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면 되게 하지 마라
안 되면 되게 하라.
좋은 말인 줄 알았지. 학창 시절까진. 적어도 사회 초년생일 때까지만 해도. 성공하는 사람이라면 기본으로 장착해야 할 ‘금언’이라 여기며 가슴에 새기자 했지.
하지만 저 말은 왜 ‘아랫사람’에게만 적용되는지. 본인은 감당할 수 없으면서 타인에게는 강요하는지. 저 말대로 행동하지 않으면 바로 ‘능력 없는 사람’ 취급하는지.
6월 중순,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아이를 공립유치원에 보내기로 했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무모하게 떠난 미국행이었기에 입학에 필요한 서류를 알아내는 일은 당연 내 몫이었다.
무작정 아이가 다닐 학교를 찾아갔다. 당시 대부분 공립학교는 여름 방학 중이었다. 그래도 행정실은 열겠지 싶어 오피스를 기웃거렸지만 ‘방학답게’ 완벽히 닫혀 있었다. 한국에서는 방학이라도 교무실과 행정실에는 늘 근무자가 있었는데. 역시 남의 나라에 오니 쉬운 게 없다. 대체 방학 때 온 사람은 어디서 정보를 얻어야 한단 말이오.
하지만 사람 사는 게 또 크게 다르지도 않은 법. 학교와 연락이 닿지 않을 땐 교육청에 문의하세요~. 교육청을 통해 입학에 필요한 서류들을 파악했다.
서류를 준비하다가 미국 초등학교는 일 년 동안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궁금증이 생겼다. 학사 일정과 행사는 학교 홈페이지만 봐도 대충 감이 오기 때문에 주소창에 학교를 넣고 홈페이지를 찾았다.
예상대로 홈페이지에는 각종 행사, 시간표 등 학교 전반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들이 올라와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여기라고 뭐 크게 다르겠어.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지 뭐.
근데…
비슷하지 않네?
비슷한 줄 알았는데 비슷하지 않다.
홈페이지의 모든 정보가 2010년에서 멈췄다!!
당시는 2011년이었는데, 홈페이지는 2010년 행사들로 가득했다. 2011년 행사나 정보는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업데이트 제로 상태. 정확히 일 년 전으로 회귀한 건데, 내가 시간 여행을 온 게 아니라면 이게 대체 무슨 일.
개학 후, 학교 측을 통해 답변을 들었다.
“학교 예산이 부족해서 홈페이지 운영할 인력을 채용하지 못했습니다.”
재정난으로 사람을 쓸 수 없어 홈페이지 업데이트가 불가능했다는 것. 당연한 논리 같은데 이상하게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 들었다.
'일 년 내내 업데이트가 안 돼 있는 홈페이지라……. 한국이라면 이건 민원 감이다. 아니 학부모 민원까지 갈 필요도 없어. 관리자 선에서 이미 사달이 났지. 일하던 사람이 나갔다고? 그러면 그 옆 사람, 그 옆에 옆에 사람이라도 끌려가 정비를 했을 거야. 바쁘다고, 내 업무 아니라고, 나도 일이 산더미라고 말해도 소용 없지롱!'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민족의 나라에서 왔더니 ‘일할 사람이 없어 못했다’는 당연한 논리가 신박하게 들렸다.
이 신박한 논리는 개학을 하자 곳곳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학기가 마무리될 즈음, PTA는 큰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PTA = ‘학부모 교사 연합회’라는 우리나라 ‘학부모회’랑 비슷한 개념의 단체. 학교 행사 대부분을 주최하고 진행한다.)
‘학년 말 유종의 미를 거두며 즐겁게 놀고먹자’는 특별한 콘셉트(이 전 행사에서도 대부분 놀고먹었지만)의 행사여서 규모가 꽤 컸다. 팝콘이며 솜사탕, 풍선 아트, 물 풍선 던지기 등 수십 개에 부스가 설치될 예정이었다. 당연히 학부모들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반마다 자원봉사자 신청서가 뿌려졌다.
나 역시 자원봉사에 참여하려고 신청서를 확인했다. 부스 운영 시간은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PTA에서는 <1시-2시, 2시-3시, 3-4시, 4시-5시> 이렇게 시간대별로 일해 줄 봉사자를 찾고 있었다. 가장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영어를 최소한으로 쓸 수 있는) 게임 부스 하나를 골라 <2시-3시>란에 사인했다. 네 시간 내리 일하라면 할까 말까 고민했을 텐데, 한 시간만 일해도 되니 부담이 없었다.
그런데 행사 시작 일주일 전, PTA에서 메일이 왔다.
「행사 부스를 맡아 줄 자원봉사자가 부족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우리 아이들을 위해 신청서에 꼭 사인하세요! 」
내용에서 다급함이 묻어났다. 생각보다 적은 인원이 자원봉사를 신청했는지 그 뒤로도 한 번 더 간곡한 독촉 메일이 왔다. 행사 규모가 크다 보니 이번엔 인력난이 심각했다.
행사 전날까지 이 문제로 메일이 날아왔다. 결국 몇몇 부스는 마지막까지 봉사자를 채우지 못했다. 예를 들면 <1시-2시>는 일할 사람이 있는데, <2시-3시>는 없고, 다시 <3시-4시>는 신청자가 있지만, <4시-5시>는 비어있는. 숭숭 구멍 뚫린 부스들이 여기저기 발생했다.
내일이면 당장 축제가 시작된다. 과연 봉사자가 없는 시간대의 부스는 어떻게 운영될 것인가. 궁금했다. 이들은 이런 갈등을 어떻게 풀어나갈지.
PTA는 ‘가장 간단하고 상식적이며 모두가 얼굴을 붉히지 않는 방법’을 선택했다.
『부스를…
그냥…
닫았다.』
일할 사람이 없는 시간대에는 잠시 부스를 닫아 놓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
“봉사자가 없어서 잠시 문을 닫습니다.”
이 단순한 해법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만약 한국에서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일할 사람이 없어 운영을 못한다는 당연한 논리가 통했을까? 절대 No, No다. 솜사탕 부스는 결코 문을 닫을 리 없다. 행사와 상관없을지라도, ‘을’로 보이는, 만만한 누군가가 그 일을 떠맡게 될 확률이 99%겠지.
아니면 반 대표 어머님 몇 분이 빈자리를 메우느라 애를 먹을지도 모른다.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봉사지만, 무거운 짐을 독박 쓰는 기분에 얼굴이 붉어질 수도 있다. 그러다 보면 ‘다시는 학교 일에 손대지 말아야지’란 결론에 이른다.
축제는 별 탈 없이 진행됐다. 몇몇 부스가 잠깐씩 문을 닫았지만 행사에 지장은 없었다. 하긴 부스 좀 닫았다고 무슨 그리 대단한 사건이 터지겠는가. 솜사탕 없다고 혈당 떨어지거나 물 풍선 던지기 중단했다고 우울증에 걸리는 아이는 없을 테니.
이들은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려 애쓰지 않았다. 감당할 만큼만 했다. 앞 시간에 봉사한 사람에게 '한 시간만 더 일할 수 없냐'라고 강요 같은 부탁을 하지도 않았다.
한국 사람은 화가 많다고 했던가. 하지만 안 되는 걸 어떻게든 되게 하라고 매사 강요받는다면. 힘없는 누군가에게 그 일이 전가된다면. 그래서 늘 가진 에너지 전부를 토해내야 한다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