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3670>
“나는 도시로 떠난 전형적인 게이의 여정을 따랐다. 새로운 사회성의 네트워크 안에 자리 잡고 게이들의 세계를 발견함으로써 자신을 게이로서 발명하고, 게이로서의 삶을 배워나가는 여정 말이다.” — 디디에 에르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동성애자 지식인인 디디에 에르봉이 에세이 『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성찰하며 쓴 문장입니다. 성 지향성을 자각하고 게이로 정체화하는 것은 혼자서도 가능하겠지만, 게이로 살아가기 위해선 다른 게이들과의 사회적 관계가 필수적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게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사랑이든 우정이든) 새로운 방식의 친밀성을 경험하고 게이 커뮤니티의 문화를 학습하기 위해서 말이죠.
영화 <3670>은 북한이탈주민(이하 탈북민)이자 게이인 철준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철준은 남한의 게이 커뮤니티에 발을 내딛으며, 중첩된 정체성에서 비롯된 외로움을 해소합니다. 디디에 에르봉의 표현을 빌리자면, <3670>은 새로운 사회적 관계망 안에서 스스로를 게이로 발명하고 게이로서의 삶을 배워나가는 여정을 그려냅니다.
철준은 게이이기 때문에 탈북민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낍니다. 형제처럼 지내는 탈북민 친구들은 아직 그의 성적 지향을 모르죠. 그 친구들은 철준이 거듭 거절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탈북민 여성과 그를 계속 이어주려고 합니다. 그런 친구들에게 철준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거절할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철준은 탈북민이기 때문에 게이 사이에서도 외로움을 느낍니다. 철준은 남한의 LGBT 문화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외로운 마음에 원나잇 상대에게 식사를 청해보기도 하지만, 상대는 부담스러운 표정으로 거절할 뿐이죠. 친구를 만들어 보라는 그의 말에 철준은 술번개에도 나가보지만, 그 분위기에 좀처럼 녹아들지 못합니다. 게다가 주변의 게이들은 탈북민이라는 그의 정체성을 자극적으로 소비하거나 희화화하곤 합니다.
탈북민 게이의 경험은 게이의 경험과도, 탈북민의 경험과도 다릅니다. 두 정체성이 교차할 때, 그 교차점에서는 특수한 경험이 발생하기 때문이죠. 철준은 본인의 상황이나 감정을 어떤 집단에서도 마음 편히 털어놓지 못합니다. 철준은 그러한 외로움 속에서 게이 데이팅 앱 프로필에 탈북자를 찾는다는 문구를 적습니다. 본인을 온전히 이해해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아서 말이죠.
철준은 게이 커뮤니티에 소속되며 그 외로움을 해소해 나갑니다. 철준은 술번개에서 만났던 영준을 동네에서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는데요. 영준은 본인이 속한 97년생 게이 모임에 철준을 데리고 나가고 단톡방에도 초대합니다. 그 모임은 철준에게 디디에 에르봉이 말했던 일종의 ‘만남의 장소”로 기능합니다.
“이러한 만남의 장소들은 사회성의 공간이자 특수한 문화가 학습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거기에선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가 이루어진다. (중략) 하지만 젊은 게이에게 매번의 대화는, 일종의 비공식 문화를 흡수한다는 의미에서 게이 세계의 사회화 수단, 게이가 되는 방식을 구성한다.” — 디디에 에르봉, 『랭스로 되돌아가다』
철준은 97 모임과 함께 종로 술집, 이태원 클럽을 방문하며 게이 문화를 학습합니다. 또 모임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는 영준에게 헤어 스타일링부터 화장하는 법, 옷 입는 법을 배우기도 하죠. 철준은 97 모임에 빠르게 적응하며 그들에게 소속감과 친밀함을 느낍니다. 밤새 클럽에서 놀고 난 후의 새벽, 본인의 자취방에 쓰러져 자고 있는 친구들의 얼굴을 보며 미소 짓습니다. 철준은 데이팅 앱 프로필에 적었던, 탈북자 친구를 찾는다는 문구를 지우게 됩니다.
