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줄리 Jul 05. 2023

사랑은 허상이지만 실존하기도 하기에

사랑을 부정하지 않기로 


오롯하게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일이 이렇게나 행복 충만한 일인 줄 미처 몰랐다. 또한 한 발자국 떨어져 보니 그가 나에게 보여준 사랑의 깊이는 가히 어떤 단어로도 형용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와의 사랑을 매듭짓고 온전히 주어지는 하루를 마주하는 일은 가슴속 싹을 틔우고 싶어 아우성치는 꽃잎들의 여행을 끝내고 분분한 낙화를 마주하는 일과도 같았다. 이는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으로 나를 만들었다. 


도저히 무엇이라도 정신을 일깨우지 않으면 그대로 끝을 모르는 어둠 속으로 잠식당할 것 같은 위압감에 이별 후 내가 찾은 대안은 '책'이었다. 에세이집을 그토록 멀리하던 내가 누군가 나와 같은 상황에서 적어 내려가면서 기록한 글들을 다시금 집어 들었다. 어쩌면 머릿속으로는 이미 알고 있지만 괜찮아질 것이라는 말을 누군가의 입을 통해 혹은 그가 한 경험을 통해 수없이 듣고 되뇌어야지만 내가 나를 온전히 붙잡고 살아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사랑이란 참 쓸데없는 것 같지만, 사람을 살아 있게 한다는 면에서 마법, 그 이상의 힘을 포함합니다. 인간의 회귀해야 할 발원지이며, 절대적 본질이고, 우주의 단 하나의 점인 나를 이루는 뼈대입니다. 

한데 그렇게나 머뭇거리는 것. 그 기미를 멀리하려는 것. 자기가 손수 지은 집에만 들어가고 밖에는 나오려 하질 않거나, 심지어 사랑을 조심하려는 것이 우리들 사랑이지요. 그렇지만 사랑은 전 생애를 걸고 생애 자체를 증발시켜 버리는 애틋함 그 자체라서 여릴 수밖에요. 그러니 사랑은 차라리 꽃입니다. 사랑의 순간과 사랑의 정정과 사랑의 소멸, 이 모두가 한 송이입니다. 그 꽃의 향기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힘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에게 필요합니다. 그러니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자요. 꽃이 전 생애를 걸고 피어나듯 당신도 이제 꽃처럼 피어나자요. 아직껏 사랑할 수 없었다면,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 꽃에 집중하자요. 

가슴을 관통해 스쳐 지나가는 것, 그냥 스쳐 지나가고 마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더 많은 일렁거림을 남기고 부푸는 것, 벅찬 것만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쓰립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으로 사람은 살 수 있으며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분명 절박한 것이며 목에는 것이며, 쓰라린 것이에요. 사람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은 길을 걷다가도 문득 멈춰 서서 주저 않을 수밖에 없는 감정을 만나는 일이며, 잊으려 애를 쓰다가도 끝내 의도적으로 앙금을 남겨놓는 일, 그 따위의 기분들입니다. 
                                                                    당신이 행복하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병률


처음으로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상실감을 마주하게 되면서 '사랑'이 니지고 있는 힘을 부정하고만 싶었다. 가득 찼다가도 한순간에 밑 빠진 독처럼 텅 비어버릴 수 있으며 유리잔 안에 가득 채워진 물처럼 사소한 바람에도 마치 흘러 넘 칠 듯 일렁일 수 있는 존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온도로만 인식하고 싶었다. 애초에 나는 사랑에 무척이나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부정하다 보니 내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직시하기 어려워지곤 했다.







그리하여 난 '사랑'을 부정하지 않기로 똑바로 직면하기로 했다.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았고 그것을 뒤로한 채 살아가지 못할 나라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이병률 작가의 책에는 많은 아름다움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시를 좋아하는 그는 담담하고 차분한 어조로 과거의 연인들을 그려나가는데 낭만 그리고 꽃이라는 두 글자로 가득 찬 서사집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내가 앞으로 어떤 자세로 사랑을 하게 될지는 정의하기 어렵다. 온통 그 사람으로 머릿속이 가득 차 좀처럼 다른 일이 잡히지 않고 가슴이 쉴 새 없이 벅차 올라 웃음이 실실 나는 스무 살 같은 연애도, 손을 잡고 눈을 맞추고 있노라면 이 세상 혹은 우주 끝이 어디라 해도 이 사람과 함께면 가겠다는 다짐이 샘솟는 것만 같은 따뜻한 서른 언저리의 연애도 모두 같은 형태로 찾아오지 않을 것임을 이제는 안다. 


사랑이 끝나면 모든 게 허탈하고 허상 같지만 그 과정 안에는 따뜻함, 아늑함, 부드러움, 섬세함, 열정, 관능, 욕망 등이 실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적어도 내 곁에 머무르며 그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은 나를 도파민 최대의 상태로 만들기도 하며, 끝없는 블랙홀로 끌어들이기도 하니 실존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나는 사랑을 부정하지 않고 마주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기 위해 사랑이 필연적인 것임을.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새로운 사랑을 꿈꾸고 있음을. 







매거진의 이전글 커플링을 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