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중 무엇이 더 좋을까?
사랑에 관해, 그것도 아주 큰 사랑에 관해 우리가 희망하는 두 가지 갈래가 있다. 하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둘 모두가 가능하다면 그것보다 좋을 수 없겠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이 둘 중 하나도 제대로 해내기가 힘들다. 아니, 힘든 정도가 아니가 아예 불가능하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동안 몇몇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거나, 몇몇 사람을 사랑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삶이라고 여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더 많이 사랑받기를 원하고 더 많이 사랑하길 바란다. 그것은 영원히 이뤄지지 못하겠지만, 결코 포기될 수는 없다. 단지 할 수 없기에 마음 한편에 묻어 두고는 적당히 스스로와 타협을 한다.
전혀 불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이 둘 중 하나만을 이룰 수 있다면 우리는 보통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기보다는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길 바랄 것이다. 그나마 거기에 근접해 보이는 사람들이 바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이다. 물론 정치인이나 탁월한 사상가들도 거기에 낄 수 있겠지만, 보통은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의 숫자만큼이나 그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그리 적절해 보이지는 않는다.
아무튼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특히 어린 시기엔 특히 더 연예인이 되거나 스포츠 스타가 되기를 꿈꾼다. 반에서 가장 사랑받는 아이에서, 학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로, 지역에서 나라로 결국 전 지구적으로 유명해지고 사랑받길 바란다. 물론 그런 꿈조차 꿀 수 없는 아이들이 절대 대다수를 차지하겠지만.
아주 특별한 어떤 아이들은 아이돌 스타가 되어서 전 세계적으로 사랑을 받기도 하고, 그만큼이나 커다란 부를 이룰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장점이 있다. 하나는 매우 안전해진다는 점이다.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의 부재가 그 사람의 불행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나의 안전에 대해서 많은 신경을 써줄 것이다. 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가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받게 해 줄 것이다. 내가 곤란한 일을 겪게 되면 그것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누구보다도 발 벗고 나설 것이다. 나를 해치지도 않을뿐더러 나를 해치려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줄 것이다.
다른 하나는 많은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그들은 그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쓴 돈이지만, 그들이 쓴 돈은 모두 내 수입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누군가의 일 년 연봉을 단 하루 만에도 벌 수 있다. 더해서 많은 것들을 공짜로 누릴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사람은 그 관심 자체가 힘이 되며, 그 힘은 광고 효과로도 아주 좋게 작용한다. 그러니 많은 것들을 공짜로 누릴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관심을 넘어서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 각자의 삶의 불행과 행복 양면을 모두 감당해 준다. 그러니 그 누가 사랑을 받는 것을 바라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사랑을 하는 것은 어떨까? 특히 모든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언뜻 들으면 이것은 참 좋아 보이긴 하다. 이것은 마치 종교적인 느낌도 나고,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인 듯 느껴지고 부처님의 자비로움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로 이것도 좋은 것일까?
만약 나는 사랑하는데 그들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넘어서 오히려 싫어한다면 나의 타인을 향한 사랑은 여전히 행복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참 어려운 일로 보인다. 우리는 아마도 엄청나게 큰 상처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모두를 사랑하는데, 아무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쓸쓸하고 비참한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당연히 모두를 사랑하느니 모두에게 사랑받는 선택을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끝일까? 만약 이것이 끝이라면 예수님은 왜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을까? 왜 이웃에게 사랑받으라고 안 하고, 원수에게 사랑받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왜 부처님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자비와 연민의 시선으로 보라고 말씀하셨을까? 그분들은 결국 이상적인 착각 속에서 살아가셨던 것일까?
다행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는 것과 사랑을 하는 일에는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커다란 반전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받는 일은 원래 좋은 것이긴 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에겐 치명적 결함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것이 무엇이든 익숙해지면 적응해 버리는 특징이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일은 너무도 커다란 행복이겠지만, 일 년, 이년, 십 년이 지나게 되면 최초의 감흥은 점차 시들시들해지고, 어디에서나 사랑받는 일은 너무도 당연해져서 더 이상 우리는 그것을 통해 행복해지기가 힘들다.
모든 것들이 마음만 먹으면 이뤄지고, 모든 것을 원하면 얻을 수 있고, 누구와도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삶이 수십 년 동안 동일하게 우리를 행복하게 하긴 힘들다. 우리는 어쩌면 꽤나 지독한 지루함과 권태에 놓일 수 있다. 오히려 죽음이 평온함으로 느껴질 정도로.
