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살아가는 것이 살아내는 것이라는 생각이 턱 끝까지 차 오를 때가 있다. 뱉어내기엔 말의 무게와 전염력을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괜히 공감을 바라는 투정을 하기보다는 묵묵히 꿀꺽 삼켜버리는 편을 선택하기로 할 때가 종종 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어른의 무게가 때로는 코 앞에 놓인 주삿바늘처럼 가까이에서 무시무시한 모습을 뽐내며 자각될 때가 있다. 글을 쓰기 전에는 내가 견뎌내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구나.'싶었는데, 글을 적어 내려가는 요즘에는 하루가 다르게 견디는 삶의 무게가 도전하듯이 주어지다 보니 그 속에서 조금 덜 모난 하루를 선택하기로 한다.
며칠 전 브런치를 통해 "사랑이 낭비라면 손가락질해도 좋으니, 나를 위한 낭비 정도는 하는 편을 택하겠다."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마음이 여린 만큼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내가 추구하는 '사랑'을 '그'로 정의하자면, 때로는 사무치도록 그의 바다에 빠져 항해하기도 하고, 스스로 잠길 걸 알면서도 겁 없이 다이빙하기도 한다. 맑은 날에는 조각배를 타고 그가 존재하는 묵언의 바다를 만끽하기도 하며,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는 찰랑이는 조각배를 타고 외진 섬에 표류하기도 한다. 강렬하게 나아가는 것, 그가 내 안에 가득해져 터져 버릴 것 같은 충만함만이 그인 줄로만 알다. 어느 날 그런 그는 나에게 그저 머물러 있는 것, 무형, 무취, 무색의 형태를 띠는 것도 변함없이 자신임을 깨닫게 했다.
아무런 맛이 없고, 향기로운 냄새를 잃어버리고, 찬란한 색이 옅어져도 형태가 그대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네 속에서 항해하고 있는 만큼 서로가 체온을 나누어 따뜻하게 만들고, 나의 색을 물들여 빨갛게 할 수 있을 줄만 알았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눌 수 있고, 나누어 갖고 싶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흩어져도 네 존재가 때론 그 무엇보다 견고하게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만들었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로맨스는 다 허황된 것이었음을 고소해하기라도 하듯 날이 갈수록 너의 견고함은 환하게 빛이 나기도 하더라.
사랑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라 가정한다면, 난 주어진 상황 및 환경 모든 것을 뒤로하고 그를 선택할 수 있겠다. 이 현실에는 조건 없는 그의 모습이 어색하리만큼 희소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난 이제 이로 하여금 네가 지닌 가치를 알아볼 수 있다. 더 이상 이전의 그가 가득한 낭만적인 바다를 항해하는 일은 없겠다. 형태와 향기, 색채 모두 영원한 것은 없으니 말이다. 비록 사실은 그러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나는 견고한 네가 존재하는 바다에 첨벙 뛰어들고 싶다. 결핍과 증오가 코 앞까지 다가와도 나 역시 단단하게 풍랑에 맞서고 싶다.
이립에 발돋움하고 있는 나의 세계에는 선택해야 할 것들에 따르는 책임감이 상당수 존재하고, 때로는 주어지는 모진 말들과 고난에 하루가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서두에 언급한 바처럼 어린 시절에 그리 소망했던 어른의 삶이 결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다칠 걸 알면서도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그렇게 살고 싶을 때가 있다. 무수히 깊은 여러 형태의 '사랑'이 나에겐 그럴 용기를 줄 때가 있다. 위 제목의 뜻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전적인 정의이다. 전자의 단어로 표현하기엔 이 마음의 깊이가 조금은 무거운 것 같아 사전적인 정의를 선택했다. 오늘은 왠지 네가 더 사무치는 그런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