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사랑, 정치』, 앨피 본
기술과 제도는 우리의 욕망에 영향을 미친다. 사랑, 우정, 섹스. 사람들이 서로 관계 맺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최근의 기술은 사랑을 게임화한다. 데이팅 앱을 통해 연애할 사람을 찾을 때, 카드 형태의 프로필을 양 옆으로 스와이프하며 매칭된 사람들을 포인트처럼 쌓아 간다. VR 게임이든 예능 프로그램이든 다양한 형태의 연애 시뮬레이션을 소비하며, 다양한 SNS 채널에선 욕망을 자극하는 이미지와 '좋아요' 등의 즉각적인 공감 반응을 주고받으며 쾌락을 느낀다. 그런 행동들이 남기는 무수한 데이터들은 우리의 욕망을 예측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욕망을 빚어내는데 활용된다. 데이터를 소유하고 사람들의 욕망을 만들어내는 건 플랫폼 자본주의의 거대 기업들이다. 그들은 데이터를 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어떤 정치에 복무하도록 활용하고 있을까?
(책의 제목을 구성하는 세 개의 키워드로 대략적인 책의 내용을 요약해 봤는데, 사실 책의 내용을 더 포괄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다른 키워드가 더 적합하지 않나 싶다. 게임은 리비도적 쾌락을 수반하는 방식을 얘기한 것 같고, 사랑이라기보다는 더 포괄적인 개념인 욕망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듯했다.)
데이팅 플랫폼에 우리가 등록되고 다른 사람들과 매칭되는 과정을 두 개의 층위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자료의 대상화, 자료로서의 우리가 디지털 대상(데이팅 플랫폼 내의 프로필)이 되는 과정이다. 두 번째는 대상의 자료화, 디지털 대상들이 서비스 내에서 분류되고 연결되는 과정이다.
데이팅 플랫폼마다 자료의 대상화 과정은 모두 다르다. 기독교 데이팅 플랫폼에서는 기독교 교인만을, (책에서 제시되는) 트럼프닷데이팅은 트럼프 지지자만을(이런 서비스가 있다니), 퀴어 데이팅 플랫폼에서는 퀴어만을 받아들일 것이며, 플랫폼 성격에 따라 프로필에 기입해야 하는 / 기입할 수 있는 정보도 다를 것이다.
그런데 대상의 자료화는 플랫폼들이 거의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자료의 대상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도 있었던 지위로서의 종교, 부의 차이는 자료의 대상화 층위에서는 무시된다. 데이팅 플랫폼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은 플랫폼의 표면만이 아니라 욕망의 경험을 연결하고 틀짓는 공통의 방법론, 다시 말해 알고리즘과 인터페이스에서 찾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플랫폼을 사용할 자격을 부여하는지, 가시적인 프로필 영역에서 어떤 정보를 표현하게끔 하는지 수준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을 어떤 기준으로 분류·추천하고(알고리즘) 개인화된 피드에 띄워 서로 상호작용하게끔 만드는지(인터페이스)를 통해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바르트의 매혹 개념을 현대 기술에 접목해 본다면, 알고리즘과 인터페이스는 매혹의 스크린, 욕망의 장면을 만들어 낸다. 어떤 대상에게 매혹되는(욕망/사랑을 느끼게 되는) 건 단순히 그 대상이 매력적이기 때문이 아니다. 특정한 장면 속에 배치되어 있을 그 대상은, 다른 사물들 간의 관계 속에서 매혹의 힘을 갖게 된다. 특정한 장면이 사랑하게 될 대상을 축성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그런 매혹의 스크린을 만들어낸다. 쇼핑몰 앱의 화면 스크린을 보면서 상품 이미지에 소비욕을 느끼는 것, 데이팅 앱에서 추천해 준 프로필을 보며 그 사람에게 욕망을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인터페이스가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는 매혹의 스크린이라면, 알고리즘은 그 내부의 사물을 배치하는 일련의 기준이다.
자료의 대상화 층위에서는 상이한 플랫폼들이 본질적으로 공통된 문제를 지닐 수도 있다. 그중 하나가 '자료의 논리'를 따르게 된다는 것이다. 자료는 패턴을 만들고, 패턴은 정상성과 규범을 만든다. 자료를 수합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전형적인 것과 이례적인 게 나뉘며, 전자는 수용되고 후자는 배제된다. 전형성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데 자주 활용된다. 매우 중립적인 듯 보이나 사람과 사물 간 기존의 관계를 지속시키고 그 규범을 강화하거나,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규범을 만들어내고 정당화하는 데에 활용될 수 있다. 이를 테면 본인과 동질적이거나 유사한 사람만을 만나게 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만남의 기회조차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특정인의 세계관을 좁히게 될 수도 있다. 사랑을 정체성 정치에 묶어버리며, 정체성 범주를 넘어서는 연대의 가능성은 배제된다.
