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Obsessive, 강박적 행동의 법칙
사람은 육체와 함께 자아도 자란다. 육체도 그렇듯, 태초의 자아는 개인 고유의 성상을 가진다. 자아는 특성을 바탕으로 학습하는 과정을 거치며, 고유의 성격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개인의 특성에 따라 다른 것보다 수월하게 학습하는 지식이 존재하는데, 사람은 이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며, 습관이라고 부른다.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습관은 긍정 및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가진다. 습관을 통한 항상성의 유지는 안정적인 삶의 근본이 되며, 새로운 것을 학습할 때 습관을 사용하여, 보다 어렵고 낯설지 않게 수용하도록 한다. 반면, 자아 학습의 목적이 결여된 습관적 행동은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강박적 행동이란 ‘하나를 계속 진행하는 상태‘이다.
더 넓은 의미로 강박적 행동은 개개인의 성격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행동 및 사고방식이다. 대부분의 우리는 자신의 강박적 행동이 긍정의 범주 안에 있는 생활을 원한다. 개인의 강박적 행동이 긍정적인 목표를 지향할 때,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효율적인 외부 지식 수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긍정의 범주를 지나친 습관은 기존과 다르게 행동 혹은 사고하는 방식을 회피하거나 무시하게 만든다. 성장과 함께 학습된 오랜 습관은 개인과 분리하여 평가할 수 없지만, 그 습관만으로 개인의 삶을 구성할 수 없다. 습관이 부합하지 않는 삶의 부분을 제대로 습관적 행동으로 채우려고 한다면, 결국 습관의 부정적인 측면이 드러난다.
부정적인 강박적 습관을 대비하기 위해서 자신의 습관을 선제적으로 파악하여 필요한 경우 십분 활용하되, 그렇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일을 줄여야 한다. 결국 무의식의 의식화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습관을 따르지 않는 다름과 불편함, 거부감을 기꺼이 수용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응급실에서 진료하는 환자의 질병이 하나로 귀결되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시간적 여유가 있고, 환자가 버텨준다면 차근차근 외래 보듯 진료를 하면 되겠지만, 그렇지 못한 환자들이 방문하는 곳이 응급실이다. 따라서 응급실 환자는 동시에 여러 과의 협진이 진행되는 게 일상이다. 동시 협진은 자원 및 지원 한계로 반드시 필요한 검사 및 치료만 이뤄진다는 장점이 있지만, 각 과의 충분한 대화와 교류가 부족하다는 너무나도 큰 단점을 가진다.
“선생님, 애가 피를 토해요!”
5세 남짓된 소아 환자였다. 갑작스러운 토혈로 응급실에 접수가 되었다. 이전 기록을 보니, 카사이 수술(Kasai operation : 선천적 담도폐쇄증의 치료법 중 하나. 담도폐쇄증이 있는 경우 간으로 가는 혈류의 흐름이 원활하지 않아 간문맥압 항진을 일으킬 수 있으며, 이는 다른 부위의 정맥압에 영향을 준다. 이 영향으로 식도정맥류가 발생하면, 토혈을 할 수 있다)을 한 과거력이 있는 친구였다. 보호자가 언급한 토혈의 양은 많지 않았지만, 몸이 작은 소아 환자는 종이컵 반컵만큼의 출혈에도 생명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환자는 입원해서 나을 때까지 경과 관찰을 하는 게 보통이다.
아이는 비교적 양호해 보였으나 맥박이 빠른 빈맥이었다. 이는 좋지 않은 신호로, 아마 보호자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피가 났을 거라고 예상되었다. 빈맥은 출혈에 대한 체내 수용능력을 넘었음을 알려주는 중요 표지자 중 하나로, 수혈을 비롯한 수액을 빠르게 공급하여 채네 수분량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 아이는 곧바로 집중 모니터링이 가능한 자리로 옮겨졌고, 간호사 선생님들이 아이의 팔에 라인(line, 외부 약물을 공급하도록 혈관에 주삿바늘 및 관을 연결하는 것)을 잡는 사이, 나는 협진이 필요한 각과에 연락을 하며 수액 치료에 대한 지시를 내렸다.
“애기 몸무게 몇 킬로예요?”
”18kg이요! “
“수액 NS 360 cc 로딩(loading, 수액을 빠르게 주입한다는 의미)할게요! 바이탈(vital sign, 신체징후) 한 번만 불러주세요!”
