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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Dec 01. 2021

회의실 1201


지난밤 잠자리에 들 땐 사나운 바람 소리에 놀라 괜히 이불속에서 몸을 움츠렸으면서, 아침이 오자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두 팔과 두 다리를 사정없이 뻗으며 눈을 뜨는 꼴이란. 한껏 데워진 이불을 걷어내고 몸을 굴려 침대 밖으로 빠져나온 E는 커튼을 걷어 젖힌 후 이불을 정리했다. 그 후 탁상 위 시계를 흘끔 쳐다보고선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서둘러 출근 준비를 마친 E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확인한 뒤 식탁 위에 있던 토마토를 입에 넣고 현관문을 열었다. 아차, 신발장 옆에 세워 둔 가방도 챙겨서.


 현관문을 열자 기다란 복도가 이어졌다. 입에 넣은 토마토를 오물오물 씹으며 몇 걸음 걷자 308호에서 나오는 A가 보였다. 토마토가 입 안 가득한지라 E는 팔을 위로 쭉 뻗어 손을 세차게 흔들었다. E를 발견한 A도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 A의 볼이 빵빵한 것이 입 안 가득 무엇이 있는  분명했다. 그 둘은 복도 끝에 있는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위로 올라가는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두 번째 엘리베이터가 그들 앞에서 문을 열었다. 이미 엘리베이터 안은 찼지만, 다행히 E와 A가 끼어들만한 여유는 있었다. 가득 차 버린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고 이참에 그 둘은 입에 가득 든 아침 식사를 방해 없이 해결할 수 있었다.


 몇몇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닫히더니 곧 12층에 다다랐다. 문이 열리자 E와 A는 서둘러 내려 '1201'이라고 쓰여있는 회의실로 곧장 들어갔다. 회의실은 곧 시작하게 될 회의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이들로 채워져 있었고, E와 A는 빈자리에 앉아 함께 회의를 준비했다. 5분 정도 지나자 회의실은 차분해졌고 회의 주최자로 보이는 Z가 입을 열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의 아침 인사에 모두들 서로를 보고 인사를 했다. 그리고 Z는 자신의 노트 맨 첫 줄에 쓰여있는 것을 차분히 읽으며 회의를 시작했다.


 "'12월 1일, 2021년의 마지막 달'이라고 제 노트에 쓰여 있네요. 이 방에 들어올 때 다들 인지 하셨겠지만 말이에요. 오늘은 12월의 첫날이자 올해의 마지막 달의 시작점이므로 월간 계획과 더불어 2022년 준비 계획을 세우도록 하겠습니다. 자유롭게 의견 주시죠."


 Z의 맞은편에 앉은 R이 손을 들었다. 깔끔한 외모에 깔끔한 일처리로 Z의 신임을 받고 있는 R은 Z가 고개를 끄덕이자 들었던 손을 내리며 자신의 앞머리를 살짝 뒤로 넘기는 효율적인 동선을 보임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제일 중요한 건 '새해 다이어리'입니다. 우리의 '얼'이 어제 서점에 가서, 본인이 고민하고 있는 두 브랜드 중 하나의 다이어리를 직접 보고 왔습니다. 직접 보고 나니 얼이 꽤 흡족해하더군요. 12월이 되었으니 이제는 결제를 해주셔야 할 듯합니다."


 R의 말에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의 표현을 하던 찰나, L이 반론을 제시했다.


 "얼이 꽤 흡족해한 것은 인정합니다만, 제 생각엔 얼이 흡족해한 부분은 다이어리를 '직접 봤다'는 부분이지 다이어리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만약 정말 마음에 들었다면 얼이 그 자리에서 바로 결제를 했어야 하는 게 아닐까요?"


 L의 말을 듣자 좀 전에 고개를 끄덕였던 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선 일제히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R은 예상했다는 듯이 다시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L의 의견에 충분히 동감합니다. 얼은 흡족해하는 그 순간까지도 계속 고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직접 본 다이어리가 얼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든 것은 사실이나, 그와 동시에 그 서점에선 볼 수 없는 또 다른 다이어리, 얼의 마음속 서열 2위 다이어리가 발목을 붙잡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 다른 브랜드의 다이어리는 인터넷으로 구입하여 배송받아 볼 때까진 실물을 볼 수는 없죠."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이 된다는 건 아주 큰 의미가 숨겨져 있다는 겁니다."


