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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말을 걸어올 때

by 콩코드


책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소리 내지 않은 목소리로, 하지만 분명하게.


누군가의 눈으로 쓴 문장이 마음에 부딪히고, 문득 숨을 멈추게 만든다. 무심코 넘기던 페이지 위에서 ‘지금 나에게 필요한 말’을 마주칠 때, 우리는 그것이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책은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날따라 달리 보이는 이유는 내가 변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는 회피할 수 없는 질문 앞에 서 있거나, 우리에게 누군가의 말보다 더 조용한 위로가 필요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책은 때를 알아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준비된 독자에게, 혹은 상처 입은 독자에게.


읽는다는 건 결국 자신을 향한 어떤 응답이다. 작가는 묻고, 독자는 답하며, 그 사이 어딘가에서 문장이 살아 움직인다. 책이 말을 걸어올 때 우리는 멈추고, 곱씹고, 조용히 되묻는다. “이 문장은 나를 향한 것일까?”


그리고 대답은 대개, “그렇다” 쪽에 더 가까운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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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무심코 책장에 꽂힌 산문 한 권을 꺼냈다. 이석원의 『언제 들어도 좋은 말』. 그 책은 몇 해 전 한 친구가 내게 건넨 것이었다. “지금 읽지 않아도 돼. 언젠가 네가 필요할 때 펼쳐보면 돼.” 그 말대로 나는 몇 년 동안 그 책을 읽지 않았다. 그렇게 묵혀 두었던 책이,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눈에 들어왔다. 이유는 없었다. 어딘가에서 속삭이듯 말이 들리는 것만 같았다.


책을 펼쳐 몇 페이지 넘기지 않아, 나는 한 문장에서 멈춰 섰다.


"나 자신을 가꾸는 일이 소중한 이유는 그 일을 함으로써 나와 내 삶이 아직 결론 나지 않았다는 걸 스스로 믿고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는 게 앞으로 가는 건지는 몰라도, 맞는 길로 가고 있는지 확신할 수는 없어도, 적어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느낌. 그런 느낌을 가질 수만 있다면 하다못해 살이라도 몇 킬로 빼면서 살아가고 싶다. 그게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 해도, 그런 작은 변화의 여지라도 있어 내 남은 생이, 내 몸과 마음이 이대로 정해져 버리는 것을 막을 수만 있다면 나는 노력할 거다. 언제까지고 결정되지 않을 삶을 위하여."


정확히 그 말이었다. 그동안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조급함, 반짝이는 삶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자책, 그런 마음에 눌려 스스로를 비워가던 내게 이 문장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걸어왔다. 반짝이지 않아도 괜찮다고, 지금 이 시간이 언젠가의 길을 위한 준비라는 것을, 결국은 그 길로 접어들 거라는 걸.


그 문장을 만난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책은 지금의 나에게로 온 것이라는 걸. 그 말이 내게 필요했기에, 내가 그 말을 들을 수 있었기에, 책은 마침내 내게 말을 걸 수 있었던 것이다.


책이 말을 걸어온다는 건 그런 것이다. 책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우리가 책의 말을 듣게 되는 데에는 얼마간 타이밍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에게는 스쳐 지나갈 문장이 다른 어떤 사람에게는 오래 기억될 말이 된다. 그렇듯 책이 말을 건다는 건, 우리가 그 말에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일어나는 조용한 기적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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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순간, 그 순간은 단순히 글자의 나열에 그치지 않고 나를 향한 한 통의 메시지가 된다. 읽는 동안 우리가 겪는 모든 감정의 파도와 마주한 순간의 기적이 책 속에서 펼쳐진다. 책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법을 안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마다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서 조용히 말을 한다.


때때로 책은 우리가 놓친 것들, 지나쳐버린 것들에 대해 몇 번이나 묻기도 한다. 작게 울리든, 크게 울리든, 중요한 건 책이 나에게 말을 걸 때, 나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책의 말을 듣고 있다. 이어 또 다른 책을 펼친다. 계속해서, 끝없이. 한가로이 유영하듯, 인생 항로를 항해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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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