이때 자료는 욕망을 예측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욕망을 변화시키고 만들어 내기도 한다. 디지털 기술은 과거의 행동이 남긴 수많은 데이터를 기반으로 특정인의 선호를 예측할 뿐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예측값을 제시함으로써 눈앞에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결과적으로 이끌어 낸다. 예를 들어 추천 제품으로 뜨지 않았더라면 사지 않았을 무언가를 사게 만들고, 특정 콘텐츠를 클릭해 시청하게 만든다. 프로이트의 전의식 개념에 비유하면,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위치한 구체화된 가능성을 의식으로 끄집어내는 것, 가능성에 불과했던 욕망을 실현시키는 것이다.
과거의 자료를 기반으로 예측값을 들이밀며 특정한 욕망을 추동하는 동시에, 그에 대한 반응을 또 자료로 수집하여 다음 욕망을 예측하는 과정이 무한히 순환한다. 그 과정은 재빨리 반응하면 보상을 얻는 게임화된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SNS에서 욕망을 자극하는 특정한 이미지나 텍스트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좋아요, 공감 반응, 댓글) 들은 모두 리비도적 쾌락을 제공한다.
그런데 디지털 대상과 실제 대상은 서로에 비해 결핍되어 있다. 부족하다. 실망스럽다. 햄버거 광고를 보고 사 먹은 햄버거는 광고에 비해 부족하고('조리예이며 실물과 다를 수 있습니다'), 백날 디지털 화면을 들여다본들 실제 햄버거를 베어 무는 것만 못하다. 실제는 디지털에, 디지털은 실제에 못 미친다. 실제 대상과의 만남으로 얻어질 쾌락이 감소한다는 건, 곧 그 대상을 욕망할 만함이 증가하는 것이다. 이처럼 욕망의 경험은 사랑과 증오 사이, 쾌락과 실망 사이에 위치한다. 소비 자본주의에서는 약속된 쾌락이 필연적으로 주체를 실망시키며, 욕망할 만한 다음 대상(상품)을 욕망하게끔 추동한다. 이 무한한 욕망의 순환은 곧 플랫폼 자본주의의 동력이 된다.
리비도적 클릭은 추가적인 자료를 제공하며 플랫폼의 영향력을 높이고, 사람들은 클릭으로 구성되는 무급노동을 한다. 쉽게 생각해 보면 (여러 플랫폼이 콘텐츠 생산자에게도 어느 정도의 수익을 제공하게 된 지는 꽤 되긴 했지만) 유튜브, 인스타그램, 네이버 등에서 제작되는 콘텐츠는 그 생산자보다 플랫폼의 소유주에게 더 많은 이윤을 안겨줄 것이다. 그 안에서 작성되는 후기나 댓글, 공감 반응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결국 개인의 상호작용은 사회적 유산계급의 이윤으로 전환된다. 다시 말해, 사회적 관계가 생산관계의 계기가 되는 셈인데, 이는 트론티가 자본주의 발전의 최고 단계로 제시했던 모습이기도 하다.
대중은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능동적으로 리비도적 행동을 취하는 존재이며, 이제는 사람들의 욕망에 “디지털적”으로 호소하는 시대이다. 미국 대선도 그런 식으로 읽어낼 수 있다. 대중들이 남긴 자료를 열심히 수집한 후, 우리 진영의 메시지가 호소할 수 있는 집단을 집중적으로 타깃 하여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 그것이 대선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 요소였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으로 2부까지의 내용을 이해한 대로 요약한 내용이다. 이후로도 다른 문화 현상이나 개념이 등장하긴 하지만 핵심적인 내용들은 모두 짚은 것 같다. 아래로는 책을 읽고 한동안 책의 개념으로 생각해 본 나의 경험과 주변 현상들. 너무 사적인 내용을 제외하고 두 가지 정도만 남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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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Gen AI 해커톤 발표를 본 적이 있다. 생성형 AI나 LLM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IT 서비스 데모를 선보이는 건데, 한 팀은 사용자의 데이터를 기반으로 서비스 내의 프로필을 자동으로 생성하는 기능을 만들었다. 그걸 보면서 디지털 기술이 욕망을 만드는 단계를 넘어서서, 사람 대신 그 사람을 표현해 주는 단계에 이르렀구나 싶었다. 사람이 자기 인식을 기반으로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였으면 하는지(이는 본인이 무엇을 욕망하는지와도 관련이 깊을 것 같다)를 고려해 스스로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디지털 기술에게 외주를 맡겨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잊고 있던 과거의 데이터를 동원해 의식하지 못하는 욕망까지도 대신 말해줄 수도 있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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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한 친구가 좋아하는 인플루언서의 라이브 방송을 보다가 민망한 물건이 화면에 나왔는데, 그 사람도 결국 비슷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 사람에 대한 호감이 떨어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책에서의 개념을 적용하면 이를 매혹의 스크린 축성 실패의 순간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라이브 방송이 전달되는 사각형의 화면 속에 함께 배치된 사물들은 그 사람을 매혹적으로 보이게끔(리비도적 쾌락을 수반하는 행동을 하게끔, 좋아요를 누르고 계속해서 찾아오게끔) 해야 했는데, 실망스러운 요소를 실수로 장면에 배치함으로써 매혹에 실패하게 된 것..
매혹의 스크린 뒤에서 특정한 욕망을 추동하고자 장면을 축성하는 디지털 기술.. 이런저런 곳에 적용해 보기에 유용한 개념 같다. 여러모로 비판적으로 깨어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