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심야당근마켓

ep2. 그렇게 철없이 중고게임기를 사러 간다.

아무런 생각이 없으면 뇌 상태가 한없이 순수해지고,

불빛이 있기에 달려드는 나방처럼

그저 좋았던 시절로 회귀하고픈 귀소본능이 살아난다.


사실, 퇴사 후 가장 하고 싶은 것은 24시간 잠을 자는 것이었는데

역시나 멍석이 깔리면 간사한 자신을 쉽게 발견하게 된다.


학창 시절, 아침에 눈 뜨기 전 첫 마디는 '5분만'이었고, 두 번째는 '1분만'이었다.

그러나, 일요일은 새벽 6시부터 눈이 떠지는 마법을 경험하곤 했다.

물론, 아빠가 놀아주던 초등 저학년 시절의 이야기지만...


두 번째 소원은 낮에 TV에 게임기를 연결해서 화면 속에 들어갈 듯 빠져보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비싸다며 생일날도 엄마에게 거부당했던 콘솔 게임기.

친구 집에 가서야 몇 판 감질나게 경험할 수 있었던...

가난과의 거리가 약간은 존재했던 환경임에도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주었던 물건.

어른이 된 후

'PC방'이라는 새로운 문화공간에서 수없이 많은 밤을 새우며

심각한 중독이 된 후에야 어린 시절 참아야 했던 게임에 대한 업보를 상쇄할 수 있었던

애증의 물건이 바로 TV에 연결하는 게임기였다.


그래, 인생 2막 어쩌고 하면서 당근 시장에서 게임기나 뒤지고 있다니 난 참 철없다.

철없기도 철없지만 사려고 마음을 먹더라도 금전적 부담이 크게 다가왔다.

새것 비슷한 것은 감당하기 힘든 가격이고, 중고 가격만 20-30만 원 선.

지금까지의 수입은 보잘것없었지만 1원도 남김없이 아내의 계좌로 들어갔고

흔한 뒷주머니도 없이 당장의 벌이마저 없었던 나에게 당근은 친구처럼 다가왔다.

할 일이 없으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들여다보게 되는 공간이다.

이제껏 먹는 당근을 싫어했던 만큼 앱 당근을 좋아하게 되어버렸다.

일단!

손해가 심해 팔지도 못하고 묶여있는 몇 푼 안되는 주식을 정리하지 않아도 용돈벌이가 가능할 것 같았다.

그렇게 '죽으라는 법은 없다'라는 진리를 되새기며 주홍빛의 새로운 세상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들락날락하며 우리 집 물건을 온라인 진열대에 전시하고

자연스레 검색창에 'PS4'라는 게임기를 검색하는 내 모습이 조금은 한심해 보였지만

'검색의 자유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라는 마음에 아이쇼핑과 동급으로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제발 누가 치워주기만 해도 고맙겠다는 무거운 나무 책장을 만 원에 팔고

3년 전 한 번 입고 옷장에 걸어 둔 아이의 고급 한복을 이만 원에 팔면서

소소한 행복감과 동시에 집안을 정리하고 있다는 작은 기여에 뿌듯하며 기세등등하고 있던 분위기였다.

몇 가지 물건만 더 거래된다면 20-30만 원 상당의 게임기를 구매한다고 해도

와이프의 핀잔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허니문 기간은 여지없이 짧았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판매 리스트에 올린 옷이나 책 등은 남의 집에도 넘쳐나는 그것이었다.

그나마 유니크한 물건을 올려도 그 가격에 사겠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팔 물건을 찾아 집안을 구석구석 헤매는 모습이 너무도 처량했고

가격을 계속 떨굴 바엔 전당포에 맡기는 편이 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2초 동안 하고

3초 뒤엔 전당포에서도 받아줄 물건은 아닐 것 같다고 서둘러 생각을 결말지었다.


'안 팔고 안 사면 된다' 그까짓 게임기 없이 평생을 살아왔는데 인연이 아닌 걸로 마음을 접었다.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부터 뭉클한 무언가가 하루에도 몇 번씩 두 눈을 자극하는 느낌을 받았다.

십수 년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넌 강아지 생각이 날 때와 비슷한 감정이었다.

이 정도 물건 하나를 사지 못한다니 왠지 분하고 서글펐다.

사려니 돈이 아쉽고, 차라리 가족과 외식을 하는 편이 좋은 아빠가 될 것 같다가도

미어지는 내 맘은 누가 보상해 주나 하는 답답함이 혼재되어 있었다.


'눈을 낮추자'

가격이 20-30(이하 단위생략)이지만 더 좋은 조건을 기다리기로 하고 알림 설정도 해 두었다.

가끔 19와 18이 나오면 누군가가 귀신같이 채가거나 몇 초 만에 내가 검색을 하게 되어도

망설이다 놓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18, 19, 20은 지금의 나에겐 무리가 가는 금액이었다. 이제 백수가 아니던가.

17이나 16이 보였을 때는 알림조차 울리지 않아 당근 본사에 항의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마음속 깊은 곳의 진실은 15나 14도 손을 벌벌 떨고 있다 놓칠 것이 뻔했다.

13을 바라보다 보냈을 땐 나의 두 발이 허탈한 몸을 동네 슈퍼의 막걸리 코너로 데려다주었다.

제일 싼 막걸리 한 병을 사들고 '돈 굳었다'라며 쓴웃음을 짓고 돌아왔다.


심리적 원인이 분명하지만 의학적 원인은 불분명하다는 상사병 같은 무언가에 갇혀있기를 한 달여.

그러다 11이 나왔다.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계와 더불어 게임 CD도 4개를 준단다.

그중 2개는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인기 게임이었다.

12를 건너뛰고 11이라니 어머, 이건 사야 해.

