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꾸준한거북 May 22. 2023

책과 조우하다

시골 성장기 2

둘째 출산 후 100일이 지날 무렵, 일을 하기 시작했다. 본업이 학원강사 였기에 다시 뛰어드는 건 시간 문제였다. 정말, 시.간.(이)문.제였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늦은 시간까지 학원에서 일을 하다니... 시간이 늘 부족해서 허덕이는 시간가난자인 내가 왜 학원 일을 시작했을까. 그것도 땡글땡글 마냥 귀엽고 순한 우리 둘째를 두고.


암만 생각해도 그 당시에 왜 일을 시작한건지 모르겠다. 아는 학원 원장에게 연락이 왔고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게 흔쾌히 응한 후, 하루 4~5시간 수업을 하러 나갔던 것 같다. 나름 아이들이 있다보니 8시 이후에 끝나는 건 피했던 것이 내가 잘했다면 잘 한 일 중 하나였다. 학원일이 재밌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이 꼭 필요해서 나갔던 것도 아니었다.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또 없는대로 그렇게 살아가던 남편과 나였기에 돈 한 푼 더 벌자고 나갔던 건 아닌데 동네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어서였을까?


그렇게 몇 개월을 순순히 일하고 아이 돌보며 살아가다가 둘째를 출산한지 정확히 1년이 되었을 무렵에 슬슬 그만두는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몸도 피곤하고 속도 더부룩했다. 그 날도 비슷한 몸의 증상을 느끼고는 몸의 직감이 허락하는대로 편의점에서 임신테스트기를 사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해보았는데 웬걸!

두 줄! 연.년.생이 오는구나...........


그렇게 자의로 시작된 퇴사결심은 타의로 확정되어졌고 임신생활이 이어지면서 어린 둘째를 데리고 하염없이 시골길을 산책하고 또 산책했다. 고개를 돌리면 보이는거라곤 논밭과 들판, 사시사철 바뀌는 나무들의 춤사위, 쓰레기 소각하는 매캐한 냄새와 연기,그 어떤  ASMR도 감히 따라올 수 없는 청량한 새소리...

그것들을 또 온종일 감상하고 있는 나란 엄마.


그래! 이러고 있을 순 없다. 더이상 감상에 젖어, 시골살이 불평만 하면서 시간을 허비할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아름다운 대자연도 자연이지만 삼십대 후반, 시골에선 살아본 적도 없는 내가 시골에서도 깊은 산골짝에 들어와서는 '나는 자연인이다'를 찍지도 못하는 주제에 여기 있는 동안 어떤 삶의 감사조차 찾지 못한 채 이렇게 살면 안될 것만 같았다.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더 신나고 밝게 살아야한다는 마음이 먹어졌다.


책은 인생 여정에서 내가 찾아낼 수 있는 최상의 장비다. -미셸 몽테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첫째 아이 출산했을 때도 육아에 대한 궁금증을 책으로 풀어나가곤 했던 나였다. 아니 그보다 더 오래 전 초등학교 때부터 학창시절 내내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는 소녀는 아니였지만 한 번 읽으면 푹 빠져사는 그런 나였다. 글쓰기 대회 나가서 수상도 여러번 했었고, 라디오에 출연해 일기낭독까지 했을 정도로 나름 문학소녀였던 것 같은데........ 책을 좋아는 했던 거다. 그렇게 성장한 뒤 미스 시절에도 남들에게 말 못할 고민은 책으로 털어냈던 습관이 있어서인지 이 조용한 곳에서 내가 즐길 수 있는 단 한가지는 책이라는 판단이 들었고 그 날부터 다시금 도서관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가 오지라는 걸 증명해주는 도서관의 훌륭한 서비스가 하나 있는데 '가가호호 책배달 서비스'이다. 산간 벽지에 있는 가정에 원하는 책을 배달해 준다. 얼마나 훌륭한 서비스인지! 차를 타고 종종 읍내를 나가긴 했지만 어린 아이들을 키우다보니 내가 원할 때 나가기는 쉽지 않고 또 내가 원하는 책이 읍내 도서관에 없고 다른 마을의 작은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기에 책배달 서비스를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도서관에 가서 우연히 생각지 못했던 책을 발견해서 읽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책을 배달받는 재미도 꽤 쏠쏠했다. 기다려지고 설레이고 내가 원하는 책을 단 하나도 빠짐없이 싹쓸이 해다 주시는 선생님들의 미소가 반갑고 저 감사했다.


그렇게 인문, 자기계발, 육아, 교육, 소설, 에세이 등등 책을 먹어치우다시피 집중하다보니 창 밖의 하늘과 구름도 예뻐보이고, 새소리도 그 어떤 비싼 오케스트라 공연보다 값지게 들리고 계절이 바뀌면서 함께 피고지는 꽃들의 이름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자연에 눈이 뜨기 시작한 것이다. 시골환경에 집중해서 자연이 눈에 들어왔다기 보다, 책에 나오는 귀한 것들을 나 자신과 우리 아이들에게 접붙임하다보니 주변의 불평 삼을 만한 환경이 긍정적인 생각으로 전환이 되었달까. 나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도록, 그리고 때로는 이상의 세계로 이어주는 다리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었다.


'좋은 책이란 읽는 사람을 다른 생각, 다른 세계로 안내하는 책이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해주고, 모호했던 감정을 선명하게 만들고, 도망가고 싶은 현실을 직시하게 하는 책. 이해 안 되는 사람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하는 책. 무력감이 들 때 하고 싶은 일을 안겨주는 책, 그래서 읽다보면 자세를 고쳐앉게 하는 책. 베껴 쓰고 싶은 문장이 많아서 다급하게 노트와 펜을 찾게 하는 책. 궁극적으로 읽고 나면 나도 세상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도록 돕는 책. 이런 책이 저한테는 좋은 책입니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중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북한접경지에서 살고 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