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언제나 응급 Jan 31. 2024

S2. 원초적 본능

14. 목표 상실의 법칙

369 법칙.

 369 법칙이란, 직장인이 3 배수의 개월(혹자는 년수라고도 한다)에서 직장 생활에 권태 혹은 스트레스 등을 이유로 이직이나 퇴직을 고려하는 상황을 뜻하는 신조어이다. 과도한 업무뿐만이 아니라 맞지 않는 적성, 발전의 여지가 없는 정체된 업무 등이 이유이다. 쳇바퀴처럼 반복된 업무에 긍정적 자극을 받기는커녕 쇠퇴의 굴레에 빠져드는 것이다.


 일의 양이 문제라면 근무 시간을 줄이거나 작업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교정할 수 있지만, 질의 문제는 다르다. 스스로 본인의 일에서 긍정적 자극을 찾아내 의미 지어야 하는 작업을 반복해야  만족스러운 질의 일이 유지된다. 누구나 이 과정을 쉽게 해낼 수 있지 못하기에 우리는 주변인의 도움을 받게 된다. 좋은 멘토나 동료가 직접적인 자극원이 되기도 하고, 그들의 경험과 조언으로부터 직업의 질적 만족감을 얻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생을 덜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도 당연히 단점이 존재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개인이 아닌 집단을 위하여, 그리고 집단과 함께 협력하는 과정을 거의 필연적으로 겪는다. 경우에 따라서 집단 지성이나 공동체 의식으로 이어지는데,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한다는 목표 의식은 동료들의 도움을 통해 쉽게 다다를 수 있지만, 충분한 이해의 시간을 가지지 못한 경우 ‘남들이 그렇게 해서’라는 내면의 목적으로 굳어질 수 있다. 특히 비슷한 시기에 일을 시작한 동료들보다 뒤처지기 싫은 경쟁심리는 본인의 목표를 따라가기보다는 ‘굳이 튈 이유가 없고’, ‘이견을 표출하기 싫어서’라는 행동의 목표로 이어지기도 한다. 개인의 목표가 모여 전체의 목표를 이루는 게 아니라, 전체의 목표에 자신을 맞춰가는 격이다.

 

이는 위험을 회피하려는 본능이 지성의 발달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응급실은 유난히 골든타임이라는 말을 자주 쓴다. 20여 개가 넘는 각 세부 임상 분과마다 해당 시간 내에 해결하지 않으면 예후가 매우 나빠지는 질병이 존재하는데, 그런 환자들이 대부분 찾는 곳이 응급실이기 때문이다. 질병 중에는 발생률이 높아도 치료만 제시간 안에 받으면 경증인 질병도 많아 그만큼 시간이 중요하며, 그럴수록 주어진 프로토콜을 잘 따라야 하는 게 중요하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가이드는 가이드일 뿐’이라고 말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환자 혹은 응급실 상황에 따라 예외로 적용되어야 하는 경우에 그렇다. 이런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지금 당장 수술을 해야 하는, 말 그대로 10분의 시간도 없으며 지체될 경우 죽을 확률이 높은 환자를 마주한 의료진들이다. 이런 환자는 꼭 마취 전 검사[1]를 해야 할까? 아니기 때문에 응급실은 예외 사항에 대한 역치가 낮다.


 응급실에 두 명의 환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A 환자는 맹장염이 의심되는 복통 환자이고, B 환자는 오토바이 사고로 배에 멍이 있는 복통 환자이다. 두 복통 환자 모두 조영제 CT(컴퓨터 단층 촬영)을 해야 한다. 프로토콜 대라면 CT 촬영에 필요한 조영제는 신장 기능을 저하시키는 물질이므로, 혈액 검사를 통해 신장 기능 수치를 확인하고 진행한다.


“선생님, 환자 지금 CT 갈게요! “

“혈액검사 지금 들어갔는데요?! “

“그냥 찍을게요!”


