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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테토칩 Feb 16. 2023

S2. 원초적 본능

3. Narcissism, 자기애

 공감 능력은 사회적 동물임을 영유하기 위한 중요한 능력이다.

 인간에게 공감 능력이란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당연히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이라고 하지만, 또한 동물이기에 종종 공감 능력에 반하는 본능을 드러낸다. 이 본능은 자아도취 혹은 자기애라고 불리며, 타인에게 향하는 관심을 본인에게 향하게 하려는 욕구로, 인간이 관심을 원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관심은 자타의적 시선을 모두를 포함하며, 관심에 대한 욕구는 자존감으로 표현된다. 자존감은 성숙한 인간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인데, 우리는 자존감을 통해 스스로를 사랑하는 자아를 빗어내고, 이 자아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발전하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며, 인간은 이 과정을 통해 성숙한다.


 건강한 자아도취자는 선천적,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일반적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적절한 공감 능력을 가진다. 반면, 병적인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 성숙하지 않은 자아는 객관적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부족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을 과도한 자기애로 채우며 만족한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지 않으니, 자아 성장과 성숙의 기회가 적고, 미숙한 자아는 또다시 자신에 대해 과도하게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시대를 어우러 의사는 여러모로 눈에 띄는 존재다. 선망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결여된 사회성을 가진 대표적인 직업군이기도 하다. 하루에 많게는 수 십 명의 사람을 대면하면서 누구보다도 교류와 공감하는 기회가 많을 것 같지만, 공감을 잘하는 의사를 만나기가 썩 쉽지 않다는 얘기가 빈번하게 흘러나온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의료진 중 적지 않은 수가 “나는 환자와 보호자와 대화 잘하는데?”라고 반문할 것이다. 누구의 말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이런 대중과의 괴리감은 바로 과도한 자기애에서 발생한다.



 

병원마다 다르지만, 응급실에서는 바쁘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심정지를 겪는다.

처음이야 벽에 붙어 ‘어떻게 하지’ 하며 얼이 빠져있다가 누군가의 고함에 뛰어가 손을 보탰지만, 익숙해지면 습관처럼 심폐소생술을 진행한다. 심폐소생술의 숙련도와 별개로, 심정지 환자의 예후는 경우에 따라 빠르게 심장이 복구되기도, 그러지 못하기도 한다. 의학적으로 심폐소생술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환자의 목숨이 돌아올 가능성은 낮아지며, 돌아와도 후유증 없이 이전과 같은 생활을 영위할 가능성 또한 높지 않다. 때문에 원래 지병이 있거나 연로하신 환자의 보호자들은 심폐소생술이 진행될수록 침착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이미 상황에 대한 상의가 이뤄져 마음의 준비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심정지는 보호자들에게 준비할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럴 때 의사는 ‘나쁜 소식 전하기’를 하게 되며, 인간의 공감 능력이 빛을 발휘하는 때이다.


 “CPR 이요!!”

방금 119를 통해 들어온 환자는 길을 가다가 갑자기 쓰러져, 지나가는 행인에 의해 신고가 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응급실 내 소생실로 이송된 환자에게 달라붙어 기관 삽관 및 심폐소생술을 시작했다. 급하게 접수를 하고, 의무기록차트를 찾아보았지만 우리 병원에서 진료를 본 적이 없어, 환자의 정보가 부족해 원인을 가늠할 수 없었다. 급하게 소생실에서 나와 보호자를 찾았다.


“보호자 분 어디 계세요? 이리 오세요!”

 응급실 특유의 어수선한 분위기에, 다른 환자와 보호자가 뒤섞여 있으니 어쩔 수 없이 큰 목소리로 보호자를 불렀다. 불안한 모습으로 복도를 서성이던 몇 명이 거친 목소리에 깜짝 놀라는 듯했지만, 이내 내게 다가왔다.


“OOO 씨 보호자 맞으신가요?”

“네, 맞는데요.”

“환자분과 관계가 어떻게 되시죠?”

“부인이랑 딸이요.”

“법적 보호자 맞으시죠?”

“네.”

