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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두부세모 Feb 28. 2023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곳에 있는 4

기분 좋은 불편함들

한옥 생활은 관리뿐만 아니라 현대식 주택보다 불편한 점들이 많다. 그게 싫어서 못 사는 사람들도 있고 불편함이 주는 묘한 매력에 빠지는 사람도 있다.

고 김환기 화백은 말했다.  “내가 살고 싶고, 짓고 싶은 집은 양옥이 아니라 우리 한식주택이다…. 문간에 들어와서도 신발을 벗었다 신었다 해야만 되는 우리네 가옥양식, 꼭 감기 들게 마련인 구조. 집결양식이 양옥이라면 분산 독립된 것이 우리네 주택구조이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비합리적이요, 비편리적인 조건만을 지닌 우리네 가옥이 대단히 맘에 든다.”*

내가 이 집에서 체득한 것은 기분 좋은 불편함이었다.

한옥 생활을 낭만화하거나 미화하려는 의도는 없다. 살아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사실들, 불편함이 만든 삶의 풍요로움에 대해 기록하고자 할 뿐이다.

실내 진입은 마루로부터 시작됐다. 우리는 기단에 올라서서 또는 마루에 걸쳐 앉아 신발을 벗는다. 마루의 높이는 어린이, 어른 모두 신발을 벗고 신기 편한 높이였다. 신발장은 아쉽게도 기단 위 제자리가 아닌 곳에 놓여있어 매일 눈에 거슬렸다. 에메랄드 키치한 디자인이 목재로 바뀌었어도 그것을 위한 마땅한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현대한옥은 기존 한옥엔 없던 현관을 삽입하거나 마루 밑에 신발장을 만들기도 한다. 나 또한 한옥을 설계할 일이 생기면 신발장이 놓일 곳을 잘 계획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한옥과 잘 어우러지면서 신발을 꺼내 신고 집에 와서 벗고 넣을 때의 움직임이 자연스러울 수 있게 말이다.

마루의 높이는 일반 계단 높이와 달라서 바닥을 손으로 누르면서 몸을 쑥 웅크리거나 힘이 한쪽 다리로 기울면서 기우뚱한 동작을 취하며 마루에 오른다. 평상적이지 않은 동작이 끝나고 두 발바닥이 찬 바닥에 닿는다. 내부로의 진입이다.

새시가 달린 툇마루는 경계면에 의해 내부지만 문이 열리면 외부이기도 했다.

마루, 현대에 와서는 테라스 등과 같이 안에 있지만 바깥이 되는 공간은 실내가 주는 안정감과 아늑함 실외에서 오는 자연의 변화와 자극을 동시에 깊이 누릴 수 있다. 이 집 툇마루는 우리 가족들의 삶이 풍요로울 수 있도록 즐거움을 제공하고 때로는 잔잔한 여유를 주기도 하며 생기를 불어넣어 주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가족들과 간식을 먹는 공간이자 놀이공간, 할머니의 작업공간이었다.

또 구조적으로 가장 바깥에 놓여 내부와 외부를 연결해 주는 완충역할도 해서 손님을 집안까지 들이지 않아도 편하게 맞이할 수 있는 장소였다. 이곳에 할머니 친구들이 놀러 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고, 내 친구들이 가방을 던져 놓고 앵두를 먹었다.  

우리 집에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마루에 걸터앉아, 노래를 부르거나 과일을 먹거나 이야기를 짓거나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거나 슬픈 얼굴을 드러내거나 누군가를 기다리거나 했었을 테다. 알려주지 않아도 모두가 자연스럽게 걸터앉아 자신의 시간에 틈새를 내는 곳이었다.

 사실 툇마루는 나에게 앉아있는 곳이라기보다 모름지기 눕거나 엎드려 있어야 하는 곳이었다.  사실을 말하건대  모든 방들에서 거의 굴러다니고 기어 다니긴 했다.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수운 한옥 방바닥에 몸의 면적을 최대한으로 붙이고 싶었을 뿐이다. 모기장만 치면 바깥 맑은 공기가 선선하게 들어와 시골에 놀러  것만 같았다. 누워있으면 이곳도 시골이라면 시골이지만 이곳이 아닌 가본 적이 없는 시골이 상상되는 것이리라. 그럼 다른  따윈 미적거리고 상상 여행을 시작한다. 가본 적이 없는 시골에서부터 책에서 봤던 바닷속, 네티처럼 지붕 사이와 지붕 위까지 뛰어다니다 아주 가까운 환상의 공간에서 마무리.

이곳에 누워있던 수많은 여름들을 글을 쓰며 줄곧 생각했다. 위잉거리는 선풍기, 살랑이는 얇은 티셔츠,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찢어지는 매미소리, 해야 할 일이 없어 시간이 넘치던 그때, 잃어버린 것이 없지만 무언가 잃어버린 것만 같았던 기분까지 차근히 떠올리다보니 마지막엔 수박 냄새만 남았다.


** 김환기,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75p-77p [문학과 예술] 1954.1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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