이렇게 말해야 하는 환자는 B 환자이다. 배에 멍이 든 오토바이 사고는 내부 장기 손상을 반드시 판별해야 한다. 신장 기능 저하보다 더 중요한, 이를 테면 복강 내 출혈 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이나 비장, 신장이 산산조각이 났을 경우는 수술이 필요할 수도 있고, 운이 나쁘면 해당 장기를 떼어내야 한다. 콩팥의 기능을 확인하려다가 콩팥이 날아가는 것이다. 맹장염도 응급 수술을 필요로 하는 질병으로 분류되지만, 맹장염은 환자가 패혈증 등으로 복강경이 아닌 개복술을 하지 않는 이상 조영제 CT를 촬영하라는 응급실의 프로토콜을 따르는 게 환자의 예후에 좋기 때문에 프로토콜을 따를 만큼의 골든 타임의 여유가 있다.


 비슷한 예로, 흉통이 있는 환자가 심전도에서 심근경색이 의심되면 다른 것 고려할 것 없이 심장혈관조영술이 진행되고, 의식 없는 환자가 뇌출혈임이 진단되는 즉시 수술방으로 이동하여 개두술이 이뤄진다. 이런 예외에 대한 판단은 자신의 생각이 없이 프로토콜만 따라가는 의료진은 절대 도달할 수 없고, 또 도달해서는 안 된다.




정도(正道)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귀찮은 일이다. 프로토콜을 따르지 않은 경우에 대한 경위서를 써야 하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고, 타인의 요구가 아니더라도 자신의 벗어난 진료에 대한 설명을 위해 부가적인 일이 따라온다. 그리고 가장 큰 이유는 나의 결정에 대해 생각지 못한 부작용이 생겼을 때, 그리고 그것이 환자의 생명과 관련 있을 때의 책임 소재 때문일 것이다. 적어도 선례를 따르거나 병원 단위의 프로토콜을 따라 나쁜 일이 생기는 경우, 자신이 부담이 줄어든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응급의료진이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과 거리가 있다. 과연 우리는 ‘나는 CT를 찍고 빠르게 환자를 진료하고 싶었는데 프로토콜에 따라 늦을 수밖에 없었어’라는 이유를 치료가 늦어져 커다란 후유증을 가진 환자 및 보호자에게 당당한 마음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


 자신이 응급실에서 일하는 이유가 CT를 부작용 없이 찍기 위해, 혹은 진단 기준을 지키기 위해, 정시에 퇴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환자에게 올바른 의료를 제공하기 위함이라는 높은 목적의식임을 항상 기억하자. 전자의 목표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의사는 오더러(orderer, 전화기만 붙잡고 있다고 타과에서 응급의학과를 폄하할 때 쓰는 말), 콜받이(전자의 단어와 비슷한 예)로 빠지기 십상이고, 후자의 목표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의사는 성취감이라는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응급실 의료진의 목표는 안전한 진료라는 글자 그대로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병원의 프로토콜을 따르는 게 아니라, 환자를 안전을 위해 ’ 나의 의학적 지식으로 환자에게 최고의 편의를 제공한다 ‘라는 자신의 사명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이런 목적은 결코 ‘남들이 하는 대로’, ‘원래 하던 대로’, 혹은’ 튀기 싫어서 ‘라는 소극적인 마음가짐으로는 결코 다다를 수 없다. 물론 정시 퇴근의 쾌락과 고뇌에서 벗어난 안도감은 굉장히 매력적이지만, 깊은 수준의 만족을 위해서 응급의학 의료진은 희생과 절제를 적절히 사용해야 하며 때로는 과감한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늦게 퇴근한다는 끔찍하고 괴로운 현실은 타인에게 주어진 삶의 연장이라는 우월하고 숭고한 현실을 종종 마주치게 한다.


주석 :

[1] 대부분의 전신 마취의 경우, 마취 도중 환자의 생체징후가 나빠지는 것을 예방하기 위한 전처치 유무 및 주의사항의 지표가 되기 때문에 마취 전 검사가 필수이다.


[Reference :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위즈덤 하우스, 2019]

[사진 출처 : “활을 쏘는 에로스”, 율리우스 크론베리, 개인소장, 1885]

작가의 이전글 S2. 원초적 본능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