“90/40, 140 대요“
“네, 로딩 다 되면 바이탈 팔롭(follow up) 해주세요. “
베테랑 간호사 선생님들이 덕분에 아이의 혈관 확보가 다행히 별문제 없이 성공했고, 나는 수액이 환아의 몸으로 주르륵 흘러 들어가는 것을 보며 환자를 관찰하고 있었다.
“선생님 지금 수액 뭐 들어가요?”
“NS(normal saline, 생리식염수) 요. “
“5% DS(dextrose normal saline, 5% 포도당이 함유된 생리식염수)로 바꿔주세요.”
“아직 남았는데요?”
“그냥 바꿔주세요.”
연락을 받고 응급실에 내려온 소아외과 전공의의 오더였다. 소아의 경우, 성인과 체성분의 차이가 있어 나이에 따라 수액이 다르게 사용하는 관례가 있다. 이미 수십 년 전에 신생아 등 아주 예외적인 경우 외에는 생리식염수가 다른 수액과 대동소이하다는 학계의 발표가 있었지만 임상에서는 아직 관례를 따르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우리 병원 소아외과도 그중 하나였다.
“외과 선생님, 환자는 실혈로 맥박이 빠른 거라서, NS로 로딩하다가 준비되면 수혈로 바꾸는 게 어떨까요?”
실혈 등으로 환자의 몸에 혈액이 부족할 경우는 다른 수액보다 NS를 먼저 사용한다. NS은 등장성 용액으로 세포의 용혈을 일으키지 않지만, 5% DS의 경우 고장성 용액으로 빠르게 주입할 경우 세포 용혈이 생길 수 있다.
“저희는 원래 이거 쓰는데요.”
외과 전공의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그럴 법도 한 게 5% DS 역시 탈수라는 체액이 부족한 상황에 많이 사용하며, 포도당이 들어가 에너지원도 보충해 주기 때문에 수술 전후로 외과에서 많이 사용하는 수액이다. 하지만 환자처럼 급하게 수액을 주입해야 할 경우는 잘 고려해서 사용해야 한다. 이차저차 설명을 해주었지만 이미 전공의의 마음은 상한 듯했다.
“저번에 출혈 있는 환자도 이 수액 썼는데 괜찮았어요.”
그건 어른이니까, 아무래도 수용 능력이 소아보다 높겠지!라고 핀잔하고 싶었지만 나는 사회적으로 전공의를 보듬어야 할 의무가 있는 전문의이기 때문에, 일단 들어가던 수액은 끝내자고 말했다. 외과 전공의가 입을 삐죽거리며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잘못되면 내가 책임진다고 덧붙이자 조용해진다. 의례적으로 사용하던 수액을 변경하는 게 맘에 들지 않으나 책임을 이쪽에서 지겠다니(게다가 자기보다 높은 전문의가 결정한 거라 나중에 선배가 추궁해도 전문의의 강압에 이겨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것이다. 반면, 수액이 다 들어가기 전에 수혈팩이 올 거고, 그러면 대체수액을 달 필요가 없어지므로 입씨름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나의 계산이었다.
“지금 수액 뭐예요?”
“NS고요, 360 로딩 중입니다. “
“몸무게가?”
“18kg이요.”
“로딩 말고 180cc/hr로 들어가게 해 주세요..”
외과 전공의와 푸닥거리하고 나니, 소아소화기내과 전공의가 와서 다시 뒤집어 놓는다. 이전에 토혈로 소아소화기내과 협진을 본 적 있어 연락했더니, 잘 들어가고 있는 수액 속도의 조절을 요구했다. 아마 너무 빠르게 들어간다고 판단한 듯했다.