이걸 놓치면 빚을 내서 최신형 모델을 미친 척 사버리고 부부 싸움을 할지도 모른다. 물론 불가능한 상상이다.

판매자는 본인의 게임기가 포장지가 없어 진품을 증명하기 힘들고 구식 모델이라는 근거로

고민 끝에 밤 11시경에 올린 것 같았다.

술김이라고 의심하기엔 글이 단정하고 예의 발랐다.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당장 가서 사고 싶다고, 아이가 너무도 원한다는 거짓부렁으로

늦은 시간 빠른 거래를 원하는 철없음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상대는 놀란 눈치였지만 몇 시까지 올 수 있냐고 해서 여유를 두고 11시 40분으로 약속을 정했다.


옷을 주섬주섬 챙기는 나에게 아내가 행선지를 물었다.

애들이랑 같이 게임 좀 하려고 당근밭을 찾다가 좋은 가격의 물건을 찾았다고 했다.

이 밤에 게임기라니... 이미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빛으로 가격을 물어왔다.

2만 원이라고 해야 그런가 보다 하지 5만 원을 불러도 뭐 하는 놈이냐 할 것이 뻔하거늘.

두 발 뻗고 자고 싶어 11만 원을 얘기했다.

차분하게 돈이 있냐고 묻길래 2007년 황금돼지 해에 샀던 저금통을 깼다고 했다.

여러 번 순산한 황금색 저금통이지만 그동안 틈틈이 지폐를 구겨 넣은 보람이 있었다.

아이들이라도 신나는 리액션을 해 주면 좋으련만 게임기라 좋긴 한데 어리둥절한 표정들이었다.

빨리 가져와서 내일부터 콘솔 게임의 참 맛을 보여주리라 다짐하며 집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밤 운전은 참 오랜만이었다. 일이 많아 퇴근도 아침에 했던 날이 부지기수였는데

야간 운전도, 눈에 걸린 안경도, 이제는 완전히 바뀐 나의 환경을 다시 확인시켜주었다.

그것보다는 이 밤에 그 물건을 사러 가는 내 모습이었다.  

지금 이게 옳은 행동인지, 정신 못 차리는 철부지는 아닌지, 가정에 금전적 보탬은커녕 솔직히 이건 낭비였다.

앞서 언급했듯 평생을 없이 지낸 물건 아니던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두세 번 가로저으며 잡생각을 지우려 했다. 거래를 약속했으니 돌이킬 수 없다.

그러자, 이제는 알 수 없는 의심병이 마음속에 자라기 시작했다.

왜 시세보다 저렴하게 내놓았을까? 이곳에도 사기꾼이 많다던데?

차라리 급하게 돈이 필요하다고 적어놓았으면 이렇게까지 의심하지는 않을 텐데.

그렇다고 지역주민들에게 돈 없다고 광고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겠지.

그것도 아니면

작동이 잘 되다가도 알 수 없는 원인으로 안될 때도 있는 불량품은 아닐까?

밖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작동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 않은가?

사회생활이 끝났음에도 이렇게 또 한 번 뒤통수를 맞는 것인가?

영화 속의 마약거래처럼 물건과 돈을 동시에 서로 넘겨받는 것일까?

온갖 잡스러운 생각에 신호위반의 경계선에서 급정거를 했을 때는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게임기를 사러 가다 하늘로 간 '콘솔 아빠'로 기사가 나진 않을까?

언젠가 울면서 봤던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을 떠올리기도 했다.


약속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마음이 두근거렸지만 일찍 연락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싶어

15분여를 흘려보내고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편한 옷차림의 젊은 청년이 종이가방에 물건을 들고 나왔고

그의 인상착의를 보자마자 별다른 불상사는 없을 것 같은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예의상 봉투에 넣어간 현금을 건네고 물건을 받았다.

혹시 연결이 잘 안되면 다시 연락을 달라기에 마음이 놓였지만

연결이 안 될 수도 있다는 결함을 얘기한 건가 싶어 조금은 불안했다.


돌아오는 길엔 오랜만에 음악도 크게 틀고 드라이브를 만끽할 수 있었다.

게임기가 있는 친구 집에 가려고 과자로 친구를 꼬드긴 기억에서

저녁까지 게임을 해서 친구 엄마에게 눈치를 받았던 기억까지 이제는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된 것 같았다.


자정 무렵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들은 벌써 잠들어있었다.

나 혼자 일단 게임을 즐길 수 있으니까 다행이지 싶었다.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 컴퓨터 모니터에 연결시켜보았다.

거실의 TV는 언감생심 아내의 눈치가 보여 애초에 연결할 마음조차 없었다.


그러나, 인생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또 한 번 깨달았다.

구형 모니터에 연결하는... 그러니까 구멍이 맞지 않았다.

모니터를 새로 사야 하나? 새로 사서 연결했는데 게임기가 작동을 하지 않는다면 어떡하나?

아니, 나란 놈은 왜 이런가? 신기하게 화가 나지 않고 웃음이 나왔다.


이럴 땐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이 있다.

무조건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한다.

게임기는 정상이라고 믿자. 어쨌건 기계를 샀으니 모니터만 구매한다면 천국을 느낄 수 있다.

모니터 가격에 연연하지 말자. 마음을 비우고 괜찮은 놈으로 구하자.


다음 날

일하던 시절의 부지런함으로 오전부터 몸을 움직여 모니터를 구해왔고

결과적으로 20만 원 상당의 물건을 구매한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날 오후,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심야엔 나 혼자 달콤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아내가 중간에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오기 전까지만 자유를 누리고 판을 접어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버킷리스트까지는 아니었지만 소원을 풀었으니 이제는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일만 놓았을 뿐 가족구성원으로써의 역할은 남아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되나 고민했었다. 할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작가의 이전글 적당히 살아도 행복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