이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집단을 위해 싸우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이들이 믿는 '도덕률'은 결국 인간이 고안한 허구이지만, 이 허구가 역사상 가장 광범위한 협력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신화의 역설': 통제의 수단이 된 상상의 질서

​『사피엔스』의 통찰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인류를 해방시킨 이 상상의 질서는 결국 통제의 수단이 되었습니다. 농업 혁명 이후 인류가 만든 신화와 계급 구조는 소수의 엘리트에게 권력을 집중시키고, 대다수 사피엔스의 행복과는 무관하게 역사를 발전시켜왔습니다.


​허구의 질서가 견고해질수록, 개인의 삶은 그 틀 안에 갇힙니다. 당신이 아침에 일어나 회사에 가고 세금을 내는 모든 행위는 결국 수천 년 전 만들어진 허구에 대한 당신의 헌신이며, 이 허구가 인류 집단성의 가장 위대한 기반이자, 동시에 가장 은밀한 족쇄가 된 것입니다.



​개인의 이성이 말살되는 순간: 군중의 탄생과 특성

​군중 속에 던져진 개인: '집단 정신'의 출현

​<호모 사피엔스의 DNA: '허구'가 낳은 집단 협력 능력>에서 우리는 허구 덕분에 수많은 개인이 모일 수 있었음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르 봉의 『군중 심리』를 통해, 그렇게 모인 집단이 왜 돌연 비이성적인 바보 집단이 되는지 해부할 차례입니다.


​르 봉이 말하는 '군중(Crowd)'은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모인 물리적인 집합이 아닙니다. 그것은 특정한 상황에서 개인의 의식이 사라지고 '하나의 집단 정신(Collective Mind)'이 형성된 심리적 실체입니다. 군중에 속한 개인은 사회적 지위, 교육 수준, 재산에 상관없이 지적 능력이 약화되고, 개성이 말살됩니다. 먹물 깨나 먹었다는 지식인도 군중 속에 들어가면 '감정의 돌풍'에 휩쓸려 평소에는 하지 않았을 비이성적인 행동을 스스럼없이 하게 됩니다.


​군중을 규정하는 세 가지 심리적 특성 심층 분석

​군중을 구성하는 개인들은 '군중화'되는 순간, 다음 세 가지 핵심 심리적 특성을 강력하게 드러냅니다.


​충동성, 변덕, 과민성(논리 대신 감정)

​군중은 논리나 이성적인 추론이 아니라 감정으로 판단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자극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며, 이 반응은 격렬하고 변덕스럽습니다. 군중의 감정은 너무나 단순하고 과장되기에 중용을 모릅니다. 극도의 영웅심이나 극도의 잔혹성 사이를 순식간에 오갑니다. 마치 폭풍우처럼 예측 불가능한 군중의 충동성은 지도자나 선동가들이 '논리' 대신 '이미지'나 '구호'를 통해 지배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줍니다.


​피암시성과 맹신(비판 정신의 말살)

​군중에 속한 개인은 비판 정신을 잃어버리고 피암시성(Suggestibility)이 극도로 높아집니다. 누군가 군중 속에서 먼저 "저것이 기적이다!"라고 외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눈으로 진실을 확인하지 않고도 이를 믿기 시작합니다. 르 봉은 이를 '감염(Contagion)'이라고 불렀는데, 마치 전염병처럼 암시가 순식간에 퍼져 집단 환각을 만들어냅니다.


​이 피암시성의 극단은 맹신으로 이어집니다. 군중은 증거와 논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지도자가 제공하는 단순하고 확고한 신념을 절대적인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이 맹신은 종교적 광신처럼 강력하여, 어떤 반박이나 이성적인 증거도 그들의 확신을 흔들 수 없습니다.


​익명성과 몰개성화(책임감의 해방)

​군중이 보이는 가장 위험한 특성은 바로 책임감의 상실입니다. 심리학자 필립 짐바르도(Phillip Zimbardo)는 스탠퍼드 교도소 실험 등을 통해 몰개성화(Deindividuation) 개념을 정립했습니다. 군중 속의 개인은 자신이 익명으로 존재한다고 느끼는 순간, 평소에는 억누르던 본능과 폭력성을 마음껏 발산합니다.


​"나만 이러는 게 아니야," "모두가 같이 하는 일이야"라는 생각은 죄책감을 희석시키고, 처벌받지 않을 것이라는 무소불위의 환상을 심어줍니다. 이 상태에서 군중은 고도의 전문 지식이나 논리가 필요한 행동은 절대 하지 못하지만, 폭동이나 파괴 같은 가장 충동적이고 원시적인 행동은 오히려 더 잘 수행합니다.


​현대의 군중: 사이버 공간 속의 익명성과 폭력성

​르 봉의 군중 심리는 19세기 말에 쓰였지만, 사이버 공간이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더욱 강력하게 재현되고 있습니다. 익명성이라는 최고의 방패를 갖춘 '사이버 군중'은 오프라인 군중보다 훨씬 빠르게 형성되고, 더 높은 수위의 충동성과 폭력성을 드러냅니다.


