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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희 Jan 12. 2023

너는 네 인생 살아

나의 큰언니 소희에게.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책상 앞에 가만히 앉아 있으니 귀에서 삐 신호음이 들린다.

언니. 큰언니 모습이 머릿속에, 목소리가 귓속에서 선명하게 기억되는 것을 붙잡고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


내가 고민을 말하면 언니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너는 네 인생 살아"


언니는 크리스마스 전구가 한창 반짝이는 12월 20일 새벽에 하늘로 떠났다. 그 이전 한 달 동안 병원 집중 치료실에 있었고 그리고 그 집중 치료실에 있기 전에는 대학생 둘의 엄마로 투덜거림이 너무도 심한 중년 부인이었다. 폐암이 의심된다는 소견에 조직검사를 위해 병원에 입원했고 검사를 하던 중 심정지가 왔다.

멈춰버린 심장은 되돌아오지 못했고 에크모라는 심장을 대신해 주는 기계와 산소 호흡기로 한 달간 연명을 하다 속절없이 떠나버렸다.


나와 언니의 마지막 통화는 언니가 조직검사를 위해 병원에 입원한 날이었다. 언니는 나에게 검사 일정을 숨겼기에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소처럼 전화를 했다. 우리의 통화는 일상의 중요치 않은 대화였고 내가 언니에게 간단한 의견을 묻는 것이었다.

"민희야 너 마음대로 해, 그쪽에 네 의견을 말해 보고 아님 말지 뭐.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그래 언니 알았어, 담당자한테 물어볼게 우선 끊어봐"

나는 문제를 해결할 생각에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음날 오후에 언니에게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았다. 시간을 두고 다시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카톡을 남겼지만 답이 없었다. 그 시간 언니는 조직검사 중 심정지가 되어 이미 혼수상태였다.

연락이 온 건 언니와 전화를 끊은 지 이틀째 오후에 형부의 뜬금없는 전화였다. 첫마디에 놀라지 말고 들으라는 말에 나는 무언가 무서웠다. 직감이 그랬다.

"형부 나 안 들을래, 뭔지 모르지만 좀 무서워. 김서방한테 전화해"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아이 둘을 각기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 데려와 피아노에 넣어주고 일정이 끝난 후 집에 데려왔다. 비로소 모두 집에 도착한 후에 형부에게 전화를 다시 걸었다. 그리고 언니의 상황을 들었다.


이틀 뒤, 병원에서 언니의 상태를 설명해 준다기에 식구들과 병원으로 갔다. 담당의는 심정지가 30분이나 이어졌고 에크모로 움직이는 심장의 기능도 겨우 10% 정도여서 회복이 쉽지 않을 것이라 했다. 최선의 방법은 심장 이식이지만 우선 지켜보자 했다. 병원 복도에 주저앉아 언니가 회복될 때까지 있고 싶었다. 혼수상태인 언니를 두고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형부가 이미 하룻밤을 있어 봤지만 병원에서 보호자가 복도에 밤새 있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것이 더 괴롭다고 했다. 집에 오는 길에 가슴이 미어져 숨 쉬는 게 힘들었다. 남편은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했고 나는 가방을 뒤적여 타이레놀을 먹었다.

의사가 언니의 심장 상태를 말할 때 나는 내 심장을 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심장은 간이나 신장처럼 부분 이식이 안 되기에 바보 같은 말을 하진 않았다. 왜 심장은 하나일까. 한강을 따라 집으로 오는 길에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언니는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며칠 뒤,

먹고 있던 갑상선 약을 받으러 다니던 내과에 갔다. 수 년째 다니는 병원으로 선생님께 개인적인 이야기도 가끔 하기에 언니의 이야기를 꺼냈다.

"힘들 것 같아요. 병원에서 심장기능이 10% 라고 했다면 실제는 그보다 못할 거예요. 내가 학교 다닐 때 우리 동기가 혈흉이 왔는데 의사 친구들이 다 들러붙었어도 못 살렸어요. 물론 기적도 있긴 해요. 집에 가서 시간을 보내시라고 했던 환자가 걸어서 병원을 다시 오기도 했어요. 얼굴이 정말 새카맣게 변했던 환자였는데요. 하지만 그건 정말 없는 일이고 대부분은 기적을 바라긴 힘들어요. 인명은 재천이에요."

이제 칠순에 접어든 선생님은 의사로서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차근히 말씀해 주셨다.


