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해방일지(2022), 오늘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3초의 설렘, 7초의 기쁨, 5분의 행복

by 슴도치


이방인과 변두리의 정서


나의 해방일지 속 염 씨 남매들이 "인생의 반을 길 위에서 버린다"는 한탄은 단순히 수치상의 기록이 아니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진입하는 직장인의 경우, 편도 1시간 이상(왕복 2시간 20분 이상)을 도로 위에서 보낸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약 한 달(700시간 이상)을 이동 시간에만 소모하는 셈이다. 이쯤 되면 직장인이 아니라 끝없이 움직이는 유목민의 삶. 긴 출퇴근 시간은 물리적으로도 그들의 '해방'을 가로막는 물리적 장벽으로 작용한다. 거주지(경기도)는 '잠만 자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서울의 중심부로 진입하기 위해 매일 겪는 긴 이동은 삶의 소속감을 상실시킨다. 서울에서 풀(월급)을 찾아 떠도는 유목민처럼 정서는 여전히 변두리 산포에 있다.


해解,방放,일日,지誌



염미정- 해解의 여자

풀 해解(풀다, 가르다, 해부하다, 벗기다, 흩뜨리다, 열다, 용서하다, 놓아주다, 타이르다, 풀리다, 이해되다, 납득이 가다, 해이해지다, 떨어지다, 해지다, 화목해지다, 깨닫다, 또 깨달음)



빈 잔


세 남매 중 막내인 염미정(김지원)은 빈 잔 같은 인물이다. 인생에서 그녀는 끝없이 소모되기만 한다. 경기도 끝자락에서, 회사에서, 전 남자친구에게 빌려준 돈에서, 그녀는 채워지고 싶지만 계속해서 말라가기만 한다. 그녀에게 사람이란 더위나 추위처럼 견뎌내야 하는 온도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삶에서 갑자기 나타난 구 씨의 등장은 미정에게 상상 속에서나 존재하는 동물처럼 보였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것은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미정에게 정체불명의 구 씨는 유일하게 동정할 수 있는 인물이다.

추앙이라는 해방


인간은 자신보다 약한 존재에게 마음의 경계를 푼다. 구 씨는 '아무도' 아니다. 그가 아무도 아니라면 아무 말이나 할 수 있다. 미정은 그에게 자신을 '추앙'하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아무도 아닌 그를 이용해 자신의 인생을 해부하고, 벗기고, 흩뜨리고, 열고, 용서하고, 놓아주고, 타이르고, 이해하고 싶기 때문이다.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는 빈 잔의 미정에게 구 씨 또한 채워지지 않아 술만 가득 따르는 사람이다. 겨울이 되면 할 일도, 목적도 없을 구 씨에게 그녀는 '추앙'이라는 삶의 이유로, 자신의 이유를 충족시키고자 한다. 사랑이 아니라 높이 받들고 우러러봐달라고. 그로 인해 다만, 한 번은 가득 채워지고 싶어서. '마음에 사랑 밖에 없어. 그래서 느낄 게 사랑밖에 없어' 그녀의 해방은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구자경- 방放의 남자

놓을 방放(놓다, 내치다, 쫓아내다, 추방하다, 놓이다, 석방되다, 추방되다)


달리는 남자


자경은 달린다. 돈을 받아내려고, 피해 달아나려고, 바람에 날아간 모자를 주워오려고. 그는 드라마 내내 의미 없이 술만 마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늘 달리고 있다. 삶에 있어 자경은 놓고, 내치고, 쫓고, 추방하고, 추방된다. 그는 계속해서 달려야만 살 수 있는 인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맨 정신인 상태가 괴롭다. 그 달림으로 인해 자신이 피해 준 사람들, 버려둔 사람들, 죽어간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오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머릿속으로 그들과 실랑이하고, 작살을 내고, 달아나다가 지친 그는 또다시 술병을 찾는다. 그에게 술은 인자해지는 일이다. 술을 마시면 그토록 무섭고, 밉고, 미안한 사람들의 방문이 견딜 수 있는 일이 된다. 그들의 이야기가 들어줄 만한 것이 된다.


5분의 행복


그러나 술로 견디는 일은 매일 리셋(reset)되는 소모적인 일이다. 자경에게 술 이외에 자신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추앙할 수 있는 미정의 존재다. 그는 그녀의 말도 안 되는 제안이,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들어주고 싶다. 자신이 원하는 것도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를 채워줄 수 있다면 자신 또한 채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그들은 순정만화처럼 사랑을 나누지 않는다. 단지, 서로의 단점을 받아들임으로 서로를 추앙할 뿐이다. 문제를 직시하고, 교정하지 않고 추우면 난로를 사주고, 졸리면 끌어안고 잘 뿐이다. 그러므로 하루에 5분만 행복하자는 미정의 말은 자경에게 현실적인 치료제가 된다. 그는 술병을 내려놓고 미정을 향해 간다. 자경에게 해방은 ‘자신을 용서하는 일’이다.



