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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 에포크 Mar 15. 2023

헬렌켈러의 그녀들

헬렌켈러의 평전 A-Life를 읽고

다들 안녕하셨어요?

너무 길어진 글에 미리 양해의 말씀을 드려요.

요즘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고 싶어  한 권을 읽었습니다.

헬렌컬러란 이름을 다 아실 겁니다.

헬렌켈러는 어릴 적 열병으로 결국에는 시각과 청각을 잃고 말죠. 말까지 못 하고 난폭해진 어린 그녀를 앤 설리반 선생님이 도와줍니다. 그렇게 선생님을 통해 헬렌은 세상과 이어지고 그 당시 가기 힘들던 대학을 여성으로서, 그리고 장애인으로서 최초로 입학하게 됩니다.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이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한 이야기죠.



이때, 순간 드는 생각이 듭니다.

헬렌 켈러의 이야기에서 왜 앤 설리반선생님 이야기만 나오는 걸까? 부모님은?

우리는 헬렌 켈러와 앤 설리반선생님이야기는 알지만 그녀의 부모에 대해 거의 모릅니다.

헬렌은 그 당시에도 드문 심각한 시각, 청각, 언어 3중 복합장애인데, 장애를 처음안건 부모일 텐데 그녀의 부모는 뭘 했을까? 란 의문이 들더라고요.  시대에 장애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했을지 헬렌의 부모님이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찾아 읽은 책이 있습니다.

헬렌켈러의 평전 A-Life입니다.

이 책을 지은 작가는 도로시 허먼입니다. 유명한 전기작가로 그녀는 이 책을 쓰기 시작해 장장 4년 동안 헬렌 켈러의 고향 앨라배마와 앤 설리번의 모교 퍼킨스 학교등 헬렌켈러와 앤 설리번의 흔적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고 해요. 그 덕분에 이 평전은 오히려 시대가 추앙했던 성녀와도 같던 헬렌켈러를 보다 객관적이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진실들을 풍부하게 펼쳐내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로 더욱 빛나게 한 평전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냉정한 평에서는 간혹 실망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사람들과 세상과 소통하려고 했고, 또 치열하게 자신의 생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평전을 읽을수록 그녀에게 빠져들었어요. 그 어떤 소설의 주인공보다 극적이고 드라마틱한 인물이란  사실에 놀랐습니다.

그저 장애의 성공사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매력적인 여성을 알게 된 기분이었습니다.

너무 흥미로워서 책을 펼치자마자 550페이지를 그날 하루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그녀의 어머니는 케이트 켈러입니다.

나름 귀족의 집안의 딸로 멤피스에서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스물두 살에, 상처한 컬러대위의 재혼상대로 결혼했습니다. 그는 케이트와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났습니다.

남부전쟁 후 어수선했던 시기, 남부귀족티를 내던 명랑한 켈러 대위와 결혼하고 보니 사실은 가까스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는 걸 알고 케이트는 당황했습니다. 그의 집안은 명문가집이지만, 수입이 충분치 않아서 면화 농장 소유주로서, 지방주간지를 발행하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습니다. 케이트는 화려한 영애 시절을 청산하고 농장일을 하며 새벽부터 혼자서 거의 모든 일들을 해냈다고 합니다. 남편과는 며칠씩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생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운동과 독서, 농장일과 꽃밭을 가꾸며 결혼생활의 불만을 해소하려고 했다고 합니다.

헬렌 켈러 부모. 오른쪽이 헬렌의 어머니 케이트.

이때 태어난 장녀, 헬렌켈러. 헬렌이라는 이름도 케이트가 지었습니다. 1882년, 19개월이 된 아기는 심한 열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열은 차츰 가라앉았고, 아기는 겉으로 보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며 깊은 잠을 계속 자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회복된 줄 알았던 어느 날, 케이트는 눈앞에서 손을 흔드는데도 아기의 눈꺼풀은 닫히지 않았고, 저녁식사를 알리는 종을 쳤을 때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챘습니다. 그제야 켈러부부는 병을 앓고 일어난 줄만 알았던 아기는 빛도, 소리도,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장애는 보기 드문 것이었습니다. 시각과 청각이 손상되어 언어장애까지  갖게 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부분 장애를 가지고 있는 아이들은 쉽게 내다 버리는 일이 많았고 시설로 보내버리거나 심지어 일부러 죽음에 이르도록 방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주변 사람들은 케이트에게 아이를 시설에 보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고 해요.

헬렌은 점점 난폭해져 갔습니다. 케이트는 아이를 이끌어줄 방법을 몰랐습니다. 단순히 모성애만으로 헬렌을 진정시킬 수 없음에 괴로웠습니다. 케이트의 나이 고작 스물네 살이던 일입니다. 케이트가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그녀의 주변의 가족, 지인들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케이트는 언젠가 친구들에게 털어놓기를,

"내 삶 속 어딘가에 매복해 있던 운명이 내가 스물네 살 때 내 마음속의 기쁨을 공격해서 다 죽여놓았어." 란 말을 했다고 합니다.

