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문헌정보실, 통로 쪽 자리에 앉으면 사람들의 발소리가 배경음악처럼 흐른다. 나는 방금 서가에서 무작위로, 혹은 어떤 보이지 않는 이끌림에 의해 선택한 네 권의 책을 책상 위에 나란히 놓았다. 낮 12시 20분. 점심시간의 활기가 복도 너머에서 일렁이지만, 이곳의 시계는 조금 느리게 흐르는 듯하다.
책상 위에 놓인 책들의 면면을 살핀다. 안미선의 에세이 『집이 거울이 될 때』, 이열의 사진집 『느린 인간』, 이동순의 산문집 『그간 격조했습니다』, 그리고 2024년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익숙한 이름은 대상 수상작인 「일러두기」를 쓴 조경란 작가뿐이다. 나머지 셋은 내게 완벽한 타인이다. 하지만 도서관이라는 공간에서 낯선 저자를 만나는 일은, 예약되지 않은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설렘과 닮아 있다.
첫 번째 조우: 거울과 집, 그리고 안미선
먼저 안미선의 문장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집이 거울이 될 때』라는 제목이 마음의 벽에 툭 걸린다. 집은 우리가 모든 경계심을 내려놓는 공간이자, 동시에 우리의 내면이 고스란히 투영되는 거울이다. 저자는 집이라는 안식처를 통해 어떤 자기 고백을 준비했을까.
낯선 저자의 에세이를 읽는다는 건, 타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은밀한 행위가 아니라 그가 닦아놓은 창을 통해 세상을 다시 보는 일이다. "안미선이 말하는 '집'은 아마도 벽돌로 쌓은 건물이 아니라, 지친 사유가 비로소 닻을 내리는 내밀한 영토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문장 사이에서 나의 집, 나의 거울을 비춰본다." 첫 페이지를 넘길 때의 그 사각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선명하다.
두 번째 조우: 멈춰 선 시간, 이열의 사진
이어 펼친 것은 이열의 사진집 『느린 인간』이다. 활자로 가득 찬 세상에서 잠시 눈을 씻어내기에 사진집만큼 좋은 것은 없다. '느린 인간'이라는 제목이 통로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과 대비된다.
사진은 찰나를 박제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박제된 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게 한다. 이열 작가가 포착한 흑백 혹은 채도 낮은 풍경 속에는 효율과 속도를 최고의 가치로 치는 세상에 대한 조용한 저항이 담겨 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의 호흡, 빛을 기다리는 인내. 그 '느림'의 미학이 사진집의 여백을 통해 내게 전해진다. 나는 잠시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고, 사진 속 고요에 귀를 기울인다.
세 번째 조우: 예의 바른 인사, 이동순의 산문
세 번째 책은 이동순의 『그간 격조했습니다』이다. 제목부터가 정중하다. '격조(隔阻)'라는 단어는 요즘 참 듣기 힘든 말이다. 멀리 떨어져 있어 소식이 막혔음을 뜻하면서도, 그 안에 상대에 대한 예우를 담고 있다.
이동순이라는 낯선 이가 건네는 이 인사는, 마치 오래된 찻잔에서 올라오는 은은한 김처럼 따스하다. 그가 건네는 산문들은 아마도 잊혀가는 것들에 대한 기록이거나, 세월의 뒤안길에서 건져 올린 소중한 조각들일 것이다. "그간 격조했습니다"라고 내게 말을 거는 저자의 목소리를 따라가다 보니, 나 역시 잊고 지냈던 누군가에게 편지 한 통 쓰고 싶어진다.
네 번째 조우: 견고한 신뢰, 조경란의 일러두기
마지막으로 손에 든 것은 제47회 이상문학상 작품집이다. 이미 검증된 작가 조경란의 이름이 주는 편안함이 있다. 그의 대상 수상작 「일러두기」는 제목부터가 문학적이다. 어떤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혹은 관계를 맺기 전 우리가 미리 알아두어야 할 규칙들.
조경란은 세밀한 묘사와 서사를 통해 인간 관계의 미묘한 틈새를 파고든다. 아는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은 오랜 친구를 만나는 것과 같아서, 그의 문법과 호흡이 익숙하게 느껴진다. 앞서 만난 세 명의 낯선 이들이 준 신선함과는 또 다른, 묵직한 안도감이 전해진다.
낯섦이 선물이 되는 오후
네 권의 책을 무릎 위에 쌓아본다. 한 시간 전만 해도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던 이름들이 이제는 각자의 향기를 지닌 존재로 다가온다. 안미선의 따뜻한 거울, 이열의 느릿한 시선, 이동순의 정중한 인사, 그리고 조경란의 정교한 설계.
도서관 서가에서 책을 고르는 행위는 어쩌면 운명을 점치는 일과 비슷하다. 내가 오늘 이 네 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낮 12시 20분에 시작된 이 조그만 여행은 오후 2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 역시 이와 다르지 않다. 낯선 생각들을 불러 모아 자리에 앉히고, 그들에게 이름을 붙여주고,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과정. 나는 오늘 도서관의 통로 쪽 자리에서 낯선 이들과 악수하며, 내 안의 또 다른 문장을 발견한다.
서가를 나설 때, 내 마음의 서재에는 네 개의 이름이 새로이 새겨질 것이다. 낯선 것을 환대할 때 비로소 확장되는 나의 세계. 오늘 오후, 도서관의 빛은 어제보다 조금 더 깊고 그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