내과병원을 나서서 한 시간쯤 가야 하는 언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운전을 시작했다.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을 것 같은 무서움에 한 번이라도 언니를 보고 싶었다. 주말에는 병원 입구에서 신원확인을 거쳐 들어갔지만 평일에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었다. 그것도 모르고 병원 고객 센터와 심장 집중 치료실에 전화를 여러 번 하느라 주차장에서 한 참이나 시간을 허비했다.

고객 상담실에서는 우선 병동에 가서 직접 문의를 하라고 했고 나는 무작정 언니가 있는 층에 도착해 벨을 눌러 면회를 하러 왔다고 했다. 마침 안에서 나온 간호사는 며칠 전 나를 봤던 것을 기억하고 눈인사를 했다.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 간호사를 보기 전부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줄줄 흘렀다.

"언니를 볼 수 있을까요. 언니가 얼마나 남았을지 몰라 우선 왔어요."

간호사는 잠시 후 다시 나오겠다고 하곤 들어가서는 다행히 허락을 받아냈다며 나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했다.


두 개의 자동문을 통과하고 소독제를 손에 바르고 파랗고 얇은 비닐 옷을 입고 몇 개의 방을 지나 제일 안쪽에 언니가 있는 방을 안내받았다. 알 수 없는 기계들과 거기서 나온 수십 개의 줄이 언니와 연결되어 있었다. 언니는 입에 산소 호흡기 관을 꼽고 있었고 눈을 꼭 감은채 잠들어 있었다.

"언니 나 왔어"

한 마디에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렀다. 삐 삐 거리는 기계의 소리들 스읍 스읍 거리는 산소 호흡기 소리 속에 언니는 이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자고 있었다. 낯설었고 이상했고 언니가 너무 불편해 보였다.

고작 며칠 전에 즐겁게 통화를 했었는데 말 한마디도 못 하는 우리의 상황에 가슴이 무너졌다. 지금이 마지막일지 며칠 후가 마지막일지 알 수 없기에 언니에게 해 주고 싶은 말들을 했다.

"언니, 언니는 나에게 자랑스러운 큰언니였어. 언니는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언니 너를 자랑하고 다녔었어..."

힘없이 누워있는 언니를 보니 이 절망적인 상황이 감당이 안 되었다. 손도 잡아 보고 발도 잡아 보고 다음에도 또 만져볼 수 있을지. 10여분의 면회를 끝내고 나오려다가 침대 끝을 잡고 매달려 울었다.

"언니 일어나서 나랑 그 쓸데없는 통화들 해. 꼭 일어나야 해"

병실을 나오려는데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언니를 먼 곳에 놓고 오는 느낌에 등조차 돌릴 수 없었다. 그러면 우리가 영영 못 만나게 될까 봐 이 현실이 무서웠다.

병실을 나와 면회 허락을 받아 준 간호사에게 정수리가 땅에 닿도록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했다.


일주일 뒤 언니는 수면치료를 멈췄고 다행히 눈을 떴다. 하지만 언니의 이름을 불러도 나와 눈 맞춤을 못 하고 시선이 허공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래도 이게 어딘가. 심정지였던 사람이 눈을 떴는데 심지어 내 말이 들리면 눈을 꼭 감아 보라는 요청에 그대로 해 주었다. 시선은 마음대로 안 되어도 내 말은 듣고 있었다. 언니의 손을 잡아주고 함께 간 언니의 큰 딸과 사랑한다는 말도 많이 해 줬다.

"언니 걱정하지 마 큰애는 내가 밥도 챙겨 먹여서 보낼게. 둘째 교환학생 가는 것도 내가 잘 챙겨 주고 있어. 걱정하지 마."

우리가 병실을 나설 때 언니는 갑자기 오른팔을 들었다. 그 순간을 간호사가 봐줬고 "보호자님께 잘 가라고 인사하시네요."라고 설명해 줬다. 조카와 나는 아직 힘들지만 호전된 언니의 모습에 감격을 했고 편한 마음으로 면회를 마쳤다.


하지만 내가 본 언니의 생전 모습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우리가 다시 만난 건 12월 20일 새벽 언니의 병실이었다. 아무 기계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적막한 공간에 언니는 홀로 누워 있었다.

"언니 나 왔어."