성취해야 할 목표도 사라지고, 원하는 것들도 희미해지고 만다. 타인은 더 이상 어떤 자극도 되지 못하고, 인간이 만든 모든 종류의 창작물들은 더 이상 감흥을 주지 못하게 된다. 삶이 재미없어지고 지루해지다가 결국 우울해지고 만다.
그래서 우리는 가끔 너무도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배우가 약물중독이나 혹은 우울증으로 인해 자살을 했다는 기사를 접하곤 한다. 거기엔 여러 가지 다른 요소들도 있었겠지만 어쩌면 많은 것을 이룬 존재의 공허함이 그 본질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진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것의 실현 가능성이다. 그것도 현실적으로.
누구에게나 사랑을 받는 일은 좋은 것이긴 하지만 결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열심히 노력은 하겠지만 그것을 실제로 이뤄주는 존재는 오직 타인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그저 나는 기우제를 지내듯 최선을 다해 사랑이라는 비가 내기길 기원할 뿐이다.
물론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잘해주려고 애쓸 것이고, 나를 더 예쁘고 잘 생기게 꾸밀 것이다. 더 많은 능력을 갖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고, 좀 더 재미난 사람이 되고자 할 것이다. 더 좋은 직장과 더 많은 부를 이루고 더 좋은 차와 집을 가지려고 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이 사회에서 '매력 있는 사람'이란 평가의 기준점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것이다. 하지만 내 노력이 실제적인 성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여부는 온전히 타인의 마음에 달렸을뿐더러 그 행위 자체도 내 행복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나는 그저 남들이 원하는 것을 수행했을 뿐이다.
우리는 자주 실수하고, 가끔 실패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상처를 입고 화가 난다. 나보다 딱히 노력도 하지 않는데도 내가 받아야 할 관심과 사랑을 가로채는 누군가를 보며 몹시 화가 나고, 이토록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의 어리석음에 대해 절망하기도 한다.
반면에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을 때 얻을 수 있는 수많은 장점을 모두 포기해야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내가 할 수 있다는 것에서 전혀 다르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에는 내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
내가 그 존재를 사랑하느냐와 그 존재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저 내가 사랑하면 된다. 특히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면 그 어떤 경우에도 화가 날 일이 없다. 모두가 사랑스러운데 도대체 왜 화를 내겠는가?
우리가 보통 그것을 실패하는 이유는 사랑을 하면 그 사랑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사랑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때 내가 한 사랑은 일종의 투자이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적절한 성과를 얻어야 한다.
물론 인간인 이상 이런 종류의 사랑을 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랑을 받고자 하는 것에는 나의 안전함에 대한 요구와 나의 이득에 대한 욕구가 그 본질임을 말이다.
우리는 사랑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래 잘 살고 싶은 것이었다. 그것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이 사랑을 받는 것이었을 뿐이다. 그러니 자기 자신의 삶을 스스로 온전히 감당할 수 있다면 우리는 딱히 사랑을 받을 필요가 없다. 사랑을 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대상에게 종속적인 것이며 내 삶을 스스로 감당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아이들이 그토록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이유이다.
나 스스로 온전히 설 수 있다면 모든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은 셈이고, 그것은 온전히 내 의지에 달린 일이 된다. 그래서 운이 좋다면 모두는 아니더라도 다수의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 무엇보다도 행복한 일이 될 수 있다. 사랑은 받을 때도 좋지만 할 때가 더 행복할 수 있다.
이제 우린 기로에 섰다.
아들러의 입장에서 이것에 대해 말하자면 그가 말한 과제 분리에서 타인의 사랑을 받는 일은 당연히 내 과제가 아니다. 그리고 타인을 사랑하는 일만이 유일하게 내 과제가 될 수 있다.
끝없이 나를 가꾸고 변화시켜서 나의 모든 것을 타인에 맞춰서 마치 내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타인의 과제인 것에 평생을 쓰느냐? 딱히 나를 변화시킬 필요 없이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하는 온전한 내 과제를 수행하는 것에 삶을 쓰느냐?
죽는 날까지 누군가에게 종속적인 존재가 되어서 그들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살 것인가? 내게 주어진 삶에 스스로 주인이 되어 온전히 서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살아갈 것인가?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 줄 것은 어떤 것일까? 그렇다고 해서 무엇인가가 오답이 될 수는 없다. 이건 그저 각자의 선택에 관한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