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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스블루 Oct 17. 2015

자유, 그 단어의 무게

(등장하는 모든 사진은 남프랑스에서 직접 촬영한 필름 사진입니다.)

며칠 전,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가 저도 모르게 이런 말이 툭 튀어나왔다. "우린 사기당한 거야. 나는 정말 대학만 가면 모든 게 자유로워질 줄 알았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한 대로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 시험 싫다. 과제 싫다."


우린 사기당한 거야.



공부에 지쳐 힘들어하는 학생들에게 어른들은 말한다. '조금만 참아라. 네가 열심히 해서 대학에 가면 그때는 네가 하고 싶은 일들 마음껏 해도 된단다.'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일이 너무나 많던 나에게 이 말은 벗어날 수 없는 굴레와도 같았다. 나는 멋진 사람이 되고 싶고 그러기 위해 좋은 일들을 해내고 싶은데. 내가 조금씩 자라서 나의 생각을 제대로 표현하기 시작하고부터는 게으르고 제멋대로인 나의 지독한 성격에 부모님도 결국엔 두 손, 두 발 다 드신 적도 많았지만 말이다. 부모님은 내가 많은 것을 경험하고 스스로 느끼기를 원하셨지만 한편으론 학생은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그 본분을 다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나 또한,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기 위해서는 더 풍부한 지식을 가져야 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무작정 '나는 공부 안 할 거예요.'라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일 테고. 지금도 수많은 학생들이 지긋지긋한 책상에 앉아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끝나지 않는 내적 갈등을 겪고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의 중, 고등 학창시절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틀 안에서 나만의 자유를 만끽하던 시절'이었다. 공부는 적당히 잘해야겠고, 선생님께 걸려서 혼이 나기는 싫은데 재미있는 일들이 너무나도 고팠던 시절. 가만히 앉아 수업을 듣고 급식을 먹고, 학교가 끝나면 학원을 가거나 숙제를 하는 그 반복되는 일상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모두가 바쁘게 나아가는 그 길에서 나 혼자 떨어져나오기는 두려웠기에 나는 나만의 돌파구를 찾았다. 사소한 것들에서 새로움을 찾고 즐거움을 만끽했던 것 같다.  하루쯤은 학원에 가지 않고 공원에서 놀기. 야밤에 기숙사에서 치킨 시켜 먹기. 수업시간에 재미있는 농담 던지기. 동아리에서 새로운 일 벌이기. 수도 없이 나열할 수 있다.


'적당히 혼나지 않을 만큼만, 그 적정선을 지키기.' 이것이 나의 자유 철학이었다. 잠시 너무 신이 나서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누구나 가지고 있을 학창시절 즐겁던 추억들, 그 기억들이 우리의 고민을 해결해주지는 않았음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안다. 나의 작은 철학은 답답하고 막막한 그 시절을 이겨내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뿐, 내가 갖고 싶은 자유, 나의 꿈을 위해 나아갈 수 있는 자유는 대학에 가면 가질 수 있다고 어른들이 그러셨으니 그저 믿고 기다렸다.


그런 나에게 대학은 멋진 세상이었다. 나 스스로 결정하고 새로운 일들에 거침없이 도전할 수 있는 세상이었다. 지난 6년 간 중, 고등학교를 다니며 틀 안에서의 자유로만 연명하던 나에게 대학은 꼭 가서 맛보아야 할 경험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대학에 간 나. 그리고 나의 친구들. 우리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


우린 사기당한 거야.


대학이라는 압박감에 못 이겨 원치 않는 과에서 공부를 하게 된 친구. 고대하던 공부를 하게 됐지만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한 친구. 술도 진탕 마시고 새로운 사람들도 만나고 재미있지만 정작 마음은 허전하다는 친구. 열심히 해보려고 노력하지만 치열한 현실에 지쳐간다는 친구. 수많은 이야기를 접했다. 나도 그들 중 하나였고 하나다. 나는 무엇보다 그 허탈감에서 한참을 헤어 나올 수 없었다. 대학생이 되고 성인이 되면 많은 일들을 뚝딱 해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대학생이 된 나의 모습은 그저 교복을 입지 않고 늦은 시간에 학교에 가는 영락없는 고등학생 같았다.


자유는 무슨. 결정해야 할 일들, 신경 써야 할 일들만 많아졌다. 오랜 시간 동안 아니 살아온 평생 동안, 정해진 울타리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그런대로 즐기면 그만이었는데. 정해진 시간에 일과를 시작하고 주어진 일들을 해내고 나면 그 외에 시간은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이 즐기면 그만이었다. 한걸음 더 나아간 새로운 세상에서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해야 했다. 무엇을 하고 언제 할 것인지, 왜 하는지를 고민하는 일. 감사하게도 나에게 경제적인 자유는 주어지지 않았지만, 돈이라는 보다 큰 짐을 지고 고민해야 하는 친구들도 참 많음을 알고 있다. 학창시절 우리가 꿈꿨던 자유는 이곳에 없었다. 한없이 날아가기만 하면 되는 자유는 우리의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걸까. 진짜 자유에게는 책임이라는 무거운 존재가 함께했다.


