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라이트(2016) 그대라는 블루

리틀, 샤이론, 블랙 그리고 블루

by 슴도치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 1854~1891)와 폴 베를렌(Paul Verlaine, 1844~1896)의 동성애적 스캔들은 문학사에 유명한 이야기다. 폴 베를렌은 랭보에게 빠져 부인과 자식까지 버리고 브뤼셀로 떠났다. 그리고 자신을 떠나려는 랭보를 향해 두 발의 총을 쐈다. 다행히 랭보의 상처는 경미했으나 베를렌은 2년 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그는 달빛이라는 시를 썼는데 전문은 다음과 같다.


폴 베를렌 - 달빛


그대 영혼은 선택받은 풍경이다.

매혹적인 가면과 베르가모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류트를 연주하고 춤을 추지만

그들은 환상적인 변장 속에서 슬퍼한다.

단조의 선율에 실어 노래하고 있다.

승리한 사랑과 적절한 삶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의 행복을 믿지 않는 듯하며

그들의 노래는 고요한 달빛 속에 스며든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고요한 달빛 속에,

나무 위 새들을 꿈꾸게 하고

대리석 사이 솟구치는 분수들을,

그 거대한 물줄기들을 황홀경 속에 흐느끼게 하는 달빛.


이 시는 드뷔시의 ‘달빛’에도 영감을 주었다.


리틀- 작고 연약한 깃털


흰색 옷과 문


이름은 샤이론이지만, 별명은 리틀(알렉스 R. 히버트)인 아이는 흰색 옷을 입고 뛴다. 아이는 어머니와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해 뛴다. 폐건물에 숨어서 귀를 막고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이 사라지길 기다린다. 그때 후안(마허샬라 알리)이 소년의 삶으로 들어온다.


후안은 리틀에게 바라는 게 없다. 그는 목적 없이 리틀을 도와주고 싶다. 그것은 그 또한 과거 상처받고 외로웠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후안은 자신의 하얀색 현관문을 열고 흰색 옷을 입은 리틀을 받아들인다.


흰색은 백지상태다. 리틀은 작고 볼품없는 소년이지만 후안은 그런 리틀을 규정하지 않는다. 리틀이 너무 약하고 작아서 ‘호모’라고 놀림받을 때도 후안은 리틀에게 말한다.


“달빛 아래선 흑인 아이들도 파랗게 보이지.

넌 언젠가 네가 누군지 스스로 결정해야 해.

그 결정을 남에게 맡기지 마.”




액체의 사랑


후안은 리틀에게 수영을 가르친다. 리틀의 몸을 떠받치고 머리에 힘을 빼고 내게 기대라고, 내가 잡아주겠다고 말한다. 후안은 리틀에게 사랑을 보여준다. 그가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세례 한다. 후안은 리틀을 감싸고 있는 사회라는 풍랑에서 그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그리고 그 보호와 인내를 통해 리틀이 혼자 수영할 수 있을 때 진심으로 기뻐해준 어른이다.


시간이 흐르고 리틀은 엄마가 없는 빈집에서 욕조에 물을 채운다. 하지만 그곳에는 후안의 손길도, 엄마의 사랑도 없다. 차가운 물에 뜨거운 물을 부운 미지근한 온도에 몸을 집어넣을 뿐이다.

검은색 문과 홍등의 방


리틀은 검은색 문을 열고 자신의 집으로 들어간다. 그것은 그냥 문이 아니라 상실의 경계다. 엄마인 폴라(나오미 해리스)는 마약중독자에 매춘부다. 그녀는 리틀을 방치하고 방임한다. 후안의 흰색 문이 수용과 가능성을 의미한다면 엄마의 검은색 문은 행복의 격리와 처참한 현실을 의미한다. 검은색 문이 닫히는 순간 리틀은 엄마라는 현실을 견뎌야 하는 무방비한 목격자가 된다.