끔찍이 사랑했던 딸이 이제는 장애아라는 말을 들은 뒤 케이트는 상처받은 자존심, 죄책감, 슬픔으로 휩쓸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난폭해진 헬렌을 겨우 재우고 나온 케이트는 언젠가 읽었던 찰스 디킨스가 쓴 글이 떠올랐습니다. 시각과 청각의 장애가 있지만 어떤 기관의 교육을 받아 일상생활을 해내게 된 여성 로라 브리지먼의 이야기였습니다. 켈러부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장으로 로라브리지먼을 교육해 준 새뮤얼 그래들리 하우이 박사를 수소문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개혁자 중 한 명으로 퍼킨스 시각장애 학교의 초대교장이었습니다.

그러나 부부가 찾았을 때는 이미 하우이 박사는 죽은 지 여남은 해가 지난 후였습니다. 그러나 켈러부부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케이트는 로라처럼 헬렌도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겠다고 굳게 마음먹었습니다.

로라 브리지먼

이미 앨라배마와 테네시 지역에 있는 안과의사들을 빠짐없이 만나보았고, 마지막으로 워싱턴까지. 그렇게 수많은 의사를 거치며 우여곡절 끝에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박사를 소개받습니다. 네, 전화기를 발명한 그 벨 맞습니다. 당시 청각장애인을 위한 단체를 돌보던 벨은 헬렌을 만났고, 부부에게 마이클 애너그노스를 소개해주었습니다. 그는 앞서 언급된 하우이박사의 사위로, 퍼킨스 시각장애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케이트는 마이클 애너그노스에게 로라 브리지먼처럼 장애가 있어도 교육할 수 있고, 세상에 이어주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선생님을 보내달라는 내용을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를 받은 마이클은 문득 한 여학생의 이름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갓 스무 살이 된 그녀는 아직 장애아는 물론이고, 일반 아이들조차 한 번도 가르쳐 본 적 없었고 오래전부터 바이러스로 트라코마눈병을 앓은 탓에 한쪽 눈의 시력이 제대로 볼 수 없는 반 장애를 지닌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 중 실력이 가장 뛰어났고, 졸업 때는 학생대표가 된 그녀는 로라 브리지먼과 함께 지냈기 때문에 선대 하우이박사가 로라에게 생전에 교육한 방법을 잘 알고 있기도 했습니다. 굳세고, 정열적이고, 끈기 있으며 이상도 높은 그녀를 추천하기로 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앤 설리번이었습니다.




케이트의 이야기가 길어졌네요.

이 책은 헬렌켈러 인생전반에 관한 평전이지만 저는 앤 설리반선생님을 만나기 이전에 헬렌켈러의 부모를 알고 싶었습니다. 시대는 달라도 나의 아이의 장애를 알게 된 순간 부모의 혼란과 마음이 고스란히 공감이 갔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그 시대에 아이를 시설에 보내거나 버릴 수도 있었을 텐데 부모로서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헬렌을 위해 열심히, 적극적으로 노력했기에 드디어 앤 설리반과 만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란 생각에 기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헬렌켈러의 부모의 미담이 딱 여기 까지었습니다.

자신들을 대신해 줄 방패막(앤 설리반) 생기자, 모든 교육과 양육을 앤에게 전임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힘겹게 헬렌을 진정시키지 않아도 된 것입니다. 별채에 따로 앤과 헬렌이 살아서 공간도 떨어져 살았다고 해요. 게다가 앤 설리번 특히 아버지의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육아가치관 차이도 있었겠죠. 그러나 부모는 전적으로 앤 설리번에게 헬렌의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에 헬렌은 부모와 같이 유대를 쌓을 여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그 뒤로 헬렌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연이어 태어나고, 부모는 그 아이들 양육에 더 신경 쓰며 헬렌은 가족으로부터 더 동떨어지지 않았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헬렌이 다 크고 나서, 연이은 켈러 대위의 사업 실패로 가세가 점점 기울어지자, 그들은 헬렌을 이용하기까지 합니다. 앤 설리반의 도움으로 헬렌이 세상과 이어지고 빛나는 지성으로 대학까지 가게 되면서 장애를 극복한 성공사례로 유명해지자, 그들은 헬렌의 유명세를 이용해 후원금을 가로채고 착복했으며, 10여 년이 넘도록 앤 설리반의 임금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심지어 아버지는 사후, 딸인 헬렌에게 유산 한 푼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헬렌은 앤 설리반과 함께 생계를 이을 궁리를 해야 했습니다. 헬렌은 자신의 지성과 앤 설리번의 도움으로 글을 발행하고, 강연을 하고, 대중 구미에 맞는 보이기식 사진을 찍고, 연극무대에도 올랐습니다.

