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저릿하고 시렸던 스물셋 (사랑)이야기.
그녀는 갓 스물셋이었다.
여인으로 살아가는 날들 중 미완으로서의 가장 어여쁜 시절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애써 꾸미지 않아도 말랑한 햇복숭아처럼 뽀얀 피부를 가졌고, 성년의 날을 몇 해 넘겼기에 스무살때보다 조금은 더 짙은 청춘의 빛을 내었다.
그녀는 대학 캠퍼스에서, 청춘들이 모여진 시끌한 강의실 한쪽에서, 그를 보았다.
어쩐지 그의 무드와, 무드의 온도가 꽤 괜찮아 보였다.
일주일에 한번 있는 강의. 그렇게 몇번이 흘렀다.
그도 그녀를 보았을까. 어느때부터인가 그의 친구들과 그는 강의실에 들어오면서 그녀가 자리하는 쪽을 의식하며 그를 몰아가기 시작했다. 느낌과 분위기가 묘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렇게 몇주가 더 흘러 그와 그녀는 마음이 통하는 사이가 되었고 스물셋과 스물다섯의 푸른 정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를 특별하게 여겼으며 서로를 매우 아꼈다. 손을 맞잡는데는 한참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문장력이 탁월했다. 그녀에게 장문의 문자를 보낼 때마다 문학작품 수준의 글이 피올랐다. 사랑에 빠진 스물다섯의 청춘만이 만들어낼수 있는 애닳기까지한 글들이었다. 그녀는 한낱 휴대폰 문자 속 글들이었음에도 소중한 사랑글을 마냥 넘길수 없어 그녀의 모니터 공간 안에 일일이 타잎을 쳐두었다.
그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선물하고 싶어했다. 그는 소박한 펜들과 필통, 다이어리 등을 선물했다. 진갈색 가죽 다이어리 안에는 그가 장마다 그려놓은 작은 그림들이 있었고 장을 넘길때마다 그림들이 이어지고 커지면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그는 그녀의 배경을 존중할 줄 알았다. 그녀가 살던 동네의 후미진 골목길을 감성과 낭만이 있는 곳으로 표현해 주었다. 데이트를 하는 날이면, 그녀의 반지하방 집 앞에 먼저 와 늘 서있었다.
그는 사진을 퍽이나 전문가처럼 찍었다. 그녀는 자주 그의 사진 속 개체가 되었고 그는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그녀의 사진을 인화하여 선물하곤 했다. 사진 속 그녀는 늘 그녀보다 더 나은 그녀로 표현되어 있었다.
그는 그녀를 돕고 싶어했다. 그녀에게 과제가 쌓여있으면, 살며시 옆으로 와서 도울 것이 없는지 물었다. 그리고 도울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긴 것을 기뻐하며 마음 다해 진심으로 도와주었다.
그는 브라운 가죽 자켓과 수염과 검정 뿔테가 잘 어울렸다. 보통 가죽자켓을 입고 수염을 기른 남자란 터프하고 마초같기 마련이나, 검정 뿔테의 도움 때문인지 그는 묘하게 부드러웠다. 그와 모르는 사람도, 그와 말을 섞지 않아도 부드러움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는 이상과 비전과 목표가 명확하고 확실했다. 그녀는 기꺼이 그의 그림 안에 함께이고 싶어했다. 그녀는 그와의 미래를 꿈꿨고 그 꿈은 벽지의 색깔까지 그려질 정도로 매우 자연스러웠으며 현실적이었다.
여느날처럼 강의실에 들어갔다.
그녀를 맞이하는 그의 온도가 보통의 날들과 사뭇 다르다는 것을 그녀는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그녀의 눈을 애써 바라보지 않았으며 그녀는 수업 내내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그의 개인 홈페이지에 들어가보았고, 한쪽에 스윗하게 자리하던 그녀와의 사진첩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어떠한 느낌도 언지도 없었기에 그녀는 영문을 알 길 없어 당황했고 황망했다.
하루아침에 바뀌어진 그의 모습의 이유를 간절히 알고 싶었지만 두렵고 무서워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꿈에는 자주 그가 찾아왔다.
[어떤 말을 해야하는지 난 너무 가슴이 떨려서
우리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나고 있네요.
이건 꿈인걸 알지만 지금 이대로 깨지 않고서
영원히 잠잘수있다면..
날 안아주네요 예전모습처럼
그동안 힘들었지 나를 보며 위로하네요
내 손을 잡네요 지친 맘 쉬라며
지금도 그대 손은 그때처럼 따뜻하네요
혹시 이게 꿈이란걸 그대가 알게 하진 않을거야
내가 정말 잘할거야 그대 다른 생각 못하도록
그대 이젠 가지마요 그냥 여기서 나와 있어줘요
나도 깨지 않을께요 이젠 보내지 않을거에요
계속 나를 안아주세요...
이제 다시 눈을 떴는데 가슴이 많이 시리네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난 괜찮아요 다신 오지 말아요]
<꿈에>라는 유명 여가수의 노래는 그녀의 꿈 안에서 현실이 되어있었다.
밤마다 그녀는 헤아릴 수 없는 아픔과 상처에 괴로워했다.
그의 마음도, 아무런 이유도 알지 못한 채 그녀는 그를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스물셋의 저리고 저릿한 사랑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몇 년이 흐른 뒤에도 그녀는 그와 함께 보았던 영화의 OST가 어디에선가 들려올라치면 물리적으로 가슴이 저며오는 것을 느꼈다.
아프고 따가운 상처 부위에 시간이라는 특효약이 덧대어져 이제 그녀는 그녀와 꼭 맞는 남자를 만나 결혼하여 살뜰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는 이제 그녀에게 더이상 저릿한 대상은 아니나, 그녀는 아직도 가끔 초가을 냄새가 날 때면 그의 마음에 대해 혼자 질문을 던져보곤 한다.
그녀를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눈빛에 대하여
그녀를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언어에 대하여
그녀를 그토록 사랑했던 그의 진심에 대하여.
분명 사랑이었다.
의심을 품을 수 없는, 그의 곳곳에서 묻어나고 표현되던 사랑.
그러나 그녀는 그가 지니처럼 어느 순간 어딘가에서 펑- 튀어나온다고 하여도, 그 사랑의 모양이 한날에 달라진 이유에 대해선 묻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풋내 가득히 싱그러웠던, 녹색과 청색빛이 햇빛에 비쳐 아른했던, 보다 많은 양의 짙은 여운이 남겨졌던, 켜켜이 모아진 그 시절의 아름답고 시린 컷들을 보이지 않는 박스 안에 고요히 담아내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가 스물다섯에 꿈꿨던 바들을 생을 살아가며 어여쁘게 이뤄나가길 잔잔히 바라기로 했다.
세월이 흘러 그녀의 눈빛과 미소가 바래어져도 그 상자 안은 언제나 스물셋의 초록빛일 것임을 잠잠히 기뻐하며... 그렇게 그녀는 저만치 발 밑에, 꽤 깊은 아래에 상자를 넣어두고 그것의 유무조차 잊은채 오늘도 제일 사랑하는 남편과 함께 푸르게 살아간다. 안온하게, 고즈넉하게. 더이상 저민 사랑이 현재로 걸어오지 않음을 감사하며...