원래 분홍색이나 붉은색은 온기와 사랑을 상징한다. 하지만 폴라의 방을 채운 그 홍등은 마약의 환각과 성(性)의 매매가 뒤섞인 오염된 육체의 색이다. 그 붉은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 앞에서 광적으로 소리 지르는 폴라에 의해 리틀은 더욱 내면으로 침잠한다. 후안이 말한 정체성인 파란색의 의미가 치유와 진실이라면, 엄마의 붉은색은 부패와 타락을 의미한다. 리틀이 이 붉은 방에서 겪는 수치심은 훗날 그가 '블랙'이라는 단단한 껍질을 선택하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사랑의 역설


리틀은 후안을 가장 믿고 의지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폴라에게 마약을 파는 사람은 후안이다. 이런 리틀에게 선과 악의 경계는 희미하다. 그렇기 때문에 선에게 호의를 갖는 것도, 악에게 분노를 하는 것도 어쩐지 어색하다. 후안은 리틀을 완전히 책임질 수 없고, 리틀 또한 이 사실 알기에 후안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이 잔인한 역설 속에서 리틀은 자신을 완전히 사랑해 줄 사람을 찾지만, 찾을 수가 없다.



샤이론- 블랙이라는 껍질


블랙으로 변질된 블루


리틀에서 벗어난 16살의 샤이론(애쉬튼 샌더스)은 여전히 괴롭힘을 당한다. 키는 커지고 팔다리는 앙상하다. 그는 아직도 폭력에 침묵과 도피로 대항한다. 자신을 지켜주던 후안 또한 죽고 없는 상태다. 엄마는 그의 돈을 빼앗아 마약을 한다. 샤이론은 이제 그녀가 어릴 때처럼 두렵지 않지만 지독하게 벗어나고 싶다.


포식자와 배신자


터렐(태트릭 데실)은 샤이론이 살고 있는 학교의 포식자다. 그는 샤이론에게 사회라는 압력의 상징이며 학교라는 정글의 규칙을 집행하는 인물이다. 그는 샤이론에게 '호모'라는 별명을 붙이고, 그가 가진 나약함을 죄악으로 규정한다. 터렐은 폭력에 반응하지 않는 샤이론에게 구타보다 더 잔인한 방식을 택한다. 터렐은 샤이론이 유일하게 믿는 케빈을 이용해 그를 파괴한다. 그리고 그것은 샤이론의 정서적 마지노선을 무너뜨리는 촉매제가 된다.


케빈(저렐 제롬)은 샤이론이 달빛 아래서 자신의 ‘블루’를 확인했던 유일한 존재다. 그는 샤이론을 블랙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그것은 아직 흰색으로 남아있던 샤이론에게 블랙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는 계기가 된다. 케빈은 처음으로 샤이론을 애정을 담아 ‘만진’ 사람이고, 그 사실은 샤이론에게 드디어 자신을 완전히 사랑해 줄 사람과의 상봉相逢이 된다.

그러나 터렐의 강요로 케빈에게 맞게 된 샤이론은 ‘사랑조차 사회의 시선 앞에서는 무기력하다는 절망’을 깨닫게 된다. 케빈의 주먹은 샤이론의 얼굴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신뢰 또한 박살 낸다. 샤이론은 케빈(사랑)이 깨지는 순간, 더 이상 거울 속의 자신(리틀)을 바라볼 수 없게 된다. 케빈에게 맞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않고 일어나는 행위는 샤이론이 리틀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이었다. 그리고 그의 블루는 블랙으로 변질된다.


액체의 변신


액체는 온도가 낮아지면 얼어버린다. 얻어맞아서 퉁퉁 부은 얼굴을 세면대를 채운 얼음물로 식힌 샤이론은 이제 리틀도, 블루도 아니다. 그는 케빈에 대한 배신감과 터렐이라는 사회에 대한 분노로 까맣게 응고된 블랙이다.


푸른 문을 지나


샤이론은 학교의 푸른 문을 거칠게 열고 통로를 나아간다. 그것은 후안이 말한 네가 될 수 있는 파란색, ‘블루’라는 가능성의 문이었다. 샤이론은 이제 자신이 블루를 통해 블랙(폭력)이라는 정체성을 뒤집어쓰고 살 것이라고 결심한다.