게이로서의 자기를 발명한 철준은 스스로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초반부의 철준은 대입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좀처럼 문장을 작성해내지 못하죠. 그랬던 그가 처음으로 자기소개서를 완성해 낸 건, 97 모임에 나갔던 날 밤입니다. 이후로도 영준의 도움을 받아 자기소개서를 수정해 나가며, 면접까지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 합격한 철준은 탈북민 친구들에게도 커밍아웃을 하기도 하죠. 새로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체성에서 비롯된 외로움을 해소한 경험은 자기 서사의 완성으로 이어지며, 나아가 남한 사회에 더 안정적으로 자리 잡는 데에도 기여합니다.
철준은 영준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다른 게이를 도와주기도 합니다. 영화의 후반부, 철준은 아직 게이 커뮤니티에 발을 내딛지 못한 탈북민 게이를 만나게 됩니다. 아는 게이 없이 홀로 고립된 그의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 테죠. 철준은 그를 종로 술집에 데려갑니다. 처음으로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낸 그는 철준에게 후련함을 고백합니다. 철준은 그 모습에서 영준과 처음으로 대화했던 날의 본인이 겹쳐 보였을 것입니다. 그날 철준 역시 머릿속에 있던 말을 처음으로 꺼낼 수 있었다고 그 기쁨을 영준에게 표현했었죠.
철준은 탈북민 게이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경험은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누구나 어느 순간 철준이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이나 사회적 역할을 갖게 되고, 새로운 환경과 집단에 내뎐져지곤 하죠. 살아가는 동안 거듭 새로운 ‘나’와 커뮤니티에 적응해야 합니다. 동시에 철준이 그랬던 것처럼, 부단한 노력으로 적응을 마친 후엔 다른 이의 적응을 돕는 순간을 마주하기도 하죠.
영화의 마지막 씬, 철준이 술집에서 회전목마를 부르는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철준은 더 이상 97 모임에 나가지 못해 새로운 커뮤니티를 찾아 나섭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새로운 커뮤니티를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노력은 다시 필요합니다. 한사코 노래 부르기를 거절하던 철준이 용기를 내 힙합 노래를 부르듯이 말이죠. 그가 부르는 노래는 굉장히 미숙하게 들리지만, 사람들은 꿋꿋이 노래를 부르는 그에게 호응하며 함께 노래 부르기 시작합니다. 철준은 새로운 커뮤니티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교류하며, 스스로를 새롭게 발명해 나가고, 새롭게 찾아오는 이를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반겨줄 것입니다.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빙빙 돌아가는 회전목마’ 위를 걷듯이, 우리는 새로운 환경 앞에 계속 발을 내딛습니다. 지나쳤던 구간을 다시 걸어야 하는 그 회전목마 위에서, 우리는 철준과 영준을 오갑니다. 앞선 사람들의 안내를 받고, 또 뒤따르는 사람들을 안내하며, 그렇게 매일 스스로를 무언가로 발명해 나갈 것입니다.
<3670>은 그간 퀴어 영화에서 좀처럼 조명되지 않았던 측면을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담아냅니다. 기존 영화들이 주로 두 퀴어 인물 간의 성애적 사랑을 낭만적으로, 또 애절하게 그려왔다면, 철준과 영준의 감정은 우정과 사랑의 경계 위에서 어느 한쪽으로 명확히 기울지 않습니다. 오히려 <3670>은 게이로서의 삶을 방식을 배우며 외로움을 덜어내는 과정에 집중하죠. 그 과정에서 <3670>은 퀴어 서사를 또 다른 결의 이야기로 확장하며, 커뮤니티와 관계의 의미를 다시 묻습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만남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다시 배우며 살아가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