성인은 60kg 기준으로 혈액의 양은 약 5kg 정도이다. 몸무게의 1/12로 생각하면 쉬운데, 환아의 몸무게가 18kg이었으니까, 혈액이 1.5kg 정도라는 계산이 나온다. 1.5kg의 혈액에 생리식염수 360cc는 생각보다 높은 비율인데, 당연히 많은 양의 수액은 피의 농도를 묽게 하고 여러 가지 합병증이 따라온다. 하지만 환자는 지금 실혈로 인한 빈맥 상태니, 빠르게 실혈 된 만큼 혈관 내 수분을 보충하지 않으면 더 위험한 합병증이 올 것이다. 수혈이 가장 좋은 선택이지만, 수혈팩을 혈액은행에서 가져오는 데 시간이 걸리니 다른 수액 제제를 대신 사용하는 게 원칙이지만, 소아과 특성상 이렇게 많은 양의 수액을 한 번에 혈관에 주입하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속도를 조절하고자 한 모양이었다. 오더가 겹치니 피곤해하는 간호사 선생님을 뒤로하고, 이쪽 전공의에도 여차저차 왜 굳이 ‘생리식염수’를 ‘빠르게’ 주입해야 하는지 설명했다. 마찬가지로 입을 삐쭉대며 반론하려는 전공의에게 역시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하여 수액에 대한 오더를 매듭지었다. 그러고 나자, 수혈 제재가 도착했고, 수혈에 대해서는 세 과 모두 의견일치를 보여 평온하게 수혈을 시작했으며 환아는 무사히 소아외과로 입원하여 병실로 이동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학제 협진이 무사히 완료되었다 (물론 전공의를 상대로 이뤄진 대립구조였기 때문에 자신보다 높은 의료진(꼰대)과의 언쟁을 피하기 위해 빠르게 매듭이 지어졌을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긴 했다).
위의 예시는 어떤 수액을 얼마나 사용하는가에 대해 의견 갈림뿐이지만, 컨디션이 좋지 않은 환자를 수술을 할지 말아야 할지, 막힌 혈관을 약을 사용하며 혈관을 뚫을지 수술을 해서 뚫을지 등 환자의 생명과 예후에 직결된 선택을 할 때도 똑같이 대립이 일어난다.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서 서로 이해하며 설득하는 대화가 필수적이나, 응급실이라는 공간은 서로가 서로를 이해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빠르게 협진을 완료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이전에 하던 그대로, 내가 편하고 익숙한 그대로 진행되기를 원하는 마음을 한층 강조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환자 별 맞춤 치료라는 궁극적 목적을 잊어버리고 의식 없이 비슷한 환자에게 늘 그래오던 치료를 선택한다. 강박적 습관은 다른 의견에 과한 거부감을 보이며 수용을 꺼리는데, 이는 명확한 목적 설정하지 않은 탓에 습관적인 행동 자체가 목적이 되었기 때문이다. 목적을 부정당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치명적인 자기 공격으로 받아들여지므로, 중간에 자신의 행동이 강박에 의한 반복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도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쉽게 관찰된다. 그렇게 우리는 대화의 기회를 놓친다.
강박적인 습관은 학습을 방해한다.
강박은 타인과 과격한 교류에서 여러 번 주어진 교정 기회를 쓸모없게 하며, 똑같은 주제로 똑같은 다툼을 반복하게 한다.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은 편협한 시야를 가진다. 특히 의료에서 습관은 결과론적으로 환자에게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 하나로 타인과의 다툼이나 자신의 고집등에 대해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놀라울 만큼 팽배하다. 강박적 습관이 환자에게 더 나은 치료 방법을 제공하는 것을 막고, 궁극적으로 자신과 의료 모두 발전하는 것에 뒤쳐지게 한다는 것을 깨닫기엔 시야가 너무 좁은 것이다.
연차가 쌓이고 나니, 타인의 다른 방식에 대한 이해가 수월해진다. 부딪히는 과정에서 반성을 반복하는 것도 이유지만, 타인의 비난과 공격에 무뎌지며, 빠르게 회복되는 것도 무시 못할 이유가 된다. 대립할 때 존재했던 압박감이 희미해지는 순간이 오기 때문이다. 공격에 무뎌진다는 것은 내가 공격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의 자라남이 선행된 결과이다. 압박이 없으니 무의식적인 행동보다는 일의 목표에 대해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고, 환자에게 좋은 치료가 다른 과와 싸워서 이겨 내 치료 방법을 고집하는 것보다 올바른 치료를 제공하는 데 눈을 돌리게 된다. 그러면서 부족했던 사회 교류 기능이 무럭무럭 자라나 협업, 양보, 구슬림의 능력이 일취월장하게 된다. 자라난 나는 더 나은 의사이며, 그렇지 못한 의사와 대내외적으로 굉장히 큰 차이를 가진다.
다른 사람과 부딪히는 과정에서의 여유로움은 필연적으로 연륜을 동반한다. 따라서 습관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반복하는 게 덜 고통스러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습관을 탈피하여 자라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지 않을까. 그리고 다행히도 우리는 동일한 경험을 이미 겪은 선배 의료진과의 대화와 교류를 통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 우리끼리도 협동과 대화가 필수적인 응급의학과의 장점으로 빠르게 성숙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자.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사진출처: "정원의 여인", 클로드 모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