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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호리 Apr 27. 2022

맥주! 나의 애주가(愛酒歌)

관자놀이의 쾌락를 위해 건배

나의 애주가(愛酒歌)

본격적으로 맥주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둘째 아이를 낳은 이후였던 것 같다.


아내와 고된 육아를 마치고 아이들이 잠에 들면, 우리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간단한 야식에 맥주를 마시곤 했다. 마침 편의점에서는 수입맥주 4캔에 만원이라는 파격적인 프로모션이 시작됐고 이런저런 맥주로 세계 여행을 하다가 일본 기린 맥주의 구수함에 반해버렸다.


내 최애 맥주 '기린 이치방 시보리'



맥주에 더욱 빠지게 된 계기는 바로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태엽 감는 새'의 한 구절을 읽고 난 후였다.


하루가 저물 무렵에 마시는 아주 차가운 맥주 한 병은 정말 기가 막힙니다. 이 세상에는 지나치게 차가운 맥주는 맛이 없다고 하는 까다로운 사람도 있습니다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첫병째의 맥주는 맛을 잘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차가운 것이 좋습니다. 두 병째부터는 분명히 적당하게 찬 것이 맛이 있지요. 그러나 맨 처음의 맥주가 얼음처럼 차가워야 한다는 건 나의 취향입니다. 관자놀이가 아플 정도로 차가운 것.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취향이지만요.


글을 읽고 관자놀이가 아픈 충동이 생겼다. 그 후로 '아주 차가운' 술에 매우 집착했다. 주변인들을 대상으로 히야시(冷やし, 차가운) 전도사가 되었다. 나에게 차가운 맥주가 아니면 맥주는 먹을 의미가 없었다.


손도 얼어버릴듯한 기세의 냉맥주


술을 마실 때면 마치 잘 익은 수박이라도 고르는 양 냉장고 안쪽을 뒤져 병을 꺼내고 두 손으로 만져보고 병의 심연에서 올라오는 냉기가 적어도 내 팔꿈치까지 전해지면 그제야 그놈을 먹잇감으로 삼았다.


왼손으로 놈의 목을 잡고 대가리를 힘 있게 따낼 때 '빡'하는 소리와 함께 용이 승천하듯 서릿김이 허옇게 올라오면 뭔가 황홀함과 함께 탁월한 선택을 한 나의 대견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이런 훌륭한 맥주는 아무런 잔에 따라서는 안된다. 적어도 이틀은 냉장고에서 묵힌 차가운 잔으로 그를 맞이해야 한다. 냉장고에서 데려올 때 한기가 잔 주변에서 오로라처럼 감싸돌아야 한다.


그들은 잘 자란 신랑 신부와 같다. 맥주잔이 먼저 공손히 절을 한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엎드린다. 상대의 매너를 확인한 맥주병은 맞절을 하듯 고개를 숙여 머리를 들이밀고 속에 있는 것들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그의 몸안으로 옮긴다.


'이런 나라도.. 괜찮은가요?'


자신을 알아주는 잔을 만난 맥주는 병 주둥이와 부딪히며 우아한 소리와 함께 잔 안을 노랗게 채워나간다. 잔이 반이상 차면 서서히 고개를 들어야 한다. 이때는 속도 조절이 매우 중요하다. 오랫동안 간직했던 수억 개의 탄산 기포들이 잔에 잘 머물 수 있도록 마지막은 조금은 급하게 폭포수처럼 내리 쏟아 잔의 입구를 거친 거품으로 틀어막아야 한다. 잔 아래 깊이 들어갔던 맥주가 바닥을 힘차게 차고 올라와 잔 주둥이를 넘어 몸을 타고 허옇게 흘러내린다. 어느새 서로는 고개를 들어 서로를 마주한다.


'수고했어'


오랜 시간 볕들지 않은 어둡고 칙칙한 영어(囹圄)의 벽에 움츠려 있었던 지니는 자유를 얻어 투명한 잔안에서 금은 보화를 잔뜩 쏟아내고 늠름한 모습으로 잔 옆에 서있다. 병은 식은땀으로 흥건하게 빛난다. 섹시하다.


