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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경 May 12. 2024

관계를 현실적으로 직시하되 낙관을 잃지 말기

『빛을 걷으면 빛』, 성해나

수록작 | 「언두」, 「화양극장」, 「OK, Boomer」, 「괸당」,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 「당춘」, 「오즈」, 「김일성이 죽던 해」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관계를 현실적으로 직시하되


무해함이나 배려를 가장했지만 실은 무례하거나 폭력적인 행동과 말, 그런 것들을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감수성. 그런 감수성을 갖추기를 원하는 사람으로서, 행동과 말속에 교묘하게 숨겨진 폭력성과 문제성을 드러내는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집 『빛을 걷으면 빛』에도 그러한 대목들이 많이 담겨있는데, 그뿐이었다면 아마 이 글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동시대의 다른 소설들 중에서도 그런 대목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빛을 걷으면 빛』은 그런 날카로운 감수성이나 윤리의식을 갖는 것만으로는 윤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혹은 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당연히 다른 건데, 아는 것/알아차리는 것에만 천착해 있던 탓에 이를 놓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는다. 어떤 행위의 문제성을 남들보다 예민하게 포착하더라도 그런 행위에 동조할 수도 있음을.


여러 수록작의 주인공들은 다른 인물의 문제적인 행위를 발견할지라도 결과적으로 그에 소극적으로든 적극적으로든 가담한다. 「괸당」에서 아버지는 재종숙 부군과 부인을 본인이 생각하는 한국인다움에 동화시키려고 하면서도 진정한 가문의 구성원으로서 인정하지 않고 배척한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서 ‘나’는 불편함이나 부끄러움, 미안함 등을 느끼며 그들에게 대신 사과하기도 하지만, 끝내 그들을 게스트 하우스에 데려다 줌으로써 아버지에게 소극적 동조를 하게 된다.


「소돔의 친밀한 혈육들」에서 ‘나’는 오수네 사람들의 교묘한 폄하와 무시를 알아차리지만, 조부의 도검이 친일의 잔재라고 감별받았을 때의 일을 홈비디오에서 삭제해 달라는 그들의 요청을 따른다. 시간이 지나 인사 담당자가 되어 노사 갈등을 바라보면서도 오수의 사고방식을 그대로 반복하기도 한다.


또한 문제적인 태도로 타인을 대하지 않으려고 주의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와의 관계가 이상적으로 유지되는 것도 아니다. 「언두」에서 ‘나’는 타인으로부터 동정과 시혜의 시선을 받길 원치 않으며, 본인도 도호와 할머니를 혹여 그런 태도로 대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나’는 셋이서 보내는 시간에 적응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나’는 도호 없이 할머니와 소통하지 못한다. ‘나’가 할머니의 춤사위를 우연히 보고 그 집을 떠나게 된 날, 더 이상 지금의 생활을 감당할 수 없음을, 할머니는 본인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타인임을 깨달았을 것이다.


서로에게 의미 있는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멀어지거나 급작스럽게 이별하기도 한다. 「화양극장」에서 경은 이목씨가 성소수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그녀의 편에 서주고 싶다는 생각에 그녀의 삶을 짐작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눈이 내리던 날 밤 이목씨의 곁을 지켜주지 못했고 이를 후회한다. 이후 화양극장은 폐관하며 그들은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오즈」에서 ‘나‘와 ‘오즈’는 함께 시간을 보내며 단순히 집주인과 세입자의 관계를 넘어서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지만, 그들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죽음이라는 물리적인 사건으로 갑작스러운 이별을 겪는다.



낙관을 잃지 말기


그렇다고 『빛을 걷으면 빛』이 관계의 단절이나 어긋남만을 얘기하고 있지는 않다. 소설집은 관계의 불가능성에 주목한다기보다 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 생긴 변화들에 초점을 둔다.


「화양극장」에서 경은 이목씨와 영화를 보고 대화하는 시간을 통해 영화의 대사를 빌려 아버지가 본인에게 상처 주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오즈」에서 오즈는 ‘나’ 덕분에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상처를 조금씩 덮어가고 ‘나’는 오즈 덕분에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다. 「당춘」에서 헌진과 ‘나’는 영식 삼촌이 추진하는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 자체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돈 벌 생각으로 참여하지만, 어느새 손해보지 않겠다는 마음은 약해지고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된다.


『빛을 걷으면 빛』은 서로에게 무해하고 서로를 온전히 이해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얼마나 어려운지(혹은 정말 존재할/유지될 수 있는 건지)를 현실적으로 직시하면서도, 실은 관계의 아름다움은 그런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생긴 변화들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둠을 걷으면 빛이 있다는 기대를 품게 되는 그들의 변화를 목격하면, 불필요한 환상을 조금 덜어낸 채 하루 더 관계를 낙관하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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