나는 지난번처럼 같은 인사를 했다. 그러나 안부를 묻거나 나의 일상을 설명해 주거나 그런 건 할 수가 없어서 언니 사랑해 언니 사랑해만 반복했다. 그 병실에 길게 있고 싶지 않아 서둘러 나왔다. 나의 큰언니가 아니어서 인사해 주고 싶지 않았다. 언니의 모습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언니가 침대에 실려 병실을 나왔고 조카들과 형부는 언니를 따라 가는데 나는 복도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버렸다. 언니 언니 어디 가냐고 울었고 언니는 대답도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장례식은 모든 과정이 너무도 잔인했다.

익숙한 언니의 사진이 올라가 있는 낯선 제단도 그 아래 피워져 있는 향도.

사람들은 왜 그리도 많이도 오는지.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나온 언니는 아는 사람이 왜 그리도 많은지 동기라며 후배라며 선배라며 신부님들이 오셨다. 언니가 다니는 성당에서는 연도를 드린다며 시간의 틈도 없이 계속들 오셨다. 왜 사람들이 자꾸 언니를 보러 오는지. 그런데 언니는 없었다. 이렇게 손님이 많이 오면 언니가 나와서 인사를 해야 하는데 정작 언니가 없었다.


나는 현실과 비현실의 어디에 있었다.

밥을 먹거나 남편과 함께 늦은 밤에 집에 가거나 그럴 땐 현실이었는데 제단 위의 언니 사진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나의 국민학교 친구가 조문을 왔는데 나는 언니를 찾고 있었다. 언니 얘 왔어!라고 하려 했는데 아.. 언니의 장례식이라 내 친구가 온 것이구나. 뒤늦게 자각했다.


입관을 하던 날 서울 경기 지역은 한파에 폭설이 내렸다. 조카들은 엄마가 눈을 좋아했는데 엄마 떠나는 날 눈이 와서 너무 좋다고 울었고 나는 눈이 너무 아름답게 내려서 하늘 어딘가에 언니가 있을 것 같아 울었다. 입관식과 장례미사 마지막 유골함으로 언니가 남기까지 모든 일정을 다 참여했지만 나에게 가장 마음 아프게 남은 건 임종 직후 언니의 야윈 모습이었다. 그래서 언니의 영혼이 떠난 빈 몸이 유골함에 담길 때에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나의 큰언니 소희는 나보다 일곱 살이 많다. 내 어릴 적 기억의 대부분은 가난의 불편함이었다. 방 두 칸 지하실 집에서 살 던때 언니는 현관문 앞의 책상에서 스탠드를 켜고 늦은 밤까지 공부를 했었다. 잠결에 일어나 보니 언니가 그러고 있었다. 몇 번의 이사를 했어도 집이 좋아지진 않았고 화장실이 밖에 있기도 했다. 자식 네 명중 언니는 첫째였고 아롱이다롱이 동생이 세명이나 되어 언니는 동생이 너무 많아 싫다고 했다.

재수를 해서 89학번이 된 언니는 혜화동 학교에 합격자 대자보를 보러 아침에 혼자 나갔고 그 합격 전화를 내가 받았다.

"민희야 나 붙었어!"

언니는 공중전화에 줄을 서서 전화를 했겠고 나는 그 전화를 받고 이제 겨우 6학년의 어린 나이였지만 재수하며 고생한 보답 같아 감격의 눈물을 흘렸었다. 하지만 가족 누구에게도 언니가 합격해서 내가 울었단 말은 민망해서 안 했고 물론 언니도 모른다.


내가 갑자기 짐을 싸들고 캐나다로 가버렸던 20대의 일은 두고두고 큰 일로 남았는데 그 일은 큰언니와 형부의 대화가 불씨였다. 공부에 뜻은 있으나 집안 형편도 나의 머리도 모두 채워주질 못해 자아를 찾고 싶어 할 때  언니와 형부가 민희는 외국에 나갔다 오면 시야가 넓어질 것이란 대화를 했었다.  

그 말을 듣고 몇 개월간 준비 끝에 유학도 아니고(돈이 너무 없어 꿈도 못 꿨다.) 나는 여행 무비자로 캐나다를 가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이 지금의 내가 된 시작이었다.


언니는 항상 “넌 나와 달리 하고 싶은 것 하고 살아서 좋아 ”라고 했었다. 자기는 첫째라서 엄마도 아빠도 너무 요구하는 것도 많았고 아르바이트로 받은 돈도 모두 집 생활비로 드린 탓에 본인 것 없이 살았다고 했다. 가끔 언니랑 대화를 하면 나이가 쉰이 넘었는데 아직도 80년대 언니 고등학교 때, 대학교 때 시절의 상처에 묶여 있는 게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니의 이야기를 어쩐지 다 들어 주고 싶던 날도 가끔은 있었다.

