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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경 Apr 27. 2024

부러움이라는 조짐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속 서수경의 위로

서수경은 내 머리에 손을 올리며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아니 나는 속상하다고 진짜 속상해서 그 사람들을 일일이 방문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고, 한 사람이 말하는 상식이란 그의 생각하는 면보다는 그가 생각하지 않는 면을 더 자주 보여주며, 그의 생각하지 않는 면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비교적 적나라하게 보여주는데 당신은 방금 너무 적나라했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 中


부러움이라는 조짐


오랜만에 소설을 읽으며 부러움을 느꼈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를 읽는데 문득 서수경과 ‘나’가 나누는 대화를 나도 하고 싶었다. 그런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했다. 내가 경험한 부당한 일과 그에 대해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 언젠가는 수치심, 억울함, 분노를 느꼈고, 과거에는 그런 감정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까지. 그런 것들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면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 위로해 줄 사람과의 대화.


몇 년 전 소설 속 인물에게 강한 부러움을 느꼈던 적이 떠올랐다. 그때에도 비슷하게 소설 속 한 인물의 관계를 부러워했던 것 같다. 그가 사람들과 관계 맺는 방식이, 그렇게 맺은 관계에서 나눌 수 있는 대화가, 그런 대화를 통해 주고받는 감정이, 그런 것들이 부러웠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시기를 기점으로 내게 많이 달라졌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때 부러움을 느낀 이후로 삶을 살아가는 방식과 태도가 변화했다. 부러움은 그때의 내게 없는 무언가를 바라게 했고, 그러기 위해선 그때의 내가 달라질 필요가 있었으니까,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때와 비슷한 강도의 부러움을 느끼는 지금, 이번의 부러움도 내가 세상을 살아가고 대하는 방식이 또 한 번 바뀌리라는 조짐으로 다가온다.




묵자의 세계관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묵자의 세계관이 가진 적나라함을 드러낸다. 묵자의 세계에 사는 사람은 점자의 세계에 사는 사람을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비맹인의 글자를 가리키는 ‘묵자’라는 용어 자체도 생소할 것이다. 정상의 범주에 안착하여 일상 속에 당연한 것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구태여 알 필요가 없다. 무언가를 알 필요가 없는 것, 그것이 묵자의 세계관이다.


알 필요가 없는 존재로 취급당하는 사람들, 정상의 범주에서 배제되고 너무 쉽게 밀려나간 사람들. 이를테면 여성, 소수자, 장애인 등. 소설에서는 다양한 소재들을 다루며 시위, 혁명의 역사 속에서 지워진 여성, 교묘한 격리와 배제를 경험하는 성소수자, 성소수자를 지칭하는 낙인에서도 배제되는 여성 성소수자, 일상적인 공간에서도 정보로부터 소외되는 장애인 등을 보여준다.


정상 가족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서수경과 '나'도 그러한 존재다. 이웃들은 '나'에게 너희는 무슨 관계냐는 질문을 받아왔고, '나'는 그런 이웃들로부터 서수경과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매번 '친구'나 '친척'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런 질문을 받음으로써 대면하게 될 위협을, 질문자와의 관계 변화를, 질문이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대답 이후를, 많은 것들을 짧은 시간 안에 상상해야 하는 '나'는 질문을 하는 이웃들도 그만큼의 생각을 과연 했을지를 궁금해한다. 묵자의 세계를 살아가는 그들은 알 필요가 없으니,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았겠지.


속상해하는 '나'의 머리 위에 서수경은 손을 올리며 속상해하지 말라고 말한다.




감수성의 변화


그들을 보며 부러움의 조짐을 지니게 된 이후 (실은 이미 얼마간 변화한 시선으로) 기존의 관계를 쭉 돌아보게 됐다. 적나라한 말로 나를 속상하게 했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누군가는 비폭력대화법을 연습한다더니 얼마 후 그 자리에서 재밌는 걸 들었다면서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농담을 전달했다. 누군가는 일상적인 관계에서 비롯되는 폭력과 상처에 대한 글을 쓰고 나서는 그가 싫어하는 특정 집단을 마주하자 그들을 일반화하며 조롱했다. 누군가는 뜬금없이 그냥 본인의 지식을 뽐내듯 지인을 아웃팅 시키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하니까 정말 순진한 얼굴로 왜 그런 거냐고 물었다. 그는 그것이 왜 문제가 되는지 정말로 몰랐다. 알 필요가 없는 세상을 살아왔겠지.


여태까지는 속상하고 불쾌한 순간이 있어도 그냥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다. 이런 면은 그들의 일부에 불과하고 내가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면에 있지 않나, 좋게 생각하고 좋은 면을 보려 하고. 근데 이제는 내가 그런 불쾌감을 감수하면서까지 이들과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가늠하고 있다.


감수성의 변화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세상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수준이 이전보다 예민해진 것이지. 나도 언젠가는 그런 말에 웃었었고 오히려 그런 농담을 적극적으로 사용할 때도 있었다. 점점 그런 말의 폭력성을 예민하게 인지하게 되고, 스스로 하지 않게 되고, 이젠 사람을 대할 때 그런 부분이 관계를 유지하는 기준으로 더 크게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젠 그런 불쾌감이 그 사람에게서 느끼던 좋음을 가리게 되는 것이다.




서수경의 손바닥


그런 고민에 계속 잠기게 되다 보니, 잠시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 S와 Y를 만나기로 한 약속도 나갈까 말까를 고민하다가 나갔고, 먼저 도착한 S에게 Y를 기다리는 동안 고민을 털어놓게 됐다. 이것저것 묻던 S는 내가 사람들로부터 불쾌감을 느낀 만큼 본인이 쾌의 감정을 높여야겠다며 저녁을 본인이 사겠다고 했다. 오히려 부담스럽다고,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기분이 좋다고, 그렇게 원초적인 쾌불쾌가 문제인 것 같지는 않다고 거듭 거절해도, S가 끝내 우겨서 돈 한 푼 쓰지 않고 저녁을 먹었다.


그날 저녁은 정말 배불렀다.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던 순간들만 곱씹느라 비관적으로만 굴러 떨어질 뻔한 내 생각을 S가 말뿐만이 아닌 행동으로도 붙잡아준 것 같다. 주변에 서수경을 둔 '나'를 부러워했는데, 사실 생각해 보면 주변에서 서수경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겠다고, 지금의 감정을 오래 기억해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더 이상 속상하고 싶지 않다. 속상함을 삼키고 싶지도 않다. 적나라한 너의 말이 날 속상하게 했다고 말은 하고 다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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