  의료진은 가족 외의 사람에게 의료 상황에 대해 상의하지 않는다. 의식 없는 환자의 현재 상황, 치료, 결과 등에 대해 상의하여 치료 방향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것은 가족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보호자들에게 가족이 맞는지 재차 확인한 뒤 설명을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조용한 상담실이 아니라 심폐소생술이 이뤄지는 소생실 바로 옆 복도에서 상담은 이뤄졌다. 소생실 안쪽에서 삐-삐- 거리는 기계음과 다급하게 돌아가는 소리, 의료진들의 고함소리가 하나도 걸러지지 않은 공간이다. 그곳에서 나는 선 채로 질문했고, 보호자들은 선 채로 대답했다.


“원래 앓고 계시던 질병 있나요?”

“잘 모르겠는데요.”

“먹던 약은요?”

“고혈압 약은 먹었어요. 혹시 괜찮으신가요?”

“질문 먼저 좀 할게요. 그것 말고 심장 검사나 건강검진 이런 거 언제 해보셨대요?”

“저희가 같이 안 살아서 잘 모르겠어요…. 많이 안 좋으신가요?”

 보호자들은 앞으로 나올 나의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건 표정이었다.


“환자분은 응급실 오셨을 때부터 심장이 멈춰있는 상태로, 지금 심장 마사지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나쁜 소식 전하기다. 비보에 보호자들이 주저앉았다. 망연자실함과 두려움이 비친 표정 사이로 약간의 침묵이 지나갔다. 안타까운 순간이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살릴 수 있습니다.’와 같은 무책임한 언사를 날릴 수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니 해야하는 것은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미사여구 없이 간결한 설명을 통해 상태를 전달하고, 이에 대한 보호자의 빠른 이해를 이끌어내야 한다. 때문에 보호자가 채 정신을 추스리기도 전에 말을 이었다.


“지금 약 30분 정도 심장 마사지를 하고 있는데, 30분이 넘어가면 소생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고, 돌아오셨다고 해도 식물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이고야….”

“하지만 과거력이 없는 심정지이고, 갑자기 쓰러진 것이라 심장이 원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경우는 다른 심정지보다는 소생가능성이 높고요.”

“아이고야!”

“하실 수 있는 치료는 OO가 있고, 다른 방법으로는 XX를 할 수 있습니다. 환자 보다가 올 테니, 상의해 보시고 바로 알려주세요.”

“하, 그걸 어떻게 지금 정해요….”

두 번째 나쁜 소식 전하기다. 그래도 하셔야 한다며 일단 환자를 보고 오겠다고 말을 마친 뒤 다시 소생실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호자들의 격앙된 목소리와 전화를 걸어 설명하는 목소리가 뒤섞여 들렸다. 몇 사이클의 심폐소생술을 진행했지만, 갈수록 환자의 상태는 나빠지기만 했다. 나는 다시 복도로 나왔다.


“결정하셨나요?”

“이렇게 빠르게 뭘 결정하라는 겁니까?”

“지금 30분 정도 지났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제 결정해 주셔야 할 때일 것 같습니다.”

“한 번도 안 돌아오신 거죠…?”

“네, 아직 돌아온 적 없습니다.”

“잠깐만요…. 조금만 더 시간을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살 수 있는 확률이 매우 낮다는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우는 보호자들을 뒤로 한채, 나는 다시 소생실로 들어갔다. 보호자들이 겪어야 할 슬픔이 안타깝지만, 그들을 위로하는 것보다 하던 치료를 시행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호자들은 지금까지 돌아오지 않았으면 여기까지만 해달라는 의사를 전달해 왔다. 그 후로 환자가 영안실로 옮겨갈 때까지 우리는 보호자들에게 운명하셨다는 말 외에 다른 말은 건네지 못하고, 묵묵히 다른 일을 했다.