이런 생각들이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부터 꽤 오랜 시간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였는지, 한번 할 생각을 수십 번도 더 했다. 전이라면 무작정 도전했을 일들을 망설였다. '이거는 이래서 안 될 것 같아. 저거는 너무 무리이지 않을까. 그냥 가만히 있어야지.' 이런 망설임들. 분명 나는 다른 이들의 시선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무모하리만치 도전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시작도 전에 포기하고 뒤돌아서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겉으로는 그런대로 괜찮은 척 지냈다. 괜히 살을 빼야 한다는 둥, 남들 다하는 연애는 언제쯤 할 수 있냐는 푸념들로 나의 고민을 감추었던 것도 같다. 그리 많은 시간이 지난 것도 아니지만, 지금에서야 생각해보면 당연히 힘들 시간이었다. 오랜 시간 나를 보호해주던 울타리가 사라진 기분이랄까. 진정으로 자유를 꿈꿔왔지만, 정작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나의 모습이 불안했다.



그런 나에게 유일한 희망은 1학기를 마치고 떠날 유럽여행이었다.  오래전부터 바라 왔고 친구들과 꽤나 열심히 준비한 여행이라 무작정 신이 나서 떠났다. 단순히 현실에서 떠나 마음껏 즐기고 오자는 생각으로 떠난 여행이 나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다 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20대 청춘이라면 누구나 꿈꾸고, 열심히 노력한다면 누구나 다녀올 수 있는 유럽여행은 홀로 방황하던 나에게 잊지 못할, 그리고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이 되었다.


반나절 정도의 시간만 비행기를 타고 갔을 뿐인데, 전혀 다른 삶이 눈 앞에 펼쳐졌던 경험.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수많은 삶들을 지나치는 동안 나는 다시금 느꼈다. 이 넓은 세상에서 살아가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도 다 열심히 살아가고 있겠지. 내가 상상도 하지 못할 일들이 일어났을 것이고 지금도 어디선가는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겠지. 그럼에도 그들이 이겨냈기 때문에, 힘들어도 살아갔기 때문에 이 세상이 여전히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거라는 것을. 다소 거창하지만, 나는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고 관심조차 없는 그 낯선 곳에서 힘을 얻었다. 전혀 새로운 곳에서 많이 배우고 느끼는 나를 보았다. 아무것도 정해져 있지 않았고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해야 했지만 하루하루가 즐거운 나를 보았다. 자유, 그 단어의 무게에 눌려, 잊고 있었던 멋진 자유를 보았다.


자유, 그 단어의 무게에 눌려, 잊고 있었던 멋진 자유를 보았다.



이 넓은 세상에 나를 아껴줄 사람은 나구나.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위로해줄 지라도 결국 나를 위로할 사람은 나여야만 하구나. 그리고 결국 내가 만들어가는 거구나. 아마 나는 두려웠던 것 같다. 새로운 시작이, 내 손에 덜컥 쥐어진 자유가. 나의 미래, 나의 인간관계, 나의 학점, 그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나 완벽한 미지의 공간에서 느낀 잠깐의 자유가 나에게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주었다. 단순히 미래가 불투명한 것이 아니라 당장 무슨 길로 가야 에펠탑을 볼 수 있는지 조차 몰랐던 곳에서 나는 알았다. 제 아무리 무겁고 어렵더라도 결국 내가 만들어나가면 된다는 것. 나는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괜찮다는 것.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고 나의 미래가 희미하더라고 괜찮다는 것. 처음 발을 디뎌보는 유럽이란 곳에서 여유를 갖고 행복해하는 내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당장 아무것도 확실한 게 없지만 그냥 살아가 보라고. 숙소로 가는 길을 한참 동안 헤매어도 갑자기 기차가 연착돼서 모든 계획이 틀어질 것 같아도 일단은 나아가라고. 그러면 즐거운 하루하루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나를 발견할 거라고 말했다. 그것이 진정으로 자유를 만끽하는 법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당장 시험이 닥쳐오고 과제가 쌓여있어도 나만의 자유를 만끽할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 내가 미뤄두었던 일들을 하나 하나 해나가려고 한다. 내게 주어진 커다란 자유가 책임을 앞세워 날 주저하게 만들어도, '안정적인 직장을 얻어 스스로 돈을 벌면  그때 네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해.'라고 또 누군가가 말하려 해도 나는 해나갈 것이다. 나에게는 언제나 든든하게 날 믿어주는 부모님이 있고 언제라도 나를 위로하고 응원할 '내가' 있기 때문에. 물론, 사랑하는 친구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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