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여학생이 보건실에 갔다는 얘기가 들리면 그녀를 보기 위해 눈썹 휘날리게 뛰어와 보건실 문 앞을 지키고 서있다. 사귀는 여자친구가 아파서 조퇴라도 하면, 그녀를 위해 동반 조퇴를 하여 여친 죽이라도 사먹이겠다며 난리를 친다.
아픈데도 없으면서 에어파스를 연신 뿌려대고 켁켁 하루에도 서너 번씩 키를 재고 있다.
안 도와줘도 되는데 분리수거를 해주겠다고 하고
아프지도 않으면서 잠깐만 누워있어도 되냐고 묻는다.
귀여운 고딩들!
학교마다 그 분위기가 몹시 다르다.
엄마들이 가장 관심 있게 보는 것은 서울대와 의대 입시결과! 중복 합격과 재수 삼수까지 포함하여 수치상으로 보이는 그 입결은 학교별로 차이가 큰 편이다. 수시와 정시 골고루 성과를 내는 학교가 가장 이상적이겠으나, 전국 단위 자사고 몇 곳을 제외하고는 강남권 학교로서는 정시 외길 인생일 뿐.
그렇다면 서울대와 스카이 그리고 의대를 제외하고 갈 수 있는 학교들을 떠올려보자.
중경외시, 건동홍숙, 국홍세단
그 역시도 수시로 입학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학교들이다.
내신 등급 2점대 학생들이 지원하여 들어가는 상황이니, 정시 즉 수능 점수가 좋은 학생들이라면 수시 따위 재껴버리고 너끈히 정시에 돌파하려고 하는 것이 순리일 수도 있겠다.
이 학교는 남녀공학. 입시 결과를 소문낼 만큼 가시적인 부분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대학교에 0명이었던 몇 년 전에는 서울대 입시결과에 공개 거부를 했던 적도 있다. TT
학교장 추천을 받은 한두 명이라도 들어가 주면 좋으련만, 무엇이 문제인지...
그렇게 공부 잘하고 성적 좋던 두 아이도 결국 떨어졌다고 하니 교무실 분위기가 너무나 무겁다.
고3의 입시를 보자면 좋은 학교 보내주려고 애쓰는 선생님들의 몫이요, 알뜰살뜰 내신 챙기랴 수능까지 준비하랴 야무지게 공부하는 아이들의 몫일뿐.
내가 만나는, 그러니깐 보건실에 자주 오늘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떤 목표를 가지고 있을까?
다인이 수아 예지는 예쁜이 3 총사이다.
특히 수아는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요즘 스타일의 세련된 학생이다.
셋 다 키는 크지 않지만, 예쁘게 잘 꾸미고 다니고 깔깔깔 잘 웃으며 밝고 유쾌하다.
라떼는, 마르고 허약하며 얼굴이 하얀 애를 청초하다 예쁘다며 좋아라 했었다면
지금 고딩들은 어찌 그리 진화를 한 것인지
얼굴이 예쁘면서 성격도 좋은 아이를 사귀고 싶어한다.
대화가 통해야 하고, 배울점이 있어야 한다며 나름의 이성교제 철학을 과시하기도 하며 말이다.
인근 아파트에 거주하고 같은 중학교를 졸업하여 오래도록 우정을 쌓고 있는 세 여학생.
그 아이들은 인 서울이 목표이다. 좋은 학과를 가면 좋겠지만, 대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술을 하다가 그만둔 예지는, 스스로를 끈기가 없었다고 말한다.
공부도 끈기가 있어야 할 텐데, 예지 말에 의하면 미술이 더 독하고 집요한 끈기가 필요했었노라 회상한다. 예고에 합격했었더라면 계속 미술을 했겠지만, 고민 끝에 그만둔 지금이 후련하지만 공부로 대학을 가려니 갑갑하기도 한 것 같았다.
오늘도 셋이 보건실에 왔다.
이 학교 보건실은 다른 학교와 달리 좀 특이하다.
행정실과 교무실 옆에 위치하여 학생들의 왕래가 많은 보통의 보건실과 달리, 지하 식당 입구에 위치해 있다. 운동장 쪽에서 보면 지상이라 햇볕이 잘 들지만, 보건실 문을 열면 지하 식당이 보이는 구조. 입구가 어두컴컴하다.
보건실을 위해 제법 넓은 공간을 할애해주시어 내가 가 본 보건실 중 최고의 시설을 자랑한다. 작은 병원의 병실 서너 개쯤 되는 사이즈에 최신식 물품들을 보유하고 있으며 보건실 외 학교 시설도 매우 훌륭한 편이다.
