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드러지게 핀 꽃이 이렇게 슬퍼 보일 줄이야.
차가움이 남아있는 아침에 아이 둘을 학교와 어린이 집에 보내고 돌아올 때면
아직 옷깃을 여미는 날씨에 안정감을 느꼈다.
다행이다 아직 추워서.
나무의 가지도 앙상해 추움이 남아 있음을 눈으로도 알 수 있었다.
계절이 변하는 게 싫었다.
그저 지난겨울이 앞으로도 한참 계속되기를, 시간이 아주 느리게 가기를 바랐다.
그래야만 나의 아픈 마음도 그 자리에 머무르기 낯설지 않을 테니까.
밝은 봄이 되면 햇살도 좋아지고 옷도 얇아지고 사람들의 얼굴에도
웃음이 필텐데, 나의 마음은 그걸 받아들이기엔 아직 밤처럼 어두워 봄과는 분명 어울리지 않을 터였다.
아이 둘을 보낸 오전 나절은 청소와 커피와 그리고 시간에 쫓기는 원고를 읽으며 보내는데
소파에 앉아 한 숨을 돌리는 틈에 건너편 아파트에 활짝 핀 목련이 보였다.
오래된 아파트와 함께한 목련 나무는 너무 커서 멀리서 보면 거대한 전등을 켜 놓은 듯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 봄이다. 봄이 결국 왔다.
그렇게 밀어내고 싶었던 봄이 흐드러지게 핀 꽃으로 결국 와 버렸다.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건만 속수무책 마주쳐 버렸다.
매일 아침마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이렇게 가버리는 게 어디 있냐고!"라고
애통하게 쏟아냈던 언니와의 마지막 인사가 귓가에서 울려댄다. 꺽꺽대며 울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맥없던 나의 울음소리.
가만히 앉아 언니를 생각해 본다.
목소리 까랑까랑했던 어투, 자기 말이 옳다고 벽창호 같이 답답하게 일방적으로 쏟아내던 조언들.
너무 피곤한 스타일이라고 쏘아 부치곤 한 번씩 연락을 안 하고 지냈던 우리.
그 순간들로 나를 끌고 가고 싶을 때가 많다.
우리가 함께할 시간이 생각만큼 길지 않을 것이라고 미래의 내가 말을 해 줬어야 했는데 이젠 다 지나가 버려 아무것도 잡을 수 없게 되었다.
어제 오랜만에 꺼내 입은 점퍼에서 지난가을로 표기된 영수증이 나왔다.
이때만 해도..
나는 됐다 싶어 영수증을 구기려다 다시 잘 펴서 책상에 올려뒀다. 언니가 아직 이 세상에 있던 때의
시간들이 고작 영수증임에도 버릴 수가 없었다.
얼마 전 꿈에 언니를 만났다.
언니는 꿈에서도 이 세상 사람은 아니었는데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잠시 휴가를 나온 사람처럼 그 시간을 즐겼다. 하얀 테이블에 마주 앉아 한 팔로 머리를 기대어 언니와 웃고 떠들었다. 우리의 대화는 유쾌했고 나는 소리 나게 웃어젖혔다. 공간이 실내였는지 바깥이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밝았었다.
언니가 졸리다고 눕겠다고 해서 따뜻하게 이불을 챙겨주고 나서 꿈에서 깼다. 그 꿈을 꾸고 난 뒤 신나게 웃으며 떠들었던 그 모습에 며칠 동안 기분이 좋았었다.
요즘 나의 일과는 뭐가 하나 삐끗할까 매일 아슬아슬하다.
1학년에 막 입학한 첫째는 월화수목금 매일 하교 시간이 다르고, 방과 후 수업의 준비물도 매일 바뀌기에
혹여 아이 하교 시간에 내가 어디 멀리 있을까 봐 혹여 준비물을 놓칠까 봐 긴장의 연속이다.
아침마다 냉장고에 붙은 일과를 확인하고 오늘은 1시 40분 하교, 내일은 2시 10분 하교. 시간과 분이 어느 날 하루도 같지 않으니 이건 차라리 내가 학교를 다니는 편이 스트레스를 덜 받지 싶을 정도다.
이러는 와중에 둘째가 아침부터 뭐가 마음에 안 들어 현관에 드러눕기라도 하는 날엔
한 명은 늦었다고 난리, 한 명은 안 나간다고 난리의 전쟁을 온몸으로 어르고 달래야 하는데
나도 사람인지라 위층 아래층이 울리도록 소리를 지를 때가 있다.
"안 가려면 말아!!! 이것들이 아주 엄마가 잘해주니까 고마운 것도 모르고! 내가 니들 심부름 꾼이야!!"
라고 하지만 결국 읍소를 해야 하는 쪽은 내가 된다.
이렇게 보내고 난 뒤엔 혼이 쏙 빠져서 집에 들어와 마감을 몇 주나 밀린 원고를 본다.
원래는 2주 전에 끝났어야 하는 편집이었다.
나는 우선 약속한 시간 날에는 무조건 연락을 하는 편이라 출판사에 정리가 된 부분까지라도 보내고,
다음 언제까지 가능하겠다는 약속도 한다. 그리고 그 약속의 시간에 마감을 못 했어도
다시 일부분을 보내고 시간이 또 얼마큼 필요하다는 메일을 보낸다.
지난주까지 보낸 원고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었다.
혼이 쏙 빠지도록 에너지를 쏟아 9부 능선의 원고를 보내고 난 뒤 후유증인지 이번주 내내 원고가 진전이 없다.
마음은 슬픔을 가득 안고 있지만 나의 일상은 너무도 분주해 시간이 어찌 흘러 버렸는지 모르는 날들이 더 많다. 매일 아침마다 언니가 머무는 북쪽 하늘을 보며 오늘은 잘 잤냐고 물어보고 나도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말을 해 준다.
우리가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다른 세상에 있지만 그럼에도 잘 지내고 있으라고.
보고 싶은 언니에게 기도를 보낸다. 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