하얀 거품 진지 아래 채 올라오진 못한 기포들이 삼삼오오 모여 불꽃놀이를 벌이듯 위로 솟구친다.


캠핑할 때도 맥주잔을 따로 챙겨간다.


이제 작품을 내 몸안으로 들일 차례다.


맥주를 마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다. 맥주 위로 떠 있는 거품이 가라앉아 볼품없어지기 전에 입술에 갖다 대야 한다. 입술에서 먼저 얌전한 거품을 느끼고 뒤따라 오는 차갑고 따가운 맥주를 사정없이 끌어들여야 한다.


첫 모금은 맥주의 맛 따위 지나쳐도 된다. 그냥 차가움. 차가움만으로 이미 나는 낙원의 입구로 직행한다. 그래서 첫 모금은 한 입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꿀꺽. 꿀꺽. 꿀꺽' 세 모금이 목구멍 고개를 넘어 들어가야 그제사 한기(寒氣)가 관자놀이에 느껴진다.



'하.... 아'



맥주의 탄성은 소주와 다르다. '캬'가 아니라 '하'다.

소주는 텍스쳐가 부드럽다. 그냥 물과 같은 액체일 뿐이다. 그냥 쓴 화학의 맛이 혀끝을 자극하고 알코올 기운이 목구멍을 뜨겁게 긁어내리기 때문에 입과 목을 가시기 위해 내뱉는 탄성이 나오는 것이다.


반면 맥주는 자글자글한 기포가 혀와 볼, 입천장, 목구멍을 지나 식도 깊은 곳까지를 시원하게 긁어준다. 마치 마사지를 받는 것 같다. 차마 건드리지 못했던 동굴 속을 효자손처럼 쓱쓱 긁어준다.


승리의 기분이다.

기쁨에 도취된 우리는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려 눈을 감고 입을 벌린 채

잔을 들어 그의 공을 치하한다.

마치 트로피를 든 선수처럼 말이다.


연남동 '요코초' 벽에 붙어있던 사카이마사토 기린광고

일본에서는 맥주를 시킬때 '토리아에즈(とりあえず)'라고 이야기 한다. 한국말로 하면 '닥맥(닥치고 일단 맥주)'이다.


처음 맥주를 대할 때는 상대를 살필 겨를이 없다. 목안의 갈증을 먼저 날려 새로운 나를 만들어야 한다. 시원한 황금 성수가 내 몸을 적시고 관자놀이를 때리고 나면, 그제야 상대를 인식하고 마주할 준비가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일단 먼저 한잔하시고..'를 한 후에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두 번째 모금은 건배(乾杯)의 잔이다.  

건배라는 말은 마를 '건(乾)'과 잔 '배(杯)'를 쓴다.

잔을 모두 비우라는 소리다.


거품이나 기포나 맛 따위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상대방과 함께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남은 잔을 비워내면 된다.


먼저 비운 선수는 상대가 건배의 임무를 잘 완수할 수 있도록 예의 있게 기다린다. 그리고 곧 맥주병을 들어 그의 빈 잔을 다시 부드럽게 채운다. 이제부터는 맥주의 맛을 느낄 차례다.


눈내린 홋카이도의 한 이름없는 주점에서..



맥주는 마치 모래시계처럼,

우리 이야기의 분량이 된다.

맥주잔이 채워지는 만큼 우리의 이야기는 많아진다.


어느새 건배는 사라지고 우리는 기포와 함께 춤을 춘다. 맥주가 내 오장육부(五臟六腑)를 돌아 내 피와 섞이고 내 영혼이 된다. 내가 맥주고 맥주가 곧 나이다. 실제로 영혼을 뜻하는 영어단어 'spirit'은 알코올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주로 위스키 같은 양주를 spirits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정신이 아니라는 소리.


그러니 춤출 때 까지는 술을 마시지 말자... 는 것이 오늘의 결론입니다.



토리아에즈(とりあえず)!


나의 맥주 전용잔 '상관없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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