 R과 L의 말에 모두 일리가 있었다. 이렇게 끝나지 않는 고민을 매일 품고만 있다간 12월이 다 지나가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얼의 선택지에 있는 두 브랜드는 각각의 매력이 있었다. 두 번째로 마음이 간 브랜드의 다이어리는 커버나 내지가 매우 마음에 들었으나 그것은 2021년도 버전일 뿐, 2022년도 버전이 얼이 본 것과 상이하다는 사실이 다이어리 결정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R의 의견에 따라 더 이상 고민하지 말고 얼이 처음에 사고 싶어 했던, 어제 실제로 본 다이어리를 주문하는 게 모두에게 편한 일이 될 것임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두 번째 브랜드의 다이어리는 그 다이어리를 만든 기업의 방향성이나 추구하는 가치가 마음에 들기 때문에 쉽사리 포기가 안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누군가 3안을 가지고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3안이 지금까지의 고민을 깨끗하게 정리해줄지, 아니면 더 복잡하게 만들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일단 누군가는 제시해봐야만 그 뒷일을 알 수 있기에 그 3안을 가지고 온 멤버가 있는지, 3안이라는 게 정말 있는 건지 확인하려고 힐끔힐끔 서로를 쳐다보는 눈동자들만 회의실 안을 방황하고 있었다.


 "저…, "


 E가 정적을 뚫고 입을 열자 회의실에 있던 모든 눈동자들이 일제히 E를 향했다. 그리고는 '네가 3안을 가져왔길 바라'라는 눈빛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상황인가.


 "제 생각엔 지금 고민하고 있는 두 개의 다이어리는 얼의 마음에 100 퍼센트 차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타 부서에선 100 퍼센트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을 만나기란 '하늘의 별 따기', '상상으로 세운 이상', '네가 만들어라' 등으로 반응하겠지만요. 그렇지만, 매년 우리는 얼의 마음에 쏙 드는 다이어리를 결정해왔습니다."


 E의 말에 모두 '그건 그렇지', '실패한 적은 딱히 없었던 것 같아', '매년 만족스러웠지' 등의 동의의 표현을 하며 자부심 어린 표정까지 지었다. 그들의 반응을 살핀 E는 계속 말을 이었다.


 "얼의 2022년 다이어리 선정은 굉장히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새로운 삶의 양식이 시작되기도 했고, 다이어리를 이젠 더 이상 일처리 리스트 정도로 사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니까요. 그래서 이번에는 얼의 생애 첫 다이어리 브랜드 제품을 찾아보는 것이 어떨까요?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에서요."


 회의실에 앉은 이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지금까지 했던 고민을 수포로 만들고 싶지 않다는 쪽과 어쩌면 더 나은 다이어리를 찾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는 쪽, 이렇게까지 다이어리를 고민해야 한다면 차라리 쓰지 말자는 쪽(물론 이건 홧김에 한 말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E의 옆에서 노트북을 연신 두드려대던 A가 손을 들어 그들의 웅성거림을 중단시켰다.


 "아, 제가 E의 의견을 듣고 바로 그 첫 다이어리의 브랜드 사이트에 들어가 봤습니다. 물론 얼마 전에 우리가 이 브랜드도 조사를 했던 건 기억합니다만, 혼란스러웠던 고민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이 시점에 보니 선택의 기준이 재 정렬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이 브랜드의 다이어리가 1안과 2안을 적절히 섞은 3안이 될 수 있을 듯합니다."


 A는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한쪽 벽에 빔 프로젝터로 자신의 노트북 화면을 띄웠다. 그리고 모두 함께 3안 다이어리 브랜드 제품 탐험을 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만족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물론 얼의 요구사항을 다 넣은 다이어리는 직접 만들기 전까진 세상에 없겠지만, 1안과 2안에 대한 고민을 싹 날려버릴 만한 3안이었다. 이제는 3안 브랜드 제품 중 몇 가지를 추려 얼에게 결재 서류를 올리기만 하면 되었다.


 회의실 안은 갑자기 축제 분위기로 바뀌었다. 누군가는 첫 다이어리의 기억을 소환하여 왔고, 또 누군가는 '얼의 10대 후반 시절 다이어리 작성법'에 대해 논평을 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2022년 다이어리 결정'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고 있었다. 시끌벅적한 시간이 잠시 지나가자 Z가 회의를 마무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견을 내준 E, A, R, L과 회의에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12월 1일, 우리의 흡족한 회의 내용을 얼에게 전달하여 결재를 받도록 하겠습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박수와 함께 1201의 회의는 종료되었다. 월간 계획이나 22년도 준비 계획 따위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3안 다이어리 브랜드에서 적절한 크기와 내지를 갖춘 다이어리를 선택하여 보고하는 일은 E, A, R, L에게 맡겨졌다. Z는 웬만하면 '12월의 첫날', '2021년의 마지막 달을 시작하는 오늘' 내로 보고서를 제출해달라며 회의실에서 나갔다.


 회의실 문이 닫히자마자 E는 12월의 첫날이라고 이렇게 의미를 부여할 것 같으면 1년 365일, 매일 맞이하는 하루에 의미 부여하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A, R, L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그래도 어려웠던 숙제는 거의 완료되었다.





다이어리가 뭐라고.

생각많은얼룩말, 얼(Earl) 작가

다이어리 때문에 하루 종일 고민하다가 쓴 다이어리 선택기(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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