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글 읽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경 Jun 03. 2024

세계에 저항하는 소녀들

『어린 심장 훈련』, 이서아

수록작 | 「검은 말」, 「서울 장미 배달」, 「악단」, 「초록 땅의 수혜자들」, 「빨간 캐리어」, 「사하라의 DMZ」, 「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


소설 속에서 환상과 현실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고 장면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난해함 속에서도 분명하게 반복되는 것은 세계/어른에 대항하는 소녀들의 이미지이다.


남들과는 다르다는 이유로 비정상으로 낙인찍히고 부모에게 외면당하거나 폭력에 노출되는 아이(「검은 말」, 「서울 장미 배달」), 세상의 그 어떤 학교도 받아주지 않아 ‘민간 예절 학교’라는 이름의 시설에서 선생들에게 불합리한 체벌을 당하는 아이(「악단」), 성추행과 폭행 등을 피해 폐공장에 모여 사는 아이(「초록 땅의 수혜자들」) 등이 이 소설집의 인물들이다.


이들은 본인에게 주어지는 규율을 어기고 폭력에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리혜와는 놀지 말라는 부모의 명령에도 꽃다발을 챙겨 그녀에게 향하거나(「서울 장미 배달」), 학교의 불을 지르기로 결심하며 실행에 옮기고(「악단」),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선영 선생님의 관을 훔치거나 추행과 희롱을 일삼는 공장장과 예술가를 끔찍하게 죽이기도 한다(「초록 땅의 수혜자들」).


그들이 저항하는 이유는 단지 본인이 느꼈던 고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악단」에서 ‘나’가 학교에 불을 지르기로 한 이유는 “나무는 그러라고 자란 것이 아니었”음에도 ”학교의 선생들이 잘 다듬은 나뭇가지로 아이들의 종아리로 후려치기 때문“이다. 불을 지르는 행위는 종아리에 새겨진 열다섯 겹의 붉은 줄 때문이기도 하지만, 부조리한 폭력을 위해 도구화된 자연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에겐 불이 산에 옮겨붙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그들의 저항은 깔끔하게 양분되는 선악의 구도 내에서 복수에 성공하는 명랑한 권선징악의 이야기로 머무르지 않는다. 「초록 땅의 수혜자들」에서 ‘나’는 계획에 없던 살인에 비명을 거듭 지르며 충격과 죄책감에 휩싸인다. 「사하라의 DMZ」는 ‘나’는 아랍인 가이드의 무례한 질문들에 반발심을 느끼고 탈북민인 척하며 대답한다. 결국 ‘나’는 동행했던 친구가 죽었다는 말을 하며 “그의 죄에 가담”하게 된다. “차마 상상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해서 함부로 말할 자격이 없”음에도 그렇게 했다는 죄책감, 서글픔, 모욕감을 느낀다. 그가 나쁜 사내에게 나쁜 일을 당한 경험은 없냐고 묻자, 바스마도 그에게 유럽인을 상대하며 힘들지 않냐며 예의 바른 태도로 안됐다고 동정한다.


그들의 저항은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의 형태로 실현되기도 하며, 그들이 경험했던 폭력을 일부 답습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소설은 “천진한 영혼과 선한 의지로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초록 땅의 수혜자들」)는 세계에 조금 더 주목하게 한다. 소설 속 소녀들은 어른/남성/인종적 다수자 중심의 지배적인 규율을 예민하게 포착하고, 그에 저항하기 위해 현실적인 죄책감을 느끼면서도 과감히 행동한다. 순진무구한 소녀의 표상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거침없이 저항하는 이들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묘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설을 읽다 보면 어느새 그녀들을 응원하게 되며, 그들이 천진한 영혼과 선한 의지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는 세계가 되기를 함께 빌게 된다.


*서평단에 선정되어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