​댓글 문화, 집단적인 악플, '좌표 찍기'와 같은 행동은 몰개성화와 피암시성이 디지털 시대에 얼마나 쉽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들은 독립된 개인이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을, 집단이라는 미명 하에 스스럼없이 자행하며 공론장 자체를 위협합니다.


​신화와 군중의 충돌: 문명을 뒤흔든 비이성적 사건

​상상의 질서가 광기로 변질되는 메커니즘

​이제 ​<호모 사피엔스의 DNA: '허구'가 낳은 집단 협력 능력>의 '허구의 힘'과 <개인의 이성이 말살되는 순간: 군중의 탄생과 특성>의 '군중의 비이성'을 결합해 봅시다. 인류를 결속시킨 신화(상상의 질서)가 군중 심리를 만나는 순간, 그것은 광신(Fanaticism)과 폭력성이라는 파괴적인 힘으로 변질됩니다.


​원래 신화는 협력을 위한 도구였지만, 군중의 피암시성과 단순 명료함의 추구를 만나면 '우리 신화 vs 저들의 신화'라는 극단적인 이분법으로 프레이밍됩니다. 군중은 복잡한 진실을 숙고하지 않고, 지도자가 제공하는 '단순하고 명확한 적' 개념을 즉시 수용합니다.


​신화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행동은, 군중의 익명성과 폭력성이라는 도구를 만나 집단적인 박해와 학살로 이어집니다. 군중은 자신들의 폭력 행위가 '정의롭고 신성한 의무'라는 집단적 환상 속에서 도덕적 책임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희생을 감수하는 영웅적 행동으로 여깁니다.


​역사적 광신과 비이성적 집단 행동의 사례 강화

​종교 전쟁과 십자군 원정: 신념의 폭주

​중세의 십자군 원정은 군중 심리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종교적 신화(상상의 질서)는 군중의 피암시성을 자극했고, 수많은 농민과 기사들이 비이성적인 열광 속에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르 봉이 말한 대로 '가장 단순하고 과장된 감정'에 휩쓸려, 수많은 도시에서 무차별적인 학살과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그들에게 이는 악행이 아니라, 신에게 헌신하는 신성한 행위였으며, 몰개성화된 군중 속에서 책임감은 사라졌습니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부상: 확신과 반복의 마법

​히틀러와 무솔리니 같은 독재자들은 르 봉의 군중 심리를 교과서처럼 활용했습니다. 그들은 복잡한 정치 이념 대신 '우월한 게르만 민족', '위대한 로마의 재건'이라는 단순하고 강력한 신화(상상의 질서)를 끊임없이 확언하고 반복했습니다.


​대중은 경제적 어려움과 패전의 상실감(지정학적 압박) 속에서 시스템 1(감정)에 의존하며, 이 단순 명료한 신화를 맹신했습니다. 히틀러의 열광적인 연설은 군중의 피암시성을 극대화했고, 유대인이라는 '명확한 적'을 제시함으로써 비난 본능을 폭발시켰습니다. 집단적인 광기는 결국 역사상 가장 비이성적인 대량 학살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야기'의 힘에 대한 냉철한 성찰

​결국, 인류 문명은 '이야기'로 세워졌지만, 그 이야기에 휩쓸린 '군중'으로 인해 무너질 위험을 상시 내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랑하는 문명의 기초인 신념, 국가, 돈은 모두 허구의 산물이지만, 이 허구의 힘이 비이성적인 군중 심리와 결합할 때, 인류 스스로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됩니다. 이 위험을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집단 본능에 대한 냉철한 성찰입니다.


​집단 본능을 극복하고 주체적인 개인으로 남는 법

​자, 이제 인류 집단성의 양면성에 대한 긴 해부가 끝났습니다. 우리는 『사피엔스』 덕분에 집단 협력 능력이 우리의 생존을 담보했음을 알지만, 『군중 심리』 덕분에 그 협력의 과정이 얼마나 쉽게 광기로 변질될 수 있는지도 깨달았습니다.


​당신은 군중 속에 던져진 채 이성을 유지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어책은 '집단 정신'의 스위치를 의식적으로 끄는 것입니다.

​첫째, 당신의 믿음을 의심하십시오. 당신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믿는 국가, 종교, 이념이 혹시 누군가 지어낸 '허구의 질서'가 아닌지 시스템 2를 동원해 점검해야 합니다.

​둘째, 단순 명료한 구호를 경계하십시오. 복잡한 세상의 문제를 '선과 악', '우리 편과 저들 편'으로 나누는 단순한 구호 앞에서 멈춰 서서, '나는 지금 감정에 휩쓸리고 있는가?'라고 스스로 질문해야 합니다.

​셋째, 익명성 뒤에 숨지 마십시오. 사이버 공간이든 현실의 군중이든, 당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는 순간 당신은 비로소 주체적인 개인이 될 수 있습니다.


​냉철한 인식과 끊임없는 자기 점검만이, 인류를 구원한 '이야기'의 힘이 당신을 집어삼키는 것을 막아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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