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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현 Mar 27. 2023

된장탄 술을 받아마셨던 '나'는 이제 여기에 없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가만히 누워 끔벅끔벅 천장을 본다. 그러다 보면 마치 우주 한가운데에 버려진 기분이 들면서 이따금 지난날의 내가 살며시 나타났다가 이내 또 연기처럼 사라진다. 아무래도 멍하니 있다 보면 좋은 것보다 그립거나 아쉬운 기억들이 나를 더 사로잡는다. 한밤중에 악몽을 꾸고 일어났을때와 조금은 비슷하려나. 간혹 등신 같았던 지난날이 천장에 슥~ 하고 나타나면 눈을 질끈 감고 싶게 끔찍하다. 악몽을 꾸고 나서는 ‘아, 꿈이었구나’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이라도 느끼겠지만 나는 그렇지도 못하다.


한이 서려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귀신처럼 나의 등신 모멘트는 ‘아 다행이다’ 대신에 ‘아 시바. 그때 왜 그랬지?’같은 통한으로만 남아있다. 가끔은 울화통이 터져 벌떡 일어나 허공에 하이킥을 해대면서 생각한다. ‘그때 진짜 왜 참았지?’ 시간여행이 가능해진다면 나를 함부로 대한 인간들에게로 가서 죽빵이라도 갈겨버리고 싶다.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꿈꾸다 보면 인간은 으레 불행해진다. 카르페 디엠, 괜히 현재를 살자고 열심히 외쳐대는 것이 아니다. 달리 방도가 없다. 더는 현재를 후회로 남기지 않도록 전투태세를 갖추고 매일 가드 올리고 집을 나서야지.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이지. 반복되지만 않으면 되는 거야. 오늘도 어디 가서 처맞고 질질 짜지 않으려면 가드 올리고 지지 말자. 그렇게 사사로운 생각을 그리다가 잠이 들곤 한다.


“과거의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언제로 돌아가고 싶나요? 거기서 무얼 하고 싶나요? “따위의 질문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마주하는가. 불가능한 걸 알면서도 인간들은 가끔 꿈을 꾼다. 어쩌면 상상만으로 위안을 주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이랬으면 어땠을까? 인생에 가정법을 그리는 순간이 어디 하나뿐이랴. 현재가 마음에 들지 않을수록 자꾸 과거를 떠올리며 의미 없는 가정들을 세운다. 그리고 그럴 때면 빠지지 않고 떠오르는 기억 하나가 있다.     


연말이 다가오면 빠질 수 없는 회식, 그것도 다른 팀이 함께 모여서 몇 배로 거지 같아진 전체 회식 날의 기억. 회사생활은 줄곧 어렵고 이해가 안 되는 일투성이였는데 그날은 신박한 사건 하나가 더 보태진 날이다. 가뜩이나 술을 못 마시는지라 회식 자리가 반가울 리는 없는 데다가 싫어하는 것 두 개가 모이니 네 배로 싫어지는 기적. 퇴근 후의 발걸음은 천근만근 무지막지하게도 무거웠다. 시끌시끌한 공기로 가득 찬 고깃집 구석진 자리에 앉아 혼잣말을 내뱉었다. ‘하 빨리 집에나 가고 싶다.’


나도 모르게 나오는 한숨을 들키지 않으려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미모의 여인과 눈이 마주치고 만다. 어머나 세상에, 저렇게 예쁜 사람이? 그녀는 나를 보며 같이 한잔해야지 뭐 하고 있냐며 다그치는 듯 했다. 소주잔을 들고 맑고 해사하게 웃고 있던 그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그녀는 벽면에 붙어있는 소주 광고 포스터의 주인공 ’한가인‘이었다. 이내 표정을 바꾸어, 이렇게 말을 거는 듯했다. ‘혹시 내가 부럽니? 너는 왜 거기서 그러고 있니?’


어여쁜 ‘한가인’과 그저 ‘평범한 회사원 1’정도밖에 안 되는 나. 우리 둘 사이에는 결코 넘을 수 없는 허들이 있는 것 같았다. 이럴 때 쓰는 말이 넘사벽인가. 한가인의 미모, 성공한 인생, 남편도 연정훈. 그에 반해 내가 가진 것은 너무나 초라했다. 미모도 없고 인생은 망했고 남편은커녕 남친도 없는 인생. 그런데 그 순간만큼은 그녀가 가진 많은 것들을 다 제치고 이 회식 자리에 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가 제일 부러웠다. 하필이면 소주 광고의 포스터가 딱 내 시야에 놓여있을 건 뭐람. 광고 포스터는 등지고 앉아도 됐잖아. 왜 하필 앉아도 그런 자리에. 인생 엿같아. 되는 것도 없지.


멈춰있는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내 처지는 더 초라해질 뿐이었다. "하, 한가인은 참 좋겠다. 한가인으로 태어나 지금은 넓고 좋은 집에서 연정훈이랑 알콩달콩 깨를 볶고 있겠지? 이런 회사에 다니면서 회식 자리 올 필요도 없는 인생. 너무 부럽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났는데 우리의 처지가 이렇게나 다른 건 대체 무슨 연유일까. 전생에 무슨 큰 죄를 지었길래 나는 이러고 앉아서 푹푹 나오는 한숨을 애써 숨겨가며 웃고 있어야 할까. 아름답게 웃고 있는 한가인을 보면서 쓸쓸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용~' 회식 자리를 박차고 확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어디 내가 그런 깜냥이 되는 인간인가. 그저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리길 기도하며 쥐 죽은 듯이 앉아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취한 멤버가 늘어나는지 분위기는 점점 더 떠들썩했다. 마음을 기댈 수 있는 팀원 몇 명과 속닥속닥하고 있는데 옆 팀 부장이 휙 우리 테이블로 넘어왔다.     