"우리 집은 너무 가난했어. 사실 그렇게 가난할 필요가 없었어. 아빠가 대기업에 다니고 당시엔 흔하지 않은 의료보험증이 있었어. 80년대에 블루칼라인 노동으로 먹고사는 집이 얼마나 많았는데 왜 그렇게 자식들 건사를 안 하고 시골에서 친척들 데려오고 그랬는지. 그 좁은 집에 왜 그렇게 애들이 넷이나 있는 집에  남들까지 같이 있느라 우리가 얼마나 불편했는데. 나는 내가 번 돈 제대로 써 본 적도 없어 매번 달라고 그러고 뺐어가고. 대학교 졸업 하고 나서도 엄마도 아빠도 돈 해달라고 얼마나 그랬는데. 정말 지겨워. 내가 우리 애들 키우면서 그래서 집에서 전화 오면 받기 싫어진 거야."


언니는 친정 식구들의 전화를 싫어했다. 그 전화는 즐거운 일보다는 매번 첫마디가 한 숨이었고 별 일도 아니면서 매번 큰일이 났다고 말씀하시는 아버지 엄마의 뻔한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언니는 쓰러지기 얼마 전에도 나랑 통화를 하면서 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한테 전화 좀 그만하시라고 했어. 젊었을 땐 그렇게 마음대로 하시더니 왜 사사 건건 전화하시냐고. 언제부터 우리랑 상의하셨냐고 했어"

팔순의 부모님은 항상 나에게 걱정을 안겨주는 분들이셨다.막내인 나에게 부모님은 연세가 많게 느껴져서 였다. 하지만 언니는 살면서 할 만큼 했어도 원하시는 것이 끝이 없다고 진저리를 쳤다.


그래 언니는 할 만큼 했다. 큰 딸이라서 집안의 대소사에 얼마나 많은 시달림을 받았는지 나는 알고 있다. 없어서 상처받은 일도 있다고 말했을 때 너무 마음이 아펐다.


“내가 대학 때 친구들이 갑자기 점심을 먹으러 장터국수에 가자는 거야. 당시에 그 체인점 있잖아. 그 국숫집이 비싸지도 않은 겨우 천오백 원? 이천 원? 정도였는데 내가 그 돈이 없었어. 겨우 차비만 있을 때 였는데 이미 가고 있는 터라 빠질 수가 없었어. 우리 과에 부잣집 애가 있는데 착하기도 해서 내가 큰맘 먹고 말했었어.

"내가 돈이 없어서 그러는데 네가 내 점심 값 좀 내줄래?"하고 그런데 그 친구가 너무도 흔쾌히 그러겠다는 거야. 그게 스무살 남짓 나이에 얼마나 민망하고도 큰 일이었는지 잊히지 않아.“


대학을 졸업한 지 30년이 되었지만 언니의 장례식엔 친구들이 참 많이 왔고 그리고 언니가 말했던 장터국수의 국수 값을 내 준 그분도 오셨다.


발인날 아침 성당 미사는 언니의 학교 동기 신부님들 네 분이서 집전해 주셨고 나는 언니와의 마지막 인사를 성체를 모신 후 관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로 했다.

언니의 사진을 쓰다듬고 벨벳으로 덮인 관에 머리를 기대니 언니가 안아주는 것 같이 포근했다.


2022년 12월 22일 나의 큰언니가 천사가 되어

갑곶 순교 성지에 안치되었다.


나는 매일 언니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언니의 사진을 보며 보낸다.  지난 10월에 치즈 수업 할 때 오고 싶다는 걸 장난반으로 생각하고 다음에 수업하면 그때 오라고 했던 일이 내내 후회되고 뮤지컬이나 공연 같이 보러 가자고 한 것도 다음에 가자고 말한 것도 후회된다.


언니의 장례식에 오셨던 분들은 나를 작가 동생이라고 부르셨다.

“그 작가동생 이시구나.. 언니가 자랑 많이 했어요”

나는 항상 잘난 거 없는 부끄러운 동생이라 생각했는데

언니는 나를 자랑했다는 것을 언니가 떠난 후에 알게 되었다. 언니! 언제 만날 때까지 거기 잘 있어. 내가 많이 사랑해 언니.정말 보고 싶다.

이 일이 현실이 아니길 매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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