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아웃사이더)
새 학기. 개나리 진달래 병아리 따위를 연상케 하는 일군의 어여쁜 단어들로 장식되어야 마땅할 이 시기에, 대학가에서 들려오는 키워드는 어쩐지 좀 흉악하다. 막걸리, 청테이프, 오물, 투척, 성희롱, 성추행, 유사 성행위 등. 부산의 한 대학교 동아리에서는 전통이랍시고 오물을 섞은 막걸리를 신입생들에게 뿌려 대고 또 다른 학교의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게임 벌칙이랍시고 유사성행위 등을 지시했단다.
것 참. 대학에 입학한 해로부터 지금까지 강산의 변화를 이미 총 1회 겪은 나로서는 다소 어리둥절한 이야기들이다. 신입생 환영회에서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술을 강권하는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으나, 오물을 섞은 막걸리를 몸에 뿌리고 게임 벌칙으로 유사 성행위를 지시했다니? 이게 정말 실제 사건이란 말인가?
황망한 심정에 시계를 2007년 새내기 시절로 돌려 보니, 아, 느릿느릿 떠오르는 게 있다. 세월 속에서 잊고 지냈을 뿐, 그때에도 뭔가 꼬름한 것이 분명 있긴 했었다. 강원도로 OT를 떠났었는데, 1박 2일 일정이었던가 2박 3일 일정이었던가 지금은 그것조차 희미하지만, 어쨌든 모든 공식 일정이 끝난 밤 수십 개의 술병을 가운데 두고 수많은 선배 동기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던 그 방에 나도 앉아있었던 것이다.
그 방에서 오물을 몸에 붓는다든가 하는 일은 없었지만 큰 잔에 소주 맥주 양주와 온갖 안주를 집어넣어 오물 비슷한 걸 만들어 놓고는 그걸 벌칙으로 마시라고 한 일이 있었다. 직접적인 성추행은 없었지만 남자 선배들의 끊임없는 지분거림이 있었으며 자신의 옆으로 와 술을 따르라는 선배라는 이름의 미친놈도 있었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그 날 이후로 말로만 듣던 ‘아웃사이더’가 되었다. 자신의 옆으로 와 술을 따르라는 선배 놈의 말에 “그쪽이 이리로 오시죠”라고 답했으며, 폭탄주란 이름의 오물을 내게 마시라고 했을 때 “이런 건 못 마시죠”라고 말한 뒤 주저 없이 내 방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마음은 나로서도 사라졌기 때문에 학교로 돌아왔을 때 내가 따돌림을 당한다는 생각은 딱히 들지 않았지만, 어쨌든 나는 ‘싸가지없는 애’로 낙인찍혔고 갈 마음도 전혀 없는 과방에 대해 출입 금지 비슷한 걸 당하기도 했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고 나니 요즘 연이어 들려오는 소식들이 한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의 논란들은 부당한 일을 당한 이들의 내부 고발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그건 나처럼 싸가지 없는 아이들, 다시 말해 선배의 요구에 그저 따르지 않는, 불편한 것을 참을 의향이 전혀 없는, 몹시 못마땅하게 여기는 그런 친구들이 그만큼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렇다면 그것만큼은 참 반가운 소식이다.
내부고발자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묵인하는 피해자들이 점차 사라진다는 의미일 것이고, 그건 곧 이런 문화가 사라질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신호일 수 있을 것이다.
대학 생활을 막 시작한 이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조언은 타인이 판단하는 싸가지에 부디 연연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고 인격을 도야하는 일은 대학생활에서 몹시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내 인격을 돌아보는 기준이 정말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가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미개한 위계 문화 아래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악습에 의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스스로 치열하게 끊임없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비단 대학 생활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싸가지없다'는 말은 ‘내 눈에 어여삐 굴지 않아 못마땅하다’는 말로 꼰대들에 의해 자주 악용되곤 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싸가지’라는 말은 어떤 사람이 잘될 것 같은 낌새나 징조 즉 '싹수'의 방언인데, 자신의 눈에 마땅치 않다는 이유로 ‘싸가지’를 운운하는 이들에 의해 나의 싹수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 자명한 일이 아닌가.
그러니 필요할 때에는 기꺼이 ‘싸가지 없는 사람’이 될 수 있는 용기를 갖자. '싸가지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부당함을 참는 그 행위를 스스로 멈추는 용기. 어쩌면 그게,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대학생으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나의 큰 한 걸음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