겉으로 보이는 입시 결과와 달리 이 학교는 내실이 대단하다.
서울대와 의대 실적이 저조하면 어떠하리.
열성적인 선생님들이 부엉이 같은 눈으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교장 교감 선생님 필두로 관리 또 관리하신다.
목표는 성적을 올려 원하는 대학에 보내주기!
요 이쁜이 세 녀석은 숙대, 홍대, 건대가 목표이다. 셋 다 문과여서 문과 내 레벨에 맞게 원서를 쓸 예정이고 수시 입학은 내신 등급에 밀려 진작에 접어두긴 했다.
공부 잘하는 그룹만 신경 써줘서 평범한 아이들이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하는 일부 학교에 비하면, 지금 이 학교의 학생들은 학교 생활에 대체로 만족하며 다니는 것 같았다.
심지어 공부를 못하면 그 수준에 맞는 특공대 그룹을 짜서 선생님들이 더욱 관심 갖고 끌어주신다. 전제는 열심히 해보겠다고 하는 학생의 의지. 선생님들의 그 열정은 대단히 감동적이며 놀라웠다.
오프 더 레코드로다가, 요 학교엔 기간제 교사의 비율이 좀 높은 편이다.
학교마다 분위기가 많이 다른데, 연세 많은 쌤들이 많이 계실 때도 있고 로테이션하다 보면 어떤 분위기가 형성될지 겪어봐야 할 때도 있으나,
이 곳은 열성적인 사립학교이다 보니 정교사 모집에 앞서 열성적인 기간제 선생님들 기용을 폭넓게 하고 거기서 역량 발휘가 검증되면 추후 정규직 임용 자체 시험에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선생님 입장에서야 어떤 학교에 부임하는지 보다 당장 임용을 통과해서 배정받고 정규직이 되는 것이 최고이겠으나, 사법고시 통과하던 옛 시절처럼 갓 졸업한 쌤들에게 바늘 구멍 같은 일이기도 하다.
학생들에겐 정규직인지 기간제 교사인지 상관없다. 다 각자 맡은 일 열심히 하실 뿐이니 아이들에게는 의미 없는 어른들의 영역이니. 그래도 내가 볼 땐 정말 열정적인 쌤들이 많은 좋은 학교임이 분명했다.
긴히 의논할 게 있다고 학기 초 찾아오신 선생님 한 분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선생님, 간호학과를 지망하는 애들이 제법 있는데요... 사실 현재 내신과 정시 성적으로는 인서울 간호대는 어려워 보여서, 전문대와 지방사립대까지도 찾아보고 있어요. 수능은 수학 점수만 확보하면 좀 더 유리한 상황이라 열심히든 하는데요.. 진로 관련 세특에 동아리 활동을 하나 넣어주고 싶어요. 애들이 열심히 하겠다고 잘 따르는 편이라, 쌤께 부탁 좀 드려요. 보건 관련 동아리 하나만 맡아주실 수 있을까요?"
물론 yes 했다. 보건실에 자주 오는 세 여학생 중 한 명도 그 동아리에 포함되어 2주에 한번 주기적으로 모였다.
중3 여름과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면
어느 고등학교에 갈지 고민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며 결국은 집 근처 학교 이름을 적어서 원서를 낸다.
영재교, 과학고, 외고, 국제고, 전국단위 자사고를 제외하고 일반고를 지원하려면
남고, 여고, 전체 학생 수, 집에서의 거리 등을 고려하여 원하는 학교 이름을 적어 넣는다.
나에게 딱 맞는 학교가 어디 있으랴
내가 원하는 학교가 아닌 강제 배정을 받은들 어찌하랴
정 붙이고 열심히 할 뿐
다인이 수아 예지는 지금 대학생이다.
가장 원하던 대학, 학과에는 못 들어갔지만
나름대로 선방하여 잘 적응하고 다닌다.
얼굴도 마음씨도 예쁜 다인이 수아 예지
졸업 무렵 양재동 꽃시장에 가서 작은 화분 사들고 보건실에 마지막 인사 와주었던 너희들
지금은 그나마 인스타로 연결되어 가끔 소식 들여다보며 지내는 것으로 만족한다.
코로나로 대학 생활을 온라인으로 하고 있는 그녀들
빛나는 20대 즐거이 보내길 바란다.
그 시절 그 세 여학생을 만나기 위해 보건실 쓰레기도 버려주고 괜스레 앉아있다 가기도 했던 남학생들아! 아쉽게도 너희들 이름은 다 기억나지 않지만,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어. 건강하길 바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