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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진 Aug 13. 2024

공정과 상식의 가치: 선언에서 행동으로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


#1.

프리미엄을 얹거나 좋은 시드를 받는 일은 없다. 금메달리스트라도 바닥부터 박박 기어 올라가야 하는 시스템. 경쟁이란 이런 것이다. 평평한 운동장에서 함께 뒹굴며 꿈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스포츠 정신 아닌가. 오로지 실력에 따라 평가받는 무대. 그곳에 당당히 서기 위해 해마다 선수들이 피땀을 흘리는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쟁은 의미 없다.



#2

공정과 상식의 가치를 재삼 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 둘은 구성체 안정과 발전의 밑그림이자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쌍두마차의 양 바퀴와 같다. 만일 그중 하나라도 삐걱거리면 전체적인 균형이 흐트러져. 정상 주행은 물 건너간다. 공정은 공평하고 올바름을 의미한다. 공평하고 올바르지 못하면 구성원들의 이반이 격화되고 넓게는 국민적 신뢰를 얻지 못한다. 근대사회는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주춧돌 위에 세워졌다. 근간은 법치주의다. 법치주의가 무너진 세상에서 명예니 장래니 하는 것들은 죄다 그악스러운 허명이다. 갈지자로 휘청이는 망조다. 상식적인 판단과 공정한 집행의 원리부터 바로 세울 일이다.



#3

겉으로 하는 말과 속마음이 다르면 얼마나 답답할까? 당사자는 아니다. 의사표현을 해야 할 때 하지 않는 것보다 의견을 냈는데 그게 본심과 다른 경우 상대방이 느끼는 곤혹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선거를 예로 들어보자. 2016년 미 대선에서 제45대 대통령으로 트럼프가 당선됐다. 하지만 투표 전날까지도 트럼프가 당선되리라고 본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선거 기간 내내 트럼프는 일국의 지도자가 될 자질이나 안정감을 보여주지 못했다. 국수주의를 부추기는 공약에, 틈만 나면 분열을 조장하는 발언으로 트럼프는 시민 다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정치인답지 않게 시원시원하다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당락을 좌우할 요소는 아니었다. 결과는 정치 경험은 물론 정치적 시각에서 월등히 앞선 힐러리의 사실상 완패. 밤사이 어떤 일이 있었을까? 그때만큼 “샤이 트럼프”에 경악한 적이 또 있었을까 싶다.



#4

그날 트럼프를 지지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은 흑인 비하 단어인 ‘니그로’를 자주 검색하던 인종주의자였다. 특히 트럼프 지지율이 높은 지역에서 니그로 검색량이 가장 많았다는 사실에 주목하자. 그들은 여론조사에서나 친구에게 자신이 흑인을 혐오하며 트럼프를 지지한다고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기표 용지만 달랑 앞에 둔 투표장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사실 2016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 지지자라고 하면 ‘저학력자’에 ‘인종차별주의자’라는 썩 좋지 않은 이미지가 있었다. 샤이 트럼프가 자심들의 성향을 밝히기 어려운 분위기였다고 보면 된다. 이후 샤이 트럼프는 정치권에서 여러 용도로 변주되었다.



#5

오늘 대한민국은 보수와 진보가 둘로 나뉘어 극한 대치 중이다. 어느 한쪽 양보할 태세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산물인 타협과 설득의 정신은 온데간데없다. 수적 우위를 앞세워 상대를 겁박하거나 확인되지 않은 뉴스를 정쟁의 도구로 삼는 일이 횡행한다. 몽니도 이런 몽니가 없다. 그런데 우습다. 몽니는 수적으로 적은 쪽에서 부리는 심술 같은 것이다. 그런 몽니를 일단 수적 우위에 선 그들이 부리고 있으니 그들 스스로도 멋쩍거나 한심스럽게 보이지 않았을까? 이에 화답하기라도 하듯 국민이 그들에게 형편없는 지지를 보냈다. 반성의 기미라도 있는 위인들이라면 예서 멈췄겠지만, 마치 대열에 들어선 군대처럼 앞만 향해 달리고 있다. 대체 그 끝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샤이 트럼프: 숨은 욕망이 드러날 때가 가장 크게 위험
폭주하는 기관차에 강도가 올라탄 형국이라면 앞날을 누구도 장담할 수 없어


대선 불복


#6

2024년 이 땅에선 “브래쉬(brash) 트럼프”가 창궐한 모양새다. “브래쉬”는 “샤이”와는 정반대의 형용사다. “지나치게 야단스러운” 정도로 번역하면 맞을 듯하다. 그해 미 대선에선 속마음과 다른 말을 하는 엘리트들에 신물 난 유권자들이 많았다. 옳은 말만 떠벌리는 앵무새들에게서 국민은 감동하지 못했다. 다시 그런 자들을 권좌에 앉히면 그들은 전례대로 유권자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일을 할 것이었다. 다른 말로 2016년 미 대선은 엘리트들을 단죄하자는 선거였다고 할 수 있다. 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트럼프가 유권자들에게 얼마나 속 시원하게 보였을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러스트 벨트 지역이 전통적인 공화당 지지에서 민주당 지지로 돌아선 것만 봐도 당시 반 엘리트주의가 얼마나 강했는지 짐작가능하다. 샤이 트럼프가 저변을 늘려갈 구석이 많았던 해였다. 인종차별주의자에 저학력자들이라는 꼬리표를 드러낼 순 없지만, 세상을 바꿔보고 싶었던 그들. 바람은 그것으로 끝났지만 말이다.



