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돈으로 이어지는 세대
"엄마 뭐 사주까? 첫 월급 나오면..."
아들은 약간 상기된 목소리로 은근히 자랑스러워하며 내게 물었다. 별 기대도 생각이 없었던 나지만
".. 하하 뭐 사줄 건데? 뭐? 좋은 거 사줄 거야?..."
"아빠는 사줄 게 많은데.. 엄마는 뭐 필요한 게 없을 거 같은데..." 하면서 아들은 나와 밀당을 시작했다.
"엄마가 너를 키운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쨍쨍한 거 사줘야지!"
"헐~~~ 엄마가 그렇게 고생하진 않았지~~~ 엄마 아들 한다고 내가 고생했지! ㅎㅎ"
나는 요새 엄마다. 아들한테 좋은 것을 받으면 '좋다'라고 생각한다. 아들이 고생해서 벌었다고 '마다'하지 않는다. 나는 아들이 20대 중반을 넘어가면서는 이른바 '키운 생색'을 열심히 내고 있다. 몇 년 전 아들이 좀 컸다고 깊은 대화를 하다 보니까, 아들이 기억하는 것은 부모의 현실하고 좀 괴리가 있었다.
현실 감각이 전혀 없었던 나는 결혼하고 대학원에 진학했고, 이후 출산과 육아, 연구 및 출강 등을 같이 진행하게 된 그야말로 전쟁 같던 시기였다. 당연히 경제적으로 극도로 어려웠고, 시간적으로도 체력적으로도 지금은 상상도 안 가는 생활을 했었다. 게다가 시골 시댁의 제사는 명절까지 합하여 13번이었다. 큰 동서는 사업한다고 바빠서 못 오고, 작은 동서는 군인 가정이라 멀리 있고, 핑계도 댈 줄 몰랐던 나는 한 달에 한번 꼴로 시골 가서 밤새 제사 지내고 치우고 새벽에야 돌아왔다. 아침에 강의 일정이 있으면 바로 연구실로 가서 책상에 엎드려서 쪽잠 자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도 그런 일을 할 줄 모르던 내게 칭찬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은 엄마의 좋은 시절만 기억한다. 아들이 생각나는 시절은 내가 학교에 자리 잡고 난 후이니까 어린 눈에는 평화롭기만 하다. 육아 때문에 돌까지 큰 시누에게 죄인처럼 쩔쩔매는 모습은 본 적이 없고, 논문 쓰느라 늦어서 어린이집에서 아들을 늦게 찾아 둘러업고 장보따리까지 들고 90도로 허리를 굽혀 4층 빌라를 오르다가... 자신(아들)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도 기억 못 한다. 힘들다고 말할 시간도 없었던 기간이 있었는데, 표현이 서툴기도 했고 졸업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그냥 모두 내가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첫 월급을 받은 이후, 나는 엄마에게 계속 용돈을 준다. 아들과 살고 있는 엄마에게 내가 주는 용돈은 비상금에 해당한다. 알뜰히 모으셔서 집안 어른으로서 해야 할 일에 쓰시는 것 같다. 큰일이 생길 때면 한 번씩 쾌척을 하신다. 많지는 않지만 내가 마음으로 주는 '엄마의 말하지 못했던 애씀'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이제야 보니, 엄마는 허약하고 까다로운 나를 키우시느라 꽤 힘드셨을 그 옛날이야기를 늘 '내가 웃긴 얘기'로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낄낄 웃는다.
그래서 나도 아들에게 동화처럼 말한다, 내 고난의 흑역사를. '엄마 아들'한다고 아들이 고생한 건 맞는데... 철없는 엄마는 아들이 주는 용돈을 받고 싶다. 남편은 용돈 필요 없다고 하는데, 나는 장가 가도 적은 액수라도 꼭 용돈을 달라고 말한다. 나는 그 용돈이 아들이 주는 애정의 흐름으로 느껴지기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