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부턴 글 써 놓고 혼자 끙끙 앓지 말고 그때그때 말 좀 해.”
그가 변했다고 느꼈던 순간부터 써 모아 두었던 문장들을 기어이 카톡으로 보내며 이별을 고하자 전 남자 친구가 화를 누르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그는 나를 제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순간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 어려워하는 내가 집에 돌아가 편지를 쓰고, 문장으로 표현하기 힘든 큰 감정은 비슷한 시를 찾아 한참 뒤에 건네던 모습을 사랑했던 것 같은데, 마지막 순간엔 나를 처음 겪는 사람처럼, 그렇게 말했다.
마음을 말로 표현하려고 하면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볼이 불타던 아이에게 쓰는 일은 유일한 소통 방식이었다. 초등학교 때 방학 숙제로 쓰던, 선생님의 빨간색 덧글을 받기 위한 일기에는 학교에 안 가니 선생님을 못 봐서 허전하다는 보고픔을, 중학교 단짝과 쓰던 교환일기에는 대학생이 되면 꼭 너랑 자취하고 싶다는 애틋함을 적었다.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쓰던 싸이월드 공유 다이어리에는 각자의 이유로 매일 눈물 바람이던 시절을 무사히 버텨낸 것만으로도 서로를 칭찬해야 한다는 토닥임을 적었다. 목구멍으로는 죽어도 표현 못했을 마음들이었다.
나의 쇄골 밑에는 말하지 못하여 정체되어 있는 감정이 늘 존재했고, 무엇이든 쓰는 건 림프 마사지와 비슷했다. 마음을 쇄골 옆으로 슥슥 밀어내고, 겨드랑이를 통통 쳐서 팔의 안쪽으로 쓸어내린 뒤 손목 밑 혈관에서 손가락으로, 마지막에는 연필 끝으로 흘려보낸다. 노폐물이 빠지듯 일순간 상쾌하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순간일 뿐, 고질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감정들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쌓이므로 뭉치지 않게 하려면 계속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슬픔은 모기 물린 자국 같아서 삶의 어느 부위에 슬픔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나면 자꾸 간지럽다.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간지러운 슬픔은 흉터가 남을 때까지 후벼 파기도 한다. 나는 자꾸 찾아오는 고통을 연필로 벅벅 긁어 일기에 흉터로 남겼다. 그러다 스스로도 이 내용은 너무 많이 써서 조금 지겹다고 생각할 만큼 자주 찾아왔던 감정은 마침내 무언가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게 되기도 했는데,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이 다름 아닌 스스로를 다치게 했다는 일기가 셀 수 없이 되풀이되던 어느 날에는 이렇게 썼다. 한쪽 뿔만 크게 자라나 자꾸만 목이 꺾이는 사슴을 치료하는 다큐멘터리를 본 날이기도 했다.
“미움이 구부러진 뿔처럼 자라나 나를 찔렀다.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그를 찌르기 위해 길러낸 미움이었다. 그 견고한 물질의 씨앗이 내 안에도 있다는 걸 잊은 채, 언젠가 반드시 그를 다치게 하겠다고 다짐할 때마다 뿔은 무서운 속도로 자랐다.
나는 나의 모습을 가진 사람만 오래 미워할 수 있다. 나를 닮지 않은 사람은 쉽게 용서한다. 나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리 눈을 흘겨도 뿔이 뾰족하게 자라지 않았다. 뿌리가 내 안에 없는 미움이라 자라더라도 쉽게 시들곤 했다.
뿔이 닮은 사람을 향해서만 뻗어 나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즈음에는 이미 눈이 먼 채로 내 손을 벗어나 빙글빙글 헤매고 있었고, 결국 오늘 그의 말버릇을 빼닮은 나를 마주하자 준비한 대로 깊숙하고도 선명하게 찔렀다. 뿔의 제일 가까이에서 그와 비슷한 냄새를 풍기는 나를. 그를 미워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일은 결국 스스로를 미워하지 않을 방법인 걸까?”
이렇게 어떤 마음을 내 세계 밖의 것과 연결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같은 일기를 쓰지 않을 수 있었다. 현실에서 비슷한 슬픔이 또다시 밀려오면 이제 나는 일기의 장면을, 잘못 자란 뿔이 자신을 찌른 사슴을 떠올린다. 왠지 그 아픔은 소설 속 주인공의 감정처럼 느껴진다. 같은 슬픔이 반복되는 걸 막을 수는 없지만, 같은 슬픔으로 나를 갉아먹는 일은 더 이상 이 세계엔 없다. 적절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해 아리송하게 혼자 간직하던 해결책을 <사생활의 천재들>에서 정혜윤은 이렇게 풀었다.
“누구나 자신 안에 감옥을 가지고 있어. 어느 행복한 사람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불타는 사랑일 수도 있겠지. 다른 사람에게는 고통일 수도 있겠지. 어쩌면 자신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 가족일 수도 있겠지.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골라든 맘에 들지 않는 일자리일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기서 출발해 길을 떠나질 못해. 자기 고통이나 행복, 배신, 서글픔을 확대하고 그곳에 주저앉긴 쉬워도 바로 그곳에서 출발해서 자신을 확장시켜 나가기는 너무나 어려워. 고통을 통한 확장이 아니라 고통을 통해 축소되는 경우가 더 많을 수도 있을 거야. 너의 책은 네가 고통을 느끼는 바로 그 한 점에서, 너의 감옥에서 네가 출발해 길을 떠났다는 걸 의미해.”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던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똑같은 일기를 몇 번이고 쓰다가, 그것을 나의 이야기가 아닌 것처럼 말할 수 있어졌을 때 갇혀 있던 감옥의 문고리를 벌컥, 하고 젖혔는지 모른다. 그렇게 열린 문 틈으로 바깥과 연결되어 쏟아지는 해방감을 맛본 미움은 (여전히 문 밖으로 발을 내딛지 못한 채 서있더라도) 더 이상 나만의 미움이 아니다. 반복해서 써야만 하는 슬픔은 끊임없이 생기겠지만,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가 같은 슬픔으로 일기를 쓰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것을 믿으며, 오늘도 림프 마사지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