아름다운 자세를 취하며 보여주기식 사진을 찍고, <해방>이라는 기록영화에 출연 하기도 했다고 해요.

헬렌이 성장해 첫사랑과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게 되었을 때도 엄마인 케이트가 이들을 갈라놓습니다. 물론 순수한 헬렌이 더 불행해질 것 같은 걱정을 했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 부모에게 헬렌은 더 이상 소중한 딸이 아닌 장애를 극복한 '기적 같은 성녀'로 추앙받아야만 하는 부와 명성 , 헬렌은 한낱 지갑과도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한 때 헬렌을 위해 부모의 책임을 다하며 그토록 노력한 순간이 있긴 있었는데, 이렇게 변질된 모습이라니... 참 씁쓸하게 느껴졌습니다. 결국 헬렌은 나중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들어도 생계를 위해 연극무대에 올라야 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양육자이자, 스승이자 동료는 결국 앤 설리번이었습니다.

그러나 책을 읽으며 설리번이 우리가 그렇게 우러러봤던 마냥 훌륭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이하 애니) 가난하게 자란 그녀는 돈이 필요해 가정교사를 시작했을 뿐, 어떤 사명감이나 투철한 희생정신은 없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헬렌이 드디어 대학에 가게 되었을 때 애니가 대학 수업 내용을 헬렌 손에 전달해줘야 했지만 정작 애니는 그 수업을 따라가지 못해 제대로 전달해주지 못할 때가 많았고, 완벽주의에 가까운 예민한 성격 탓에 주변 사람들과 많은 마찰을 빚기도 했습니다. 헬렌을 필요 이상으로 통제하고 집착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애니가 헬렌을 이용한다는 모함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헬렌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보다 앤 설리반을 더 따랐고, 애니 또한 헬렌의 곁을 온 힘을 다해 지켜주었습니다. 처음, 시작은 아니었을지 모르지만, 그리고 가끔 정말 헬렌을 속박하고, 이용하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앤 설리번은 헬렌과의 관계를 포기하지 않았고, 끊임없이 사랑해 주며, 헬렌과 세상을 이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헬렌은 대학을 졸업할 수도, 다른 사람들과 교류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역사상 유례를 살펴볼 수 없이 특별한, 둘도 없는, 서로를 의지하는 가족보다 더 진한 사이가 됩니다.

이렇게 헬렌은 앤 설리번이 죽고 나서도 87세가 될 때까지 40여 년을 살았습니다. 앤 설리번의 후임으로 비서 폴리톰슨이 헬렌과 남은 생애를 같이 해주었습니다. 폴리톰슨은 앤 설리번보다 더 헬렌을 지극정성으로 잘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폴리는 죽는 날까지 헬렌을 헌신적으로 보살펴줍니다.

위)케이트, 왼)앤 설리번, 오)폴리톰슨

헬렌은 케이트에서 앤 설리번, 그리고 폴리톰슨 등 여러 양육자와 지지자들이 곁에 있었습니다.

헬렌은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몸이었습니다.그래서 자신의 장애를 받아들이고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들과 잘 지내는 방법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헬렌은 원래부터 명석했고, 그녀만의 특유의 긍정적인 에너지와 명랑한 매력도 타고났었다고 생각합니다.

헬렌켈러의 자필 편지. 볼수록 놀랍습니다.

평전에서 읽으며 제가 느낀 헬렌은 우리가 알고 있는 헬렌켈러는 성녀도, 박제된 역사의 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생을 치열하게 살아내려 노력하고 열심히 살아온 한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는 늘 헬렌을 지지해 주는 그녀들이 있었습니다.

생의 잠시라도 모성을 준 케이트, 끊임없이 자신을 깨워쳐 주고 세상과 이어준 앤 설리번, 하나부터 열까지 지극정성으로 보좌해 준 폴리 톰슨.

헬렌은 자신의 곁을 지켜주고 품어주었던 그녀들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면서 살았기 때문에 인생의 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치며 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시 한번 양육자라는 자리의 묵직함을 느낄 수 있어 뜻깊은 책 한 권이었습니다.

양육자의 자리는 한 사람의 인생의 중요한 양분이 되어 그 바탕이 되어 줄 수 있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장애는 불편하다.
하지만 불행한 것은 아니다.

-헬렌켈러-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모처럼 감명 깊게 읽어서 그런지 주저리주저리 말이 많아졌네요. 몇 번이고 줄여보려 노력했는데 결국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아침저녁 날씨는 쌀쌀하지요. 그래도 한낮의 따뜻한 봄날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환절기 감기도 조심하시고요. 또 찾아뵙겠습니다.


-벨 에포크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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