#7

정정당당한 경쟁을 관두고 손쉽게 승리를 얻는 방법에 어떤 것이 있을까? 상대를 악마화해서 끌어내리면 된다. 가까운 과거에 경험까지 있고 보면 가장 손쉬운 게 그것 말고 더 있겠나 싶다. 같은 생각은 조급증을 불러일으킨다. 자신들이 직면한 낮은 지지율은 썩 내키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쌍수 들어 자신들을 지지하는 브래쉬 트럼프를 보면 금세 화색이 돌 만하다. 특이한 점은 그들 브래쉬가 자신들의 정체를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샤이 트럼프들의 반 엘리트주의 같은 의식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모습을 드러낼 뿐 아니라 시대정신은 고사하고 인물을 가릴 만한 능력조차 없이 부유한다. 대체 무엇을 위해, 어떤 가치를 위해 헌신하는지 알 수 없다. 유력 정치인에 기대어 몸집을 불리려는 욕망만 번뜩인다. 그 반대는 물론 더 가관이다. 한탕주의의 전형적인 행태를 이보다 더 짜릿하게 재현할 수 있을까?



#8

전 구글 데이터과학자인 세스 스티븐스 다비도위츠는 《모두 거짓말을 한다》에서 인간 본성의 충격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결론은 겉으로 뱉은 말로는 그 사람을 알 수 없다는 것. 사람은 자기 자신을 속이는 데조차 능수능란한 존재라는 것. 그렇다면 속마을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사람들은 타인에게 하지 않는 이야기를 각종 검색엔진에 한다. 다비도위츠는 바로 그 검색엔진에 탑재된 검색 데이터로 인간 본성에 숨은 욕망과 생각을 찾아냈다. 구글에 드러난 결혼생활의 가장 큰 불만은 사랑 없는 결혼 생활이라거나 불행한 결혼생활이 아니다. 섹스 없는 결혼 생활이다. 상대에 대한 가장 큰 불만에서도 성관계를 하지 않는 배우자에 대한 불만이 수위를 차지했다. 대화하지 않는 배우자에 대한 불만은 순위를 다투지도 못했다.




#9

어느 골짜기 사람들의 상식적이지 않은 말이 몇 번 포착되었다. “우린 될 사람에게 투표한다”는 그 말. 얼마나 대담한 욕망인가? 믿어도 될 정도로 자신 있지 않고는 누구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지 못한다. 반대로 그런 속마음을 드러낸다는 건 상대를 만만하게 보았을 때나 가능하다. “우린 될 사람에게 투표한다”는 말은 자신들이 택한 자가 무슨 흠이나 자격이 있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다. 될 사람이면 앞뒤 가리지 않고 지지하겠다니 막말로는 가위 최상급이다. 예를 들어 범죄자, 사기꾼이 판에 등장해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자가 번듯이 배지를 달고 대한민국을 흔들어도 모르쇠로 일관하겠다는 것이다. 조건은 단 하나. 자신들 앞에 벌벌 기는 정치인이라면 그가 누구라도 협력하겠다는 것이다. 노골적인 추파이자 야합이다. 몰염치가 이 정도라면 그들이 대한민국의 일원인지부터 의심해 봐야 하지 않을까?



#10

욕망은 종종 몇 푼의 돈(어떤 공적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유공자 등록에서 나오는 돈)과 보잘것없는 권력(예를 들면 옛날 면장 같은)에 찰떡같이 들러붙는다. 기왕에 쥐고 있던 떡-제 떡이 아닌-을 앗아가지 않기를 바라는 물욕, 언제든 판을 좌우해서 자자손손 생식 공간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오늘 우리가 처한 현실이다. “될 사람이라면 그가 누구든 밀겠다”는 말에 숨은 가없는 폭력과 인질극에 대한민국이 단단히 잡혔다. 이를 개탄하는 사람마저 별로 보지 못했다.



#11

검색 데이터를 통하지 않아도 어떤 사람의 욕망을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는 걸 다비도위츠가 몰랐던 듯하다. 드러난 욕망은 숨겨진 욕망에 비교할 바 아니다. 그 실체를 우린 유력 정치인, 브래쉬 트럼프, 어느 골짜기 사람들에게서 마주하고 있다. 숨은 욕망은 2020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가 패하자, 지지자들이 의회에 난입하는 정도(?)에 그쳤다. 노골적으로 표출된 욕망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다. 민주주의 심장부가 재차 유린당하는 꼴은 이미 여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다. 남은 건? 지금부터라도 방도를 찾아야 한다. 방관하는 사이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흐른다. 그때 가서 우왕좌왕해 봐야 소용없다.



#12

정정당당한 경쟁이 사라진 곳에 선동이 무성하다. 불공정과 몰상식에 덤덤해지는 것부터 예사롭지 않다. 냉소주의를 부추겨 자기들 맘대로 구워삶으려는 것이나 욕망을 노골화해 자신들 외엔 어느 누구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는 것이나 궁극적으로 그들이 의도한 바에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정치인에게 요구되던 도덕률이 거의 땅에 떨어진 것에서 우린 그 의도를 넉넉히 보았다. 아찔한 장면은 따로 있다. 이대로 가다간 대한민국 어디든 거덜 나게 생겼다는 것.



트럼프 지지자들의 의회 난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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