학교 복도의 푸른 문들은 그가 평생 동경했던 블루의 잔상들이다. 그 문들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그의 눈빛은 차가워진다. 그리고 교실의 푸른 문을 열고 들어가 터렐을 의자로 내리치는 행위는 판사의 판결과도 같다. 샤이론은 더 이상 먹잇감이 아니라 포식자라는 지위를 터렐로부터 빼앗아 온 또 다른 포식자라는 판결.




블랙- 생존이라는 임계점


샤이론이라는 이름은 그리스 신화의 케이론(Chiron), 반인반마(半人半馬)의 켄타우로스와 같다. 그는 불사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헤라클레스의 독화살에 의해 끝없이 고통을 받는다. 완벽하게 후안의 겉모습을 뒤집어쓴 블랙(트러반테 로즈) 또한 마찬가지다. 그는 포식자이면서 먹잇감이고, 남자이면서 남자가 아니다. 그는 그 무거운 근육과 금니(그릴즈)라는 갑옷을 입고 위풍당당하게 케빈의 앞에 서지만, 그의 내면에는 여전히 리틀과 샤이론이 공존한다.


반인반마의 인격


그는 후안의 외양을 복제함으로써 포식자들의 정글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그것은 생존을 위해 스스로를 가둔 가장 단단한 감옥이었고, 응고된 것이 다시 액화되듯 블랙의 내면에 블루는 질식되고 있었다.

그의 내면에는 케빈을 통해 자신을 리셋하려는 욕망이 존재한다. 블랙은 그가 만들어준 음식을 먹기 위해 치아의 금니(그릴즈)를 제거하고 민낯으로 케빈과 만난다. 그것은 자신을 ‘만져준’ 유일한 존재에 대한 자연스러운 회귀다. 그에게는 이제 바닷물도, 자신을 잡아주는 후안도 없지만, 자신을 사랑해 준 사람과 상봉했던 기억은 남아 있다. 그가 케빈을 찾은 이유는 후안의 가죽을 뒤집어쓴 괴물인 나를, 여전히 파란 달빛 아래의 소년으로 봐줄 수 있는가. 묻고 싶어서다. 그리고 그 해답은 케빈만이 해줄 수 있다.


세상은 그를 '블랙'이라 부르며 두려워하거나, '호모'라 부르며 멸시했다. 그리고 리틀, 샤이론, 블랙은 세상이 규정한 대로 살아간 인물이다. 성정체성이 확립되지도 않은 리틀에게 ‘호모’라고 규정지었고, 폭력을 저지르지 않은 그에게 블랙이라며 먼저 이름을 지어줬다. 그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도 모른 채 사회가 예언한 대로 흘러갔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결정을 맡기지 말라던 후안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게 된 것이다.

너무나도 변한 블랙에게 케빈은 묻는다. ‘너는 대체 누구냐’고. 그러나 블랙은 대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자신조차 누군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러나 원한대로 살아오지 못한 것은 케빈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의 낙인을 피해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버티며 살아왔을 뿐이다. 그 둘은 서로의 실패를 인정한다. 그리고 블랙은 막 물 밖으로 나온 사람처럼 말한다.




"날 만져준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이 고백은 블랙이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말한 순간이다. 그는 사회가 규정한 '호모'가 되었고, 케빈이 지어준 '블랙'이 되었지만, 결국 케빈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라고 허락을 구하고 싶다. 왜냐하면 자신을 만져준(사랑) 사람은 케빈뿐이니까.


흰색 문으로의 회귀, 다시 아무도 아님


케빈의 현관문 색은 후안의 집처럼 흰색이다. 다시 수용과 가능성의 색이다. 블랙은 리틀 때와 다르게 검은색 옷을 입고 흰색 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는 이제 아무도 아닌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다시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고 싶다.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케빈은 파란색 옷으로 갈아입는다. 블랙은 그 파란색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자신이라는 가능성을 확인받을 수 있는 징표라고 생각했을까? 리틀은, 샤이론은, 블랙은 다시 파란색이 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지금 그들이 함께 있다는 것. 바닷물 소리가 들린다. 그들의 바다가.


그대 영혼은 선택받은 풍경이다.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