일日의 여자- 염기정

해 일(해, 태양, 햇볕, 햇살, 햇빛, 햇발, 해의 움직임)


받는 여자


염기정(이엘)은 늘 외롭다. 그녀는 받는 여자다. 그녀는 사랑의 최고의 경지를 설명할 때 자신을 받는 여자라고 말한다. 역사책에서 참수당한 남편의 머리를 치마폭으로 받아내는 여자. 남편의 머리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기정은 늘 사랑이 고프다. 그녀에게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될 남자는 태양이고 햇살이다. 하지만 받고 싶어도 받아낼 남자가 없다. 이 남자도, 저 남자도 자신이 받아낼 남자로는 부족하거나 과하다. 미정이 겨울이 가기 전에 추앙받고 싶었다면 기정은 겨울이 오면 아무나 사랑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녀 삶의 목적은 누군가에게 1순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조건 없이 그 사람을 받아낼 것이다.


색 바랜 남자


기정에게 태훈은 ‘색이 바랜 남자’다. 기정은 태훈이라는 애 딸린 이혼남이 가진 삶의 피로와 권태, 결핍을 본다. 기정이 가벼운 말들로 세상을 냉소할 때, 태훈은 매일 삶의 무게(육아, 이혼의 상처)를 온몸으로 버텨낸다. 그로 인해 기정은 태훈을 연민하거나 존경하는 분리된 감정이 아닌 하나 된 사랑의 덩어리로 본다. 기정은 평생 "왜 나는 누군가의 1순위가 아니냐"며 울부짖지만, 태훈은 결코 그녀를 1순위로 둘 수 없는 상황(누나, 딸)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기정은 그런 태훈으로 인해 '1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를 괴롭히는 여자가 아니라 삶의 동반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결국 태훈을 받아내고 만 것이다. 그녀의 해방은 '1순위가 아닌 1순위'이다.


지誌의 남자- 염창희

기록할 지誌(기록하다, 적어 두다, 기억하다, 외다, 안표로 삼다, 안표)


수다의 기록


염창희(이민기)는 수다스럽다. 그는 수다스럽게 자신의 인생을 기록하고 기억한다. 창희는 남들처럼 살고 싶다. 자신의 여자친구가 떠나는 것도, 아버지가 자신을 구씨보다 인정하지 않는 것도 모두 자신이 처한 상황이 나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세 남매 중 가장 시끄럽고, 동시에 가장 정직하게 세상을 관찰하는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창희는 경기도는 서울이라는 노른자를 감싼 흰자위에 있음을 끊임없이 발설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비참함을 객관화한다.


창희의 드림,카


창희에게 자동차란 수단은 모든 역사는 차에서 이루어진다는 연애론에서부터 서울이라는 노른자로 자유롭게 진입하기 위한 입장권이다. 그는 긴 시간, 통근 길을 견디며 길 위에서 버려지는 시간을 혐오하기에, 더욱 '차'라는 독립된 공간에 집착한다. 차란 창희에게 있어 욕망과 성공의 산물. 그리고 롤스로이스를 모는 구 씨는 창희가 가보지 못한 '노른자의 끝'을 보여주는 인물이 된다.


완성된 해방


창희의 수다는 단순한 잡담이 아니라, 현실의 고통을 언어로 기록하고 해체하는 작업이다. 그는 이 드라마에서 자신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고 가장 희망찬 미래를 보여준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처지를 희화화하거나 논리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슬픔에 함몰되지 않는다. 직장 내 갈등이나 가족 문제에 있어 과장스럽긴 해도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대안을 제시한다. 이는 그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있기에 가능한 능력이다. 그리고 결국 창희는 깨닫는다. 자신이 있을 자리는 기가 막히게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는 허울 좋은 욕망과 열등감에서 해방돼 타인의 죽음을 지켜보고 배웅하는 자신의 자리를 찾으며 이 드라마에서 유일하게 완성된다. 그는 드림카라는 허상을 타고 노른자로 질주하는 대신, 자신의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당당히 자리를 잡으며, 타인의 죽음을 안표眼標한다. 창희의 해방은 ‘자신이 있을 자리’다.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우리 모두 해방되고 싶다. 직장에서, 육아에서, 관계에서. 이 지긋지긋한 길 위의 삶에서. 그러나 도망친 구 씨에게 해답이 없었듯. 그런 식으로 달아난 자리에는 해방이 없다. 어쩌면 진정한 해방이란 없을 수도 있다. 모든 문제에 완벽한 해답이 없는 것처럼.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나의 문제를 잘 알고 그 문제투성이인 나를 사랑하는 일이다. 3초의 설렘과 7초의 기쁨을 갖고 5분의 행복을 사는 일. 그리고 그 5분을 위해 오늘 나와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감기조차 걸리지 말라고 기도하는 일. 오늘 당신에게 좋은 일이 있었습니까? 아니, 있었을 겁니다. 아주 작은 순간이라도 그랬길 바랍니다. 될 때까지 해방되시길.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