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제나 응급 Apr 01. 2023

S2. 원초적 본능

6. Gain, 선망의 법칙

인간은 개인의 단위부터 국가의 단위까지 무언가를 얻고, 가지고, 소유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갈망한다.

 게다가 내가 소유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 감히 소유할 심적 여유가 있다면, 대상의 가치와 무관하게 끊임없는 욕망을 스스럼없이 드러내곤 한다. 소유욕만큼 모두에게 원초적인 욕구도 흔치 않기 때문에, 다른 욕구들보다 타인의 시선이 너그럽고, 또 이해받기 쉽기도 하다.

 우리는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한 타인을 닮고자 하는데, 이것이 선망이다. 선망은 표적이 되는 대상 그 자체에 동화되려는 습성을 가지지만, 그 대상이 포함된 특정 집단이 보편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사회적 위상과 이미지를 소유하려 하기도 한다. 즉, 선망의 대상이 된 개인보다 대상이 추구하는 대외적 가면의(만약 쓰고 있다면, 역할 놀이의 법칙에서 설명한), 다시 말해 이상향으로 표현한 어떤 상위 능력 집단의 공통적 이미지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가면은 개인의 본모습보다 나은 모습을 선택하고 과장하여 표현하는 매개체이다. 따라서 가면 쓴 개체가 많을수록 성숙한 사회관계를 가진 집단으로 보이는데, 이 집단은 그렇지 못한 집단의 지향 목표가 되곤 한다. 물론 가면을 쓴 사람이 적은 사회 집단이나 평등한 집단 안에도 선망의 대상이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사회 구성체가 여러 단계나 여러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는, 계급이 익숙한 사회에서 선망의 대상과 그것을 따르고자 하는 개체들을 확연하게 구분할 수 있다. 이런 사회일수록 선망의 대상을 향하는 소유욕의 기울기가 가파르고, 이들의 영향력이 타 집단보다 거대하다.


교육받은 인간으로서 어떤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면 안 되지만, 현실적으로 현대 사회에서 특정 인물을 속 깊숙하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한 사람을 오래, 그리고 깊게 알 수 있을만한 시공간적, 심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대신 우리는 어떤 사람이 반복하여 노출하는 이미지로 그 사람을 판단하는 데 익숙하다. 일을 할 때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유연한 일처리가 가능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일부러 상대가 의도한 이미지임을 알 수 있다. 본모습보다 일을 함에 있어 유리하다면 당연히 의도적으로 가면을 찾아 쓰고, 기꺼이 그것으로만 서로를 판단한다.

 하지만 가끔은 가면을 쓸 여유조차 없는 때가 있다. 상대는 그것이 가면인 지 아닌 지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비의도적으로 튀어나오는 본능이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면 아무래도 가면을 쓴 상대보다 덜 관심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운영되며, 본능의 비율이 다른 집단보다 유달리 높은 응급실에 필연적인 욕구이다.



  

‘응급의학과’라고 하면, 보통 억세다, 혹은 드세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밤새 근무하고, 남성 위주로 구성되었던 과거 때문이라고 하기엔 최근 들어 여성 응급의학과 지원자가 늘어나는 추세이다. 자체 판단을 할 수 없으니, 친한 타과 친구의 눈을 빌려보기로 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려보면, 응급의학과는 ’ 좋게 말하면 결단력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안하무인에 고집 센 ‘ 의 이미지라고 한다. 짧은 시간 안에 해결하기 위해 우악스러운 술기를 진행하는 것도 원인이지만, 타과와 크고 작은 분란도 많이 일어나는데 비해 그 해결 과정이 다소 강압적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각 병원마다 ’ 미친 X‘이라고 불리는 응급의학과가 타 과 술자리 단골 안주거리가 되는 정도라고 이해하면 된다고 했다.


  머릿속 응급의학과의 이미지를 형상화해 보라고 하니, 꾀죄죄하고 창백한 얼굴에 흐리멍덩하지만 광기 서린 눈으로 물면 놔주지 않는 몰티즈와 같은 모습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불도그이나 허스키 같은 멋있는 견종보다는 이게 더 잘 어울린다고 했다. 피곤에 절어 종잇장 같이 호리호리하지만 성질 더러운 게 디폴트인.


“근데 가끔 안 그런 사람도 있어.“ 광인의 눈빛을 형형하게 빛내고 있는 나를 달래려고 한 말인진 모르지만, 모두가 그렇진 않다고 했다, 가끔씩 그러지 않은 응급의학과가 전공의가 존재한다고. 본능이 도사린 응급실에서 가면을 제대로 끼운 (혹은 그게 본모습일지도 모른) 사람이 있기도 했다고. 그리고 십중팔구, 그 응급의학과 전공의는 수월하게 협진을 진행하는데, 바로 우리 동기 XX가 그랬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응급의학과 XX입니다~”

수화기를 통해 내뱉는 모습이 매우 쾌활하다. 환자는 이만큼 밀려있는데 뭐가 그리도 기분이 좋은 지 목소리에 여유가 묻어 나오는, 곰돌이를 떠오르게 하는 동기였다. 덩치가 있긴 했지만 우악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동글동글한 선, 곱상한 피부, 항상 웃는 눈매, 그리고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친구였다. 나를 비롯한 다른 동기들이 몰티즈나 페키니즈 같이 깡깡대는 형상이라면 얜 진짜 순둥순둥 반달곰, 북극곰 같았다. 만난 게 의국 안이어서 서로 볼 꼴 못 볼 꼴 다 보았기 때문에 별 감흥은 없었지만, 객관적으로 밖에서 만났으면 한번 뒤돌아 보았을 법한 매력의 소유자였다.