 "여기 막내가 누군가?“

나다. 나를 찾고 있다. 갑자기 타 부서 부장은 굳이 안 해도 될 막내들의 축하 파티를 자처하고 있다. 환영의 축하를 해주는 것은 감사한데 아니 솔직히 말하면 그딴걸 왜 하나 싶은데 그 방식이 후졌다는 게 더 문제다. 맥주 글라스를 테이블에 탁 올려놓더니 소주로 콸콸콸콸 채운다. "자! 막내 사랑 한 번 보여줘~" 소주로 가득 채운 맥주잔을 바로 앞에 있는 직원에게 슥 밀더니 눈짓으로 가리킨다. 이쯤 되면 뭘 하라는 건지 알지 않냐는 그 눈빛. 애석하게도 우리 팀 직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치켜뜰 뿐이었다. 혹시 막내를 사랑하는 만큼 이걸 들이키라는 것인지요? “거~ 사랑하는 만큼 맛있는 거 팍팍 넣어주라고~” 그러더니 테이블에 놓여진 음식들로 눈을 옮긴다.


이런 환영 인사는 구시대적인 드라마에서나 봤던 문화가 아닌가. 그때부터 내 심장은 벌떡벌떡 뛰기 시작했다. 에이, 설마. 저걸 나보고 진짜 마시라고 하진 않겠지. 그 짧은 시간에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지만, 결코 장난 같지 않아서 더 심장이 뛰었다. 우리 팀 직원들은 눈빛 교환을 하면서 ‘진짜 이걸 해야 하는 건가?’ 하라니까 하긴 하는데 그 와중에도 다들 어쩔 줄을 몰랐다. 최악의 경우 진짜 마셔야 하는 상황을 대비해서 오이, 부추, 마늘 같은 것들을 넣어주었다. 어쩐지 옆 팀 부장은 이 팀의 약소한 막내 사랑에 아쉬운 것 같았다. 그러다 이내 우리팀 황 과장의 큰 사랑에 얼굴이 확 폈다. 황 과장은 당시에도 팀에서 제일 싫은 사람 중 한 명이었는데 그녀는 다른 팀원의 배려가 무색하게도 마지막에 된장을 한 스푼 퍼서 휘휘 저어주며 피날레를 장식했다.


정말 마셔야 하는 건지 망설이던 순간에 한마디가 나를 부추겼다. “자기야, 옆 팀 막내는 아까 다 마셨어~” 그 말은 다른 뜻으로는 안 마시면 안 된 다였고 또 그쯤은 별거 아니라는 말이기도 했다. 다른 팀 막내도 마셨다는데 내가 거절했다가는 분위기 못 맞추는 사람으로 찍히고 또 욕을 먹을지도 모르잖아. 안 마시고 욕먹기, 더러운 술 마시기. 둘 다 끔찍하게 싫었지만 끝내 나보다 남을 중요시했던 건지 눈을 질끈 감고 마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조금은 우습기도 하지만, 나는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조금은 울었다. 사회생활이 다 이런 건가, 가뜩이나 술도 못 마시는데 거기에 된장 탄 술까지 마셔야 한다니. 다들 이러면서 남의 돈을 버는 건가. 어른이 되는 건 이렇게나 힘든 일인가? 집에 도착해서도 질질 짜다가 억울함이 극에 달해 별안간 출근 땡땡이를 예고한다. “나 내일 출근 확 안 해버릴래” 그렇게 말해놓고도 확 그런 짓거리를 저지르지도 못한 채 얌전히 출근했고 된장을 넣었던 과장에게도 웃으며 인사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겨우 된장 술 하나에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나. "너는 이래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하냐?"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던지는 그런 말을 나는 참 많이 들었다. 내가 나약하고 쉽게 부러지는 사람이라는 사실도 어쩌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 알게 됐다. 부모님의 따뜻한 그늘에서 세상의 민낯은 모른 채로 자랐기 때문이다. 그 축복이 진정한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얼마나 큰 혼란을 주게 될지 예상조차 못 한 채로 그저 아름답게만. 현실의 매운맛은 예고 같은 것도 없이 내 뺨을 후려갈겼고 어떤 게 진짜 세상인지 갈피를 잡느라 아주 혼란스러웠다.

 

고작 이런 일 하나도 쿨하게 넘기지 못해서 두고두고 품고 있는 나란 인간. 이런 일 몇 개만 더 만들었다가는 도저히 억울해서 살 수가 없을 것 같은 나란 인간. 나도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좋은 기억을 가득 띄운 채 미소를 짓고 잠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 마음으로 시작했다.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을. 자고로 변화를 꿈꾸는 사람은 현재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이 너무 좋은 사람에게는 변화만큼 세상 쓸데없는 것이 또 없을테니.


이따금 벽에 붙어있던 포스터 속 한가인이 나를 찾아오곤 한다. 여전히 미모 없고 성공 못했고 남친 없고. 더 나아진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똑같은 처지다. 그래도 된장 술쯤은 안 마신다고 말할 수 있게 됐고 그래서 고작 된장 술 같은 걸로 우는 일 따위는 안 만들 수 있을 만큼은, 최소한 그만큼은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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