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 1학년 시절의 겨울, 추위에 덜덜 떨면서 보신각 종소리를 들었다. 인파에 치여서 보신각의 형상은 보지도 못했고, 종로의 거리 한복판에서 사람들 틈에 갇힌 채로 소리만 겨우 주워들었다. 감격의 순간에 나는 소원을 빌었었다. "꼭 방송국에 입사하게 해주세요." 간절하게 빌었던 꿈은 그런 형태를 하고 있었다. 하고 싶은 일이나 되고 싶은 꿈에 좀 더 가닿게 해주세요.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바뀌는 찰나에 듣는 종소리가 대체 무슨 힘이 있을까.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그때의 기도가 척척 다 이뤄지란 법도 없는데 말이다. 그때는 왜인지 모르게 새해의 기운을 흘려보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묵묵히 일상을 잘 살아내는 힘보다도 특별한 순간의 에너지가 더 대단한 걸 가져다줄 것 같았다. 이를테면 좋은 '기'를 받아야만 일이 척척 풀리고, 새해가 오는 순간은 절대 놓치면 안 될 것 같았다.
보신각 종소리는 아무런 효력이 없었다. 내 인생은 고작 새해의 일출을 본다거나 보신각 종소리를 듣는다거나 산을 오르는 행위로 바뀌지는 않았다. 주구장창 소원을 빌어봐야 이뤄지기는커녕 근처에도 못 가는 게 현실이었다. 당연한 사실이기는 하다. 새해가 된다고 해서 저절로 새사람이 되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새해가 밝을 때마다 특별한 의식을 치러야 할 것 같은 조급함은 자연스레 사라졌다. 나는 더 이상 1월 1일에 별다른 의미를 부여하지 않게 되었고, 뭐라도 의식을 치러내야 인생이 잘 풀릴 것 같은 막연한 조바심에서도 벗어나게 되었다.
새해맞이 의식을 생략한 데에는 그 자체로는 별 효과가 없다는 사실 외에도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상하게도 언제부턴가 무엇이 되고 싶다거나 대박이 났으면 좋겠다거나 하는 욕망을 잃어버렸다. 더 솔직히 말하면 너무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나는 금세 잘도 지쳤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도 버텨내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지같은 회사 생활을 견디고 또 참아내면서 얻는 게 과연 무엇일까. 모두가 그렇게 살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나 역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 잘 납득이 되지는 않았다. 하루의 끝이 불행한데 더 버틸 이유가 과연 있는 걸까.
그즈음부터는 그냥 살아지는대로 살았다. 더 이상 거창한 목표를 세우지도 않았다. 남들은 계속해서 인생을 그려나가는데 나는 멈춰있었던 거다. 마치 출발선에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전력 질주하는 상대를 지켜보는 육상 선수 같았다. 사회에서 당당하게 자기소개를 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래도 마음은 평온하고 좋았다. 내가 어떻게 살든 시간은 정직하게 흘러갔고 새해는 계속해서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나는 정말 이대로도 충분히 좋은 걸까, 어쩌면 욕심을 꼭꼭 숨겨두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은 아닐까. 남은 인생에서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자주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미로 속에 갇힌 기분이 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내 인생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걸까. 잘 가고 있는 걸까. 마침표를 찍기 전까지는 결국 알 수 없겠지. 어떻게 살아야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났을 때도 후회하지 않을 수 있는지,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지금의 시점에서도 과거를 돌이켜보면 만족스럽지만은 않다. 어떤 이유로든 내가 하지 못한 것들, 시기를 놓쳐서 날려버린 것들이 아쉽지 않냐면 또 그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거를 아쉬워하기에는 인생이 너무나도 짧고 세월은 지금도 나를 떠나가고 있지 않나.
겨울도 어느새 끝무렵이다. 봄이 오면 새로 사둔 원피스를 입고 봄바람을 맞으며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