 그런 XX가 우리의 부러움을 산 것은 노래방에서 에코 없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아니라 빠른 귀가 시간이었다. 보통의 우리는 근무시간까지 들어온 환자를 정리하고, 이것저것 개인 기록을 처리하고 나면 퇴근시간을 두어 시간 훌쩍 넘겨 퇴근하곤 했는데, XX는 어찌 된 일인지 항상 사부작 거리다가 누구보다 빠르게 퇴근했다. 갓 들어온 응급의학과 1년 차의 실력이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날까. 진료 실력은 걔나 우리나 대동소이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협진과 간호 인력의 백업 속도가 우리와 확연한 차이를 보였다. 어찌 된 일인 지 알고 보니 비밀은 바로 그의 매력이었다.


“XX 선생님이 얘기하면 뭔가 다 맞을 것만 같아요. “

“오더가 이상할 때도 일부러 그렇게 의도한 것처럼 보일 때도 있어요.”

“차분한 행동과 목소리가 교수님 같아서나도 모르게 빨리 처리하게 되더라고요.”


나중에 친해진 간호사 선생님들의 말이었다. 뭔가 항상 여유 있는 모습이 있어 보인단다. 없는 거 알면서도, 풍파가 휘몰아치는 응급실에서 한줄기 마음이 의지가 되는 얼굴이란다. 그냥 그런 얼굴이라니 할 말이 없었다. 진중한 게 아니라 행동이 느린 거고, 피곤에 절어 안 그래도 낮은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고 투정을 부려보아도 결과는 항상 먼저 간다며 손을 흔들며 의국을 떠나는 XX의 뒷모습이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얼굴은 뜯어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성격을 공략하기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XX의 진료 스타일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많은 걸 바꿔야만 했다. 바쁠 때 말 걸면 차갑게 톡쏘던 것을 줄여 나갔고, 빠른 처리가 필요하면 두 번 닦달할 것, 한번 닦달하는 대신 정중한 어투로 부탁했다. 처음에는 시간이 지체되는 게 답답했지만 나중에 뒤돌아보면 5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란 걸 깨닫자, 여유 있게 일을 하는 게 그리 어렵고 짜증 나는 일은 아니게 되었다. 이런 날들이 반복되자 놀랍게도 우리의 귀가시간이 조금씩 짧아지는 게 느껴졌다. 후에 들어보니 ‘그 연차 응급의학과 선생님들이 다들 일을 잘해. 성격도 차분하고, 말도 예쁘게 한다’라는 소문이 간호사 선생님들 사이에서 돌았다고 했다. 점잖은 몰티즈가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 과 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도 똑같은 걸 다른 과에 느끼고 또 그렇게 대하게 된다. 맨날 헤쓱했던 1년 차 정형외과 선생님들이 4년 차가 되면서 다들 헬스에 운동에 뭐다 해서 군살도 빠지고, 외래에 들어가느라 관리를 한 탓에 피부도 좋아지고, 정장을 입고 다니면 되게 사람이 달라 보인다. 실은 해야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겠지만, 반짝이는 구두코를 보니까 사람이 여유 있어 보이고, 내가 환자라면 저 의사에게 진료를 받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만인 공통으로 공유하는 생각이었는지, 사실상 옆에 초록색 수술복에 크록스를 구겨 신고 있는 초췌한 모습의 의사가 우리 병원 수술 대가 교수님임에도 불구하고, 옆에 서있는 빳빳한 양복을 입은 전공의 선생님에게 수술에 대한 질문을 하는 환자나 보호자를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그들에게 잘난 의사의 모습은 수술복이 아니라 정장이었으니까.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상대의 욕구를 자극시키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많다. 나에 대한 대한 믿음과 배려는 배가 되고, 나를 닮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과한 충성을 기대할 수도 있다. 이런 것들은 실제 나의 능력치보다 커다란 능력을 발휘하는 시너지 효과를 가져오며, 이로 인해 또 다른 타인에게 선망의 대상이 되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위의 예시에서 볼 수 있듯이 특히 원초적 감정이 난무하는 응급실에서 매우 효과적이다. 가면을 쓰기도 버거울 정도인 존재들에게 작은 가면을 얼굴에 얹는 것만으로도 큰 효과가 따라온다. 물론 그만큼 가면을 유지하는 게 힘들기도 하고, 오히려 본모습을 보여주었다 ‘가식적’이라는 심한 부작용을 가져올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내 얼굴에 가면을 얹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고유 성질로 정착하게 되는 것으로 귀결될 수 있다. 믿음과 신뢰가 존재한다면, 응급실은 어디보다도 끈끈한 협동심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다.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사진 출처 : “비너스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








작가의 이전글 S2. 원초적 본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