과를 막론하고 죽음 앞에서 말을 아끼는 의료진이 많다. 이들은 공감이 꼭 말로만 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어설프게 위로를 하기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의료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낫다고 한다. 수긍가는 부분도 있지만, 다 끝난 뒤에도 제대로 위로 한마디 못하는 의료진을 침묵하는 것 외에 두둔할 방법이 없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마주친 몇십몇 백 번의 심폐소생술 끝에 살리지 못한 환자의 보호자에게 제대로 위로의 말을 건넨 적이 거의 없었다. 감정이 격앙된 상대에게 어린 의사가 건넨 어쭙잖은 위로가 일으킬 반감, 죽음을 한번 더 인정함으로써 깊어질 슬픔에 대한 두려움, 살리지 못한 결과에 대한 질타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한 켠으로는 공감으로 자신에게 돌아올 부정적인 판단을 일에 최선을 다했다는 사명감으로 대체하며 자기 위로를 한 결과이다. 이것은 바닥을 친 공감 능력을 투철한 직업의식과 맞바꾼 것 밖에 안된다. 의료를 열심히 한 결과로 스스로를 칭찬며 굳이 자신에 대한 쓴소리로 감정을 소모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또한 환자나 보호자의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끼고, 그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것도 있지만 그런 마음 자체가 적은 탓도 있다. 죽음을 빈번하게 보면서 인생의 허무함과 인간의 미약함을 알게되면서 죽음이 슬퍼해야 할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식한다. 이런 생각은 죽음이 낯선 타인들에게 함부로 공유할 수 없기에 애써 공감하여 설득하기를 포기한다(죽음은 누구에게나 온다, 모두 다 죽을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은가).


 의료를 제공하는 수행자의 역할에 충실하여 감정 교류에 노력을 들이기보다, 객관적 의학 지식을 전달하는 정보 전달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만족하는 우리는 이것이 어긋난 자기애인지 알지 못한다. 보호자에게 설명도 했고, 이해 시키시키기도 했으며, 치료 방향도 ‘함께’ 정했으니 어느 정도 공감을 했다고 믿으며 지식 뒤에 숨는 일을 정당화한다. 심지어 공감이라는 감정에 충실하여 의료 행위에 대한 방향성이 흔들리게 되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환자에게 설명하면서 흔히 ‘교과서대로, 논문대로, 의학적 사실에 의거한 진료행위’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진료행위는 사람 간의 교류가 없는 자신과 지식 간의 일방향적 흐름으로 자기 평가에서 피드백을 받을 일도 없어, 자기애가 더욱 공고하게 되는 악순환을 가진다.


  이론적으로 건강한 나르시시즘을 가지기 위해서 ‘매우 훌륭한 의술과 회복능력이 매우 뛰어난 환자를 주로 만나는 의사’만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것은 18번의 골프홀을 모두 홀인원으로 끝내는 것만큼 불가능하다. 공감능력을 키우는 방법으로 역지사지의 관점에서 보라고 하지만, 극단적인 상황이 많은 응급실에서는 적용하기 어렵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아이러니하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공감은 문자를 통해 주고받는 것이 아니다. 읽히고, 듣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타인에 대한 배려의 몸짓이나 어투, 눈빛 모든 비언어적 행동을 포함한다. 언어적 교류가 가장 효과가 크겠지만, 그게 힘들다면 비언어적인 행동에서부터 시작하자. 그것이 우리가 해야 마땅한 최소한의 교류와 공감이며 이것이 익숙해져야 소리 내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공감하며 얻는 부정적인 느낌과 감정에 자괴감에 빠질 수 있지만, 이럴 경우에는 비슷한 환경에 놓인 비슷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위로와 도움을 받아도 된다.


공감 능력, 자기 자신에 대한 정확한 판단, 혹시 그것이 부정적이더라도 빨리 털어낼 수 있는 건강한 자기애, 판단을 자양분 삼아 증진하려고 하는 능력은 의사에게 필수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의 노예가 되는 한편 의학적 지식만 뛰어난 자기도취자가 될 것이며, 명확히 지양해야하는 의사 상이다. 그리고 공감을 잘할 줄 아는 의사는 매우 매력적이다.의료만 잘하는 무뚝뚝한 의사보다 의료도 잘하는 친절한 의사를 마다할 리 없지 않은가.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